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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그 생김새가 너무도 비슷해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는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적도 근처의 밀림 속에 사는 이 거대 유인원을 연구하기 위해 수십년을 정글속에서 고독과 싸우며 보낸 세 사람이 있다. 공교롭게도 그들 모두는 여성이다. 또 전설적인 인류학자 루이스 리키박사의 권유로 유인원 연구를 시작했다. 동물행동학의 대명사가 되버린 침팬지의 제인 구돌, 오랑우탄의 어머니 비루테 갈디카스, 그리고 고릴라를 위해 한평생을 바친 다이안 포시. 어떻게 그들은 정글 속으로 가게 됐을까.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올두바이에서 '호모 하빌리스'(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유골을 발견한 리키박사는 상념에 빠졌다. "과연 인간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런 고민을 하던 무렵 탄자니아를 여행하던 리키박사는 탕가니카호 근처의 언덕에서 달아나는 침팬지를 봤다. 그 순간 그는 인간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 유인원의 연구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가 유인원 연구에 가장 적합할까. 문명의 이기라고는 전혀 없고, 뜨겁고 위험한 열대우림 속에서 끈기있게 생활할 수 있는 그 누군가를 찾아야만 했다. 그는 기존의 과학 교육속에서 길러진,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원하지 않았다. 또 연구를 하다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 만큼 인내심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아프리카 동물이 좋아 아프리카에 놀러왔던 영국인 처녀 제인 구돌에게 침팬지 연구를 부탁했다. 그후 장애아를 돌보는 전문치료사인 다이안 포시를 설득해 콩고로 보냈다. 고릴라 연구를 맡긴 것이다. 또 오랑우탄을 연구하겠다고 나선 비루테 갈디카스를 아프리카가 아닌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그런데 '인류의 근원을 밝히겠다'는 당초 목적을 훨씬 뛰어넘어 세 여성은 아직까지 지구에서 유인원을 만날 수 있는 감격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다. 밀림 속의 이들이 아니었다면 유인원은 멸종됐을 지도 모른다. 물론 이들의 헌신적인 연구로 이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져 있던 유인원의 신비가 과학적인 사실로 바뀌었다. '리키의 세여인'은 지구의 주인은 인간만이 아니라는 귀중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다이안 포시 - 나의 사랑 디지트와 함께
 

자신보다 고릴라를 더 소중히 생각했던 포시.
 

영화 '킹콩'에는 가슴을 쿵쿵치며 닥치는대로 부수는 고릴라가 나온다. 원래 고릴라는 커다란 덩치(완전히 큰 수컷은 몸무게가 1백80kg, 키가 1백80cm나 된다)에 비해 수줍음을 잘타고 온순한 동물이다.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된 다이안 포시박사다. 그녀는 1974년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멸종위기의 위험에 가장 근접해 있는 동물 중에 하나는 마운틴고릴라다. 전세계를 통털어 6백50여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중앙아프리카의 르완다와 자이레 국경의 비룬가 화산지역에 3백20여마리, 우간다의 깊은 숲속에 3백마리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포시가 연구를 시작할 당시에는 2백40여마리에 불과했다. 고릴라 보존을 위해 투쟁했던 포시가 노력한 결과, 이만큼 번식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아프리카 산림의 벌목이 무분별하게 계속된다면 고릴라는 2000년이 넘어서면 자취를 감출 것으로 예상된다.

193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다이안 포시는 산호세 주립대학을 졸업했다. 장애아 어린이를 돌보는 병원에서 전문치료사로 일하던 포시는 야생고릴라 연구를 한 미국인 동물학자 살러박사의 책을 보고 감명을 받는다. 1963년 그녀는 아프리카로 고릴라를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마침 고릴라 연구의 적임자를 찾고 있던 리키박사에게 다이안 포시가 찾아간 것이다.

1966년 고릴라를 찾아 비룬가에 도착한 포시는 밀렵에 의해 고릴라 수가 급격히 감소하는 것을 알았다. 연구도 중요하지만 연구를 위해서는 밀렵꾼들에게 끌려가는 고릴라를 구해야 했다. 포시는 고릴라에게는 절친한 친구였지만, 밀렵꾼들에게는 지독한 방해꾼이었다.

밀렵을 막기 위해 포시는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밀렵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원주민들을 막을 수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그녀는 원하지 않았지만, 고릴라 관광코스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의 사랑 디지트'라고 까지 부르며 포시가 좋아했던 고릴라가 밀렵꾼들에 의해 보복 살해를 당하자 포시는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밀렵꾼들을 냉혹하게 대했다. 어쩌면 그런 일들이 그녀의 명을 재촉했는지도 모른다. 폐에 생긴 종기가 부어올라 인공호흡장치가 필요한데도 포시는 고릴라와 함께 있기를 고집했다. 1985년 크리스마스 다음날, 그녀가 머물던 오두막에서 얼굴을 난자당한 채 시체로 발견됐다. 31살에 시작한 22년간의 고릴라 연구를 마감한 순간이었다.

