1992년 6월 세계보건기구(WHO)는 통계 역사상 가장 희한한 수치 하나를 발표했다. 지구 곳곳에서 인류가 매일 1억번 이상의 성교를 하며 그 결과 1백만명의 여자가 임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관계를 가진 남녀는 대부분 아이가 아니라 오르가슴을 추구했을 터이다. 지구촌의 인구폭발을 부채질할 따름인, 원치 않는 아이를 갖게 되는 것은 완벽한 피임기술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콘돔 의외로 실패율 높아
가장 오래된 남성피임법은 질외사정이다. 남자가 성교 도중에 여자의 질로부터 페니스를 빼내어 불두덩이나 허벅지 등 질 밖에 사정하는 피임법이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질외사정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오난이다. 고대 유대인들은 형이 자식없이 죽으면 시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형의 적자로 삼았다. 그러나 오난은 형수와 잠자리를 할 때마다 정액을 바닥에 배설하여 관습에 도전했다. 그의 행동은 결국 야훼의 노여움을 사서 죽음을 당했다.
질외사정법은 간단해 보이지만 남자가 오르가슴 직전에 페니스를 퇴각시키는 동작이 굼뜰 경우 정액이 한방울이라도 질 속에 남게 되면 임신되기 십상이다. 2세기 초 피임기술의 대가로 알려진 그리스 사람 소라누스는 부녀자들에게 성교중 사내가 사정했을 때는 호흡을 멈추고 몸을 뒤로 약간 빼내어 정자가 자궁 안으로 침투하지 못하게 한 다음에 즉시 일어나서 무릎을 쪼그려 앉아 재채기를 하도록 권유했다.
남성에게 가장 보편화된 피임법은 콘돔에 의한 차단피임법이다. 콘돔은 발기된 페니스를 전부 덮어씌우는 자루 모양의 고무 제품이다. 로마시대부터 사내들은 덮개로 페니스를 가렸지만 피임이 주된 목적은 아니었다. 문화와 종족에 따라 페니스 겉싸개는 신분을 상징하는 기장, 생식능력을 과시하는 장식, 또는 벌레나 악마의 공격으로부터 페니스를 보호하는 장치로 사용되었다.
콘돔은 16세기에 이탈리아의 해부학자가 성병을 방지하기 위해 발명했다. 콘돔이란 말은 17세기 영국 왕의 주치의였던 콘돔 백작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매독의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왕에게 페니스 덮개의 사용을 진언했다. 콘돔이 피임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부터이다. 그 당시 콘돔은 양의 창자 또는 물고기의 가죽으로 만들었다. 1837년 고무의 유황처리법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콘돔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1870년대부터 널리 보급되었다.
콘돔은 의외로 피임 실패율이 높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남자가 성교의 쾌감을 위해 사정 직전까지 콘돔을 끼지 않거나, 사정 직후 갑자기 작아지는 페니스를 빼내면서 콘돔을 질 안에 빠트릴 경우에 정액을 흘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콘돔 표면에는 매끄럽게 윤활제가 발라져 있지만 일부에서는 콘돔을 사용하는 성행위를 비옷 걸치고 하는 샤워에 빗댈 정도로 페니스의 감각이 무뎌진다고 투덜댄다. 콘돔은 한번 쓰도록 권장되었지만 한때는 가격 때문에 씻고 말려서 여러 차례 사용된 적이 있었다. 오늘날은 공중화장실의 자동판매기에서 동전 몇 닢으로 콘돔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신뢰도가 높은 남성피임법은 정관수술(vasectomy)이다. 정관은 고환으로부터 페니스로 정자가 운반되는 통로이다. 음낭에서 정관을 꺼내 절단하면 정자는 계속 생산되지만 배출구가 없기 때문에 정액에 혼입되지 못하고 용해되어 혈류로 흡수된다. 정자는 정액의 극히 일부분이기 때문에 정액 속에 정자가 없더라도 사정할 때 수술 전처럼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정관수술은 향토예비군 훈련장에서 20여분 만에 해치울 정도로 간단한 수술이긴 하지만 남성의 생식능력에 종지부를 찍는 불임시술이므로 신중한 결정이 요구된다. 정관수술을 받은 뒤에 혹시 아이을 갖고 싶을지 모른다면 수술 전에 다량의 정자를 정자은행에 냉동시켜 두었다가 인공수정을 시도할 수 있다.