1967년 다이안 포시가 르완다의 카리소케에 세운 고릴라 연구소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리고 제일 저명한 고릴라 연구소가 됐다. 다이안 포시는 고릴라들 하나하나를 다 구별할 수 있을 만큼 빈틈없이 관찰했고, 그 결과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무시무시한 동물이 온순하고 사회적인 동물로 재인식되기 시작했다.

포시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 커다란 덩치를 가진 평화로운 동물을 책 속의 사진이나 낡은 비디오 필름을 통해서만 만나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재 그녀는 그녀가 머물던 오두막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자신이 사랑하던 고릴라들과 함께 누워있다.

고릴라(하루에 30kg의 풀을 먹는 온순한 사회적 동물) : 고릴라는 등에 회색털이 나 있는 (silverback이라고 함) 대장 수컷을 중심으로 40여마리 정도가 무리져 다니는 사회적 동물이다. 초식동물인 고릴라는 과일, 쐐기풀, 야생샐러리, 대나무 가지를 먹는다. 다 성장한 고릴라는 하루에 30kg의 풀을 먹어치운다. 겉모습과는 달리 초식동물인 것이다. 홍역이나 감기같은 것이 고릴라를 죽일 수 있다. 사람의 지문처럼 고릴라에게는 코지문이 있다.
 

그녀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시고니 위버 주연의 '정글 주연의 고릴라'.
 

비루테갈디카스 -"나를 혼자 내버려 둬"
 

갈디카스는 95년 12월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에덴의 벌거숭이들'을 내놨다.우리나라 말로도 번역돼 출간됐다(디자인 하우스).
 

"나는 오랑우탄을 연구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할 만큼 오랑우탄에 대한 비루테 갈디카스박사(1978년 UCLA 동물학)의 사랑은 절대적이다. 달려드는 모기, 몸을 찌르는 가시나무, 독풀들을 피해가며 며칠씩 열대우림 속에서 땀범벅이 된 채 웅크리고 앉아 오랑우탄 연구를 시작한 것이 25년 전이다.

갈디카스는 오랑우탄이 가까이 오기를 허락한 아주 드문 인간이 됐지만, 오랑우탄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바로 "나를 혼자 내버려 둬"라는 것. 그녀는 오랑우탄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붉은색 머리털을 가진 아시아의 유인원으로 그 이름도 '숲 속의 사람'이라는 뜻의 오랑우탄(orang-utan)은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수컷의 경우는 40km²의 지역을 방황한다. 과일, 땅콩, 곤충, 나뭇잎, 나무껍질 등을 먹고 나무를 타고 다니며 몇주 동안이라도 혼자 지낸다.

리투아니아인을 부모로 둔 갈디카스는 1946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곧바로 캐나다로 이주해왔기 때문에 그녀는 어린시절을 토론토에서 보냈다. 12살이 됐을 무렵, 갈디카스는 토론토에 있는 야생동물원에 자주 갔다. 나무숲 사이를 미끌어져 다니며 인디언 흉내를 내기 좋아했고, 공원에 있는 야생동물을 수시간동안 관찰하곤 했다.

5살 때부터 갈디카스는 인간은 어디서 왔을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물론 고대유인원에서 왔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자세하고 알고 싶었다. 성인이 된 후 왜 오랑우탄을 연구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난 항상 에덴의 동산을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영장류를 연구하고 싶었어요.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있는지 알고 싶었죠". 그녀의 꿈을 이룬 셈이다.

밴쿠버대학과 UCLA에서 심리학과 생물학을 전공한 갈디카스는 22살이 되던 해 리키박사를 만났다. 그후 그녀는 인도네시아의 열대밀림으로 떠났다. 이제까지 그 누구도 엄두내지 못했던 오랑우탄을 연구하기 위해서다. 그 때 그녀의 나이는 25살이었다.

보루네오의 칼리만탄 지역에 스승의 이름을 기려 '리키 캠프'를 차린 갈디카스는 오랑우탄 연구를 시작했다. 그녀도 다른 '유인원 여성동지'들과 다름없이 실험용이나 애완용으로 잡혀간 오랑우탄을 밀림으로 다시 보내는데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5년이 넘도록 갈디카스는 동남아시아에서 성행하고 있는 오랑우탄의 밀매를 막기 위해 각국을 돌아다니며 정부 관리들과 담판을 짓기고 하고, 아예 오랑우탄이 잡혀있는 곳에 가서 직접 데려오기도 했다. 오랑우탄과 열대우림의 소중함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의 전통 민속노래를 좋아한다는 그녀는 인도네시아가 갖고 있는 거대한 열대우림과 그들의 소중한 관광자원인 오랑우탄의 복지에 막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

수십년간 오랑우탄을 연구한 그녀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제가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오랑우탄에게서 배운 것은 우리가 유전적으로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동물적 욕심을 통제하고, 우리의 환경을 보존하고,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적인 교류이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생애로서 갈디카스는 그리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 남편인 로드가 밀림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아들 빈티의 유모였던 인도네시아 처녀와 결혼해버린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열대우림에서 오랑우탄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그녀는 보르네오 원주민 추장인 팍 보합과 결혼해 세자녀를 두고 있다.

오랑우탄(고독즐기는 '숲속의 사람') : 오랑우탄은 긴팔과 다리를 이용해 이 나무에서 저 나무가지로 이동하며 산다. 수컷은 보통 1백kg정도 나간다. 4백여가지가 넘는 나무종류를 먹고 산다. 어린 오랑우탄은 1살때까지 절대로 어미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4살까지는 손을 뻗치면 닿을 만한 곳에 둔다. 그리고 9살까지 같이 산다. 임신주기는 8년이고 암컷은 평생동안 4번 자식을 낳는데, 수컷은 혼자 살다가 자식을 낳을 때만 암컷과 어울린다. 야생에서 오랑우탄이 얼마나 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동물원에서는 60년정도 살았다는 보고가 있다.

제인구돌 -"타잔애인보다 잘할수있었는데…."
 

침팬지와 함께 보낸 한평생.맨 왼쪽 사진에서 손을 내밀고 있는 아기 침팬지가 플린트다.
 

제인 구돌이 침팬지 연구를 시작할 무렵 신문에서는 '금발의 미인은 남자보다 침팬지를 더 좋아한다'며 비꼬았다. 대부분 그녀의 연구가 얼마가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10년쯤 걸릴 것'이라고 리키박사가 말할 때 구돌은 속으로 '한 3년이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 자신도 그녀가 35년이라는 세월을 침팬지 연구에 보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구돌은 정규 과학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그녀는 고등학교까지밖에 나오지 않았으나 나중에 케임브리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동물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내심과 끊임없는 열정이 리키박사를 감동시켰기 때문에 최초로 현장에서 침팬지를 연구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다.

1934년 런던에서 태어나 영국 남부의 해안에 있는 빈머스에서 자란 제인 구돌은 어릴 때부터 아프리카 동물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밀림을 동경했다. 그녀는 "타잔을 읽으면서 타잔의 애인인 제인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한다. 또 그녀에게는 곤충이나 애벌레들을 잡아 침대밑에 숨겨놓은 것을 나무라지 않고 "애벌레들은 침대밑이 아니라 땅속이나 수풀 속에서 더 잘 지낸단다"라고 타일렀던 좋은 어머님이 있었다. 그녀가 아프리카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도 항상 자기의 의견을 존중해 준 어머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화사에서 일하던 구돌은 아프리카에 오지 않겠느냐는 친구의 편지를 받고서, 고향으로 돌아가 4개월간 웨이트리스를 해 아프리카 여행비를 모은다.

아프리카에 도착한 구돌은 "동물들을 연구하려거든 리키박사를 만나보라"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리키박사를 찾아갔다. 1957년 리키박사는 아프리카 동물들에 관한 그녀의 폭넓은 지식을 높이 사 구돌을 비서로 채용했다.

당시로서는 젊은 여자가, 그것도 혼자 아프리카 밀림에서 무엇을 연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런 전례도 없었다. 구돌에게는 단지 거기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어릴적의 꿈을 실현시키기에 충분했다. 1960년 여름, 26살의 구돌은 탄자니아의 탕가니카 호수 동쪽 해안에 도착한다.

연구를 시작한 뒤 5년간의 연구업적이 영화와 사진으로 알려지면서 그녀는 일약 스타가 됐다(그녀의 초창기 연구성과를 보고하는데 구돌의 첫남편 휴고 반 라윅의 공이 지대했다. 그는 영화와 사진전문가로서 그녀의 연구를 필름에 담았다. 그러나 영화작업을 계속해야 하는 라윅은 구돌과 이혼한다. 구돌의 두 번째 남편은 탄자니아 국립공원 책임자인 데릭 브라이슨이었는데, 그는 1980년 암으로 사망했다). 그 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동물행동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구돌박사는 곰베에 돌아와 침팬지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녀만의 독특한 침팬지 분류법과 침팬지 습성에 대한 여러 가지 발견은 영장류 동물학에 혁명을 일으켰다. 침팬지마다 개성을 인정해 일일이 이름을 붙여준 것은 야생의 침팬지 무리를 부모 자식이 있는 가족으로 변신시켰다. 또 도구를 만들고 이용하는 것이 인간만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침팬지가 도구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들은 리키박사는 인류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해야하고, 침팬지를 인류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발표할만큼 흥분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기존의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침팬지에 대한 잘못된 과학상식은 구돌의 연구로 정정됐다. 예를 들면 침팬지는 고릴라나 오랑우탄과 달리 잡식동물이다.