여성의 다양한 차단피임법
옛날 아랍 유목민들은 먼 여행을 떠날 때 낙타가 임신하지 못하도록 자궁안에 자갈을 넣었다. 이와 같이 여성용 피임도구인 자궁내 장치(IUD)는 오랜 뿌리를 갖고 있다. IUD는 자궁 속에 삽입하여 임신을 예방하는 막대기인데, 크기와 모양에 따라 수백 종류가 된다. 주로 사용되는 것은 구리와 같은 금속 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티(T)모양이거나 고리(루프)처럼 생긴 제품들이다. 플라스틱 제품은 오래 쓸 수 있지만 구리 제품은 2-3년마다 교체해야 한다.
IUD는 병원에서 삽입하는 편이 안전하다. 의사들은 대개 월경 중일 때를 선호한다. 월경하는 동안에는 질과 자궁 사이에 위치한 자궁경부가 부드러워져서 삽입하기가 쉽고, 삽입 도중에 흔히 발생하는 출혈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IUD에는 한두개의 실이 꼬리처럼 달려 있어서 삽입 후에는 자궁경부 밖으로 삐져나온다. 월경이 끝날 때마다 이 실을 손가락으로 만져봄으로써 IUD가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해볼 수 있다.
IUD가 임신을 막는 정확한 이유는 아직 완전히 해명되지 않았지만, 자궁 내부에 변화를 일으켜 정자의 진입을 차단하거나 수정란이 착상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IUD는 피임성공률이 매우 높고 일단 자궁 내에 삽입하고 나면 성교 때마다 임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다. 그러나 IUD를 사용하는 여성은 그렇지 않은 쪽보다 자궁의 염증성 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높고 기구가 자궁 벽을 관통하여 구멍이 날 경우에는 출혈로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질 안에 스폰지나 천 따위를 넣어 정자가 자궁에 도달하기 전에 흡수되도록 하거나, 풀과 섞은 악어의 똥으로 자궁경부를 폐쇄하여 정자의 진입을 막았다. 오늘날의 다이어프램(diaphram)이나 경부캡(cervical cap)과 일맥상통하는 차단피임법이다.
1882년 독일 의사가 발명한 다이어프램은 테가 달린 종이 두께의 반구형 고무제품이다. 성교 두시간 전까지 질 안에 삽입해야 되며 성교를 끝낸 뒤에는 반드시 6-8시간 제자리에 두어야 한다. 정자가 질 내부에 오래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일명 페서리(pessary)라 불리는 경부캡은 재봉용 골무처럼 생긴 고무제품이다. 페서리와 다이어프램은 모양과 기능이 엇비슷하지만 질 안에 삽입되는 위치가 다르다. 다이어프램은 한쪽이 치골 뒤에 고정되고 다른 한쪽은 질의 벽에 얹히게끔 삽입되지만 페서리는 자궁경부 위로 덮어씌운다. 페서리가 다이어프램보다 편리한 것은 며칠 동안 질 안에 남겨둘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이어프램과 페서리의 피임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표면에 크림이나 젤리와 같은 살정자제를 바르기도 한다. 살정자제는 사정한 후 정자가 자궁에 들어가기 전에 죽이는 피임약이다.
호르몬 투여하여 배란 억제
여성에게 가장 인기있는 피임법은 호르몬피임제를 사용하는 약물피임법이다. 호르몬피임제에는 두종류의 여성 호르몬, 즉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 들어있다.