요즘 구돌박사는 실험실로, 애완용으로, 또 동물원으로 팔려간 침팬지의 복지를 향상시키고, 파괴돼가는 침팬지의 서식처 밀림을 보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강연회를 비롯한 계몽운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또 어린이들에게 자연과 생물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환경을 보존하는 활동, '루츠 앤 슈츠'(Roots and Shoots)운동에 정열을 쏟고 있다.

"침팬지는 내게 너무도 많은 것을 줬습니다. 그들과 숲속에서 보낸 많은 시간은 가늠하지 못할만큼 나의 인생을 풍요롭게 했어요. 내가 그들에게서 배운 것은 지구라는 이 자연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어떤 위치를 차지해야하는지를 알려줬지요." 35년이 넘게 침팬지와 살아온 환갑이 넘은 위대한 여인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제인구돌이 발견한 침팬지

침팬지는 똑바로 서면 키가 1-1.7m 정도 되고 몸무게는 40-50kg정도 나간다. 고릴라보다 몸집은 작지만, 귀가 더 크고, 외향적이면서 부산스럽다. 나무에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땅에서 걸을 때는 네발을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열매, 잎, 씨 등을 주로 먹지만 흰개미나 개미, 그리고 고기도 먹는다. 수명은 약 40년 정도.

1960
침팬지는 초식동물이 아니다

데이빗 그레이비어드가 야생돼지를 먹는 것을 목격하다.

1960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

데이빗 그레이비어드가 나뭇가지를 가지고 흰개미를 낚시질하고 있다. 인간은 제외하고 야생에서 도구를 사용하는 첫번째 기록이다.

1964
인간의 도구를 사용하다

마이크는 구돌의 캠프에서 나온 양철 석유통을 굴리면 큰소기가 난다는 것을 알았다. 계급이 낮았던 마이크는 석유통소리를 내 무리의 우두머리에 오른다.

1966
소아마비

곰비에 소아마비가 돌아 침팬지들은 큰 타격을 입는다. 유전학적으로 침팬지와 사람은 다른 어느 동물보다 유사하다.

1970
경외

침팬지들은 비가 오면 피하지 않고 그냥 앉아 비를 맞는다. 그런데 갑자기 침팬지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구돌은 이 장면을 보면서 고대의 인간들도 경외의 표현으로 침팬지와 같이 춤을 추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1974
계급투쟁

카사켈라(kasakela)수컷과 그 외의 그룹간의 전쟁이 4년간 계속되다. 종족간의 전쟁은 이전에 보고된 적이 없었다.

1975
동족을 잡아 먹다

패션이 길카의 아기, 오타를 죽인 뒤 자기의 딸인 폼과 나눠 먹었다. 그리고 이 두 모녀는 계속해서 2년간 10여마리의 아기 침팬지를 잡아먹었다.

1975
협동심

피간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도록 그의 동생인 파벤이 도와 줬다. 파벤이 사라지자 피간은 도전자들을 힘겹게 물리쳤는데, 그래도 10년간은 왕좌를 유지했다.

1987
양자

어미가 폐렴으로 죽은 3살박이 멜은 청년기에 있는 스핀들에게 입양된다.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침팬지가 고아가 된 어린 침팬지를 입양한 것을 처음으로 관찰한 것이다.

1994
배우자를 독점

침팬지는 원래 일부일처제가 아니다. 자식의 생산은 암컷의 몫으로 새끼들의 아버지가 다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수컷은 암컷을 무리에서 때내어 둘만 지내는 것이 관찰됐다. 최근 유전자 검색에 따르면 이렇게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던 에베레드와 윙키가 아들 윌키를 낳았다.

1994
기술이전

작은가지를 이용해 목수개미를 잡는 것은 미툼바 지역의 침팬지들만 알던 것이다. 그런데 카사켈라 그룹의 플로시가 미툼바식으로 개미를 잡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집단에서 다른 집단의 기술이 이전된 것이다.

1995
쌍둥이가 태어나다

라피키가 루트와 슈트라는 이름을 가진 쌍둥이를 출산했다. 곰비에서 이전에 쌍둥이 출산은 딱 한 번 있었다.

1995
약초식물을 구별하다

어떤 침팬지는 복통을 완화시키고 기생충을 없애기 위해 아스필라(Aspilla)라는 약초식물의 잎을 꿀꺽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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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곽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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