여성호르몬의 분비는 시상하부, 뇌하수체, 성선에 의해 조절된다. 시상하부로부터 뇌하수체에 신호가 보내지면 뇌하수체로부터 성선자극호르몬(gona-dotropin)이 방출되어 성선(즉 난소)쪽으로 향한다. 성선자극호르몬에는 난포자극호르몬(FSH)과 황체형성호르몬(LH)의 두종류가 있다. 성선자극호르몬의 작용을 받은 난소에서는 여성호르몬이 분비된다. 예컨대 FSH의 자극을 받은 난포가 성숙되면 배란이 일어나고 난포로부터 에스트로겐이 분비된다.
배란은 난포로부터 난자가 배출되는 현상이다. 배란은 LH의 급격한 상승으로 시작된다. LH는 난자가 들어 있는 성숙된 난포를 파열시키고 난자가 난소를 떠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배란 뒤에 이미 파열된 성숙난포는 노란색의 호르몬 분비기관이 된다. 파열된 난포를 황체라 이른다. 황체에서는 프로게스테론이 분비된다.
그러나 여성호르몬이 과도하게 혈액 속으로 분비되면 이들 호르몬은 거꾸로 시상하부에 작용하여 뇌하수체로 향하는 신호를 억제함으로써 성선자극호르몬의 분비를 감소시켜 자동적으로 여성호르몬의 분비를 조절한다. 예컨대 에스트로겐의 혈중농도가 높아지면 FSH의 분비는 감소되고 에스트로겐의 농도가 낮아지면 FSH의 분비는 증가한다.
정상적일 때 월경 직후 에스트로겐의 혈중농도는 매우 낮다. 따라서 FSH의 분비가 촉진된다. FSH의 자극을 받아 배란이 일어난다. 그러나 여성호르몬이 배합된 피임제를 투여하면 에스트로겐의 혈중농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FSH의 분비가 억제되고 배란이 되지 못해서 임신을 막을 수 있다. 또한 프로게스테론은 LH의 분비를 억제하여 배란을 저지할 뿐만 아니라 자궁경부의 점액을 두껍게 만들어 정자의 통과를 차단하고 자궁의 벽을 변질시켜 수정란이 착상하지 못하게 한다. 요컨대 호르몬피임제의 주된 목적은 난소에서 배란을 억제하는 데 있다.
호르몬 피임제에는 경구용, 주사용, 이식용의 세 종류가 있다. 경구용 피임제는 1951년 피임약의 아버지라 불리는 칼 제라시(1923- )에 의해 개발되었다. 주사용 피임제로는 1992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디포-프로베라(Depo-Provera)가 유명하다. 근육에 주사하며 3개월간 효력이 지속된다. 이식용 피임제는 1991년 FDA가 승인한 노플랜트(Norplant)가 있다. 호르몬이 들어있는 성냥알 크기만한 여섯개의 캡슐로 구성되며 팔뚝의 피부 밑에 심는다. 5년간 효과가 있고 실패율은 1% 미만이어서 10대를 포함한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 가격이 비싼 게 흠일 따름이다.
호르몬피임제에는 성교 후에 먹는 아침 알약(morning-after pill)도 있다. 성교 후 72시간 이내에 복용하면 임신이 예방될 수 있다.
자연피임과 영구피임
피임기구나 약물을 사용하지 않고 월경주기에서 임신이 가능한 기간을 예측하여 성교를 피하면 자연스럽게 피임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피임법에는 리듬조절법, 기초체온법, 경부점액법이 있다. 리듬조절법은 날짜를 계산하여 배란예정일을 예측한다. 배란은 다음 월경 예정일로부터 거꾸로 계산하여 14일 전 되는 날에 시작된다. 배란된 난자는 24시간 동안 생존하지만 정자는 사정된 후 최소한 48시간 이상 질내에 살아있다. 따라서 배란예정일 전후로 각각 2-3일씩 합쳐 5-7일간은 성교를 자제해야 한다. 그러나 여성에 따라 월경주기의 길이가 다르고 또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임신가능기간의 계산이 쉽지 않아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피임법은 아니다. 리듬조절법은 1951년 로마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유일한 피임법이다.
기초체온법은 체온 변화에 의해 임신가능기간을 알아내어 성교를 억제하는 피임법이다. 기초체온(BBT)이란 기초신진대사 때의 체온을 말하는데, 매일 아침 일어나기 전에 입이나 겨드랑이의 체온을 측정하면 된다. 배란이 시작되면 체온이 약간 상승하므로 며칠 동안 성교를 피하도록 한다.
경부점액법은 배란될 때 자궁경부에서 분비되는 점액의 유무를 확인하여 피임하는 방법이다. 월경이 끝나면 며칠동안 점액이 분비되지 않아 질 안이 건조하지만 배란이 가까워지면서 점액의 양이 많아진다. 점액이 달걀 흰자위처럼 미끈거리면서 손가락 사이에서 실처럼 당겨지면 임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기간이다.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영구피임법으로는 자궁을 제거하는 자궁절제(hysterectomy)와 나팔관을 묶어 배란된 난자가 통과하지 못하게 하는 난관결찰법이 있다. 난관수술 후에는 난자가 자궁으로 갈 수 없고 정자와 난자가 만날 수도 없기 때문에 수정이 불가능하다. 재래식 난관결찰법은 일명 개복술이라 하는데 복부에 큰 수술자국이 남는다. 그러나 복강경을 이용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보다 안전한 불임시술이 가능해졌다.
2015년까지 피임백신 나올 듯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피임방법은 많지만 안전하고 효과가 지속적이며 인체에 부작용이 없고 사용하기 쉬우면서 비용이 적게 드는 완벽한 피임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피임에 실패한 많은 임산부들은 유산을 한다. 태아가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모체와 분리되어 자궁 밖으로 제거되는 것을 유산 또는 낙태라 한다. 임신 초기에는 약물로 인공유산을 시도한다. 프랑스에서 개발된 RU 486은 임신중절에 특효약이다. 아침 알약의 효능까지 갖춘 호르몬 피임제로 유명하다.
약물로 인공유산을 시키지 못하면 자궁 내부의 조직을 긁어내는 수술이 불가피하다. 15분이면 끝나는 간단한 수술이므로 혼자 시도하는 임산부들이 없지 않다. 가령 낙태가 불법이던 20세기 초 미국에서는 뜨개질 바늘을 자궁에 삽입하여 태아를 무턱대고 끄집어내려다가 생명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여기에 충격을 받은 마가리트 생거(1879-1966)는 간호원을 그만 두고 ‘산아제한’(birth control)이란 용어를 처음 만들어서 50여년간 피임과 낙태를 사회문제로 부각시키는 운동을 전개했다.
미국의 경우 최근 통계를 보면 전체 임신 건수의 절반 이상이 예기치 못한 임신이며, 해마다 6백40만명의 임산부 중 25%인 1백60만명이 낙태를 하고 있다. 피임방법은 많지만 새로운 기술이 절대적으로 요구되고 있음을 증거하는 수치이다. 따라서 기존의 피임술, 특히 이식용 호르몬피임제, 아침 알약, 자궁내 장치, 살정자제의 품질 개선과 아울러 새로운 접근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남성용 호르몬피임제와 피임백신이다.
남성용 호르몬피임제는 호르몬을 사용하여 정자 생산의 원천봉쇄를 시도한다. 성선자극호르몬은 고환을 자극하여 FSH는 정자의 성장을, LH는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분비를 각각 촉진한다. 테스토스테론은 FSH처럼 고환을 자극하여 정자의 성장을 촉진한다. 따라서 테스토스테론을 근육 안으로 주사하면, 여성용 호르몬피임제와 같은 방식으로 FSH와 LH의 분비를 억제함으로써 정자 생산을 중단시킬 수 있다. 3개월간 남자를 거세시키게 될 남성용 피임주사는 2005년까지 개발될 것으로 전망된다.
남녀 모두에게 사용될 피임백신은 면역체계를 이용한 피임예방주사이다. 피임백신은 항체가 정자 또는 난자 표면에 있는, 수정에 결정적인 단백질과 결합하도록 자극하여 이 단백질의 기능을 무력화시킬 것이기 때문에 피임이 가능하다. 주사를 맞으면 1년간 유효한 피임백신이 2015년까지는 상용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 날이 오면 임신의 공포가 사라지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