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12년 미국 뉴욕을 향해 처녀항해에 나선 타이태닉호는 대서양 한가운데서 빙하와 충돌. 엄청난 인명과 함께 바닷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이후 70여년이 지난 1985년 9월1일 로버트 발라드 박사가 이끈 프랑스-미국 연합 탐험대는 캐나다 뉴펀들랜드에서 5백31km 떨어진 곳의 수심 3천8백10m에서 이 비극의 유람선을 발견했다. 이와 함께 지난 8월 말 타이태닉호 주 몸체가 수심 65m까지 인양됐다가 도로 물에 빠져버리자 타이태닉 열풍은 다시 불 붙고 있다. 타이태닉호가 이처럼 대중적인 관심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배의 건조과정에서부터 사고경위, 그리고 이후 제기된 이슈 등 타이태닉호의 모든 것을 벗겨본다.
타이태닉호 제원
총길이 - 268.9m(882.5피트)
선폭 - 25.2m(92.5피트)
깊이 - 18.1m(59.5피트)
총톤수 - 46.329t / 순톤수 - 24,900t
배바닥부터 기관 굴뚝 끝까지의 길이 - 53.3m(175피트)
갑판부터 흘수선까지의 길이 - 18.4m(60.5피트)
엔진 - 3만마력 75rpm의 3중 스크루 추진장치
최대탑승자수 - 1등석 : 329명, 2등석 : 285명, 3등석 : 710명
최대승무원수 - 899명
*총톤수 · 순톤수
선박의 외피를 이루는 전체용적이 총톤수이고, 여기서 선원실, 물탱크 등 선박의 운항에 사용되는 부분을 제외하고 실제 영업에 이용되는 부분의 용적을 순톤수라 한다.
타이태닉호와 그 형제들
1907년 영국의 선박회사 화이트 스타는 올림픽, 타이태닉, 그리고 브리태닉이라 이름붙인 3대의 대서양 횡단 여객선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비슷한 규모로 예정된 이 3대의 여객선은 이물(배 머리)에서 고물(배 꼬리)까지가 2백60m가 넘는, 당시로선 세계 최고 규모의 선박이었다. 이 정도 길이라면 보잉 747기 4대, 시내버스 22대를 연결한 것과 맞먹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가운데 ‘제 목숨’ 다한 배는 올림픽호 단 하나에 불과하다. 셋중 가장 먼저인 1910년 10월 20일 건조된 올림픽호는 이듬해 6월 처녀항해에 성공한 이후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병력수송용으로 명성을 날리다 35년 퇴역했다. 그리고 해체된 올림픽호의 각종 내장품들은 호화주택과 술집 등을 치장하는 장식품으로 팔려나갔다.
반면 1914년 1월 진수된 브리태닉호는 변변히 활동도 못한 채 2년 후 1차세계대전의 와중에 침몰하는 비운에 처했다. 또한 타이태닉호는 1912년 4월 처녀 출항에 나섰다가 빙하와 충돌, 대서양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타이태닉호는 바다에 모습을 드러낸 직후에 침몰했으니 올림픽호와 같은 활약이 있을 수 없고, 배의 크기면에서도 브리태닉호보다 작다. 따라서 배의 규모와 활약만을 놓고 보자면 타이태닉호는 나머지 두 대의 배에 비해 그리 ‘내세울 것’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1천명이 훨씬 넘는 인명이 이 거대한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졌으며, 아직도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침몰 이유를 비롯한 여러가지 미스터리에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타이태닉호의 신비함을 더해주고 있다.
호화의 극치 이룬 유람선 내부
7백50만 달러를 들여 만든 타이태닉호에 탑승한 승객들은 1등석부터 3등석까지 분류됐다. 물론 대다수의 승객들은 3등석으로 배에 탔지만, 배의 대부분 시설은 이들보다 30배 넘는 비용을 지불한 1등석 승객을 위한 것이었다. 타이태닉호에는 28개의 특등실과 스위트룸이 있었는데, 1등석 승객들은 르네상스풍이나 프랑스 루이14세와 16세의 방을 흉내낸 객실에 벽난로까지 달려 있는 호사스러운 방을 선택할 수 있었다.
승객들은 밤이면 최대 5백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대형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고, 배 안에 마련된 프랑스풍 카페에서 프랑스 웨이터의 시중을 받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또 낮이면 베르사이유 궁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라운지에서 담소를 즐기기도 했고, 이에 지치면 전기로 작동하는 말이 갖추어진 체육관에서 몸을 풀거나 스쿼시 경기를 벌였다.
탈출, 그리고 구조
0시 25분 스미스 선장의 지시에 의해 보내진 긴급 구조요청 신호는 난파지점에서 남동쪽으로 93km 떨어진 곳을 지나던 카파시아호에 의해 수신됐다. 카파시아호는 대서양 횡단 여객 수송을 놓고 화이트 스타와 경쟁을 벌이던 쿠나드선박사가 운영하는 1만3천5백t급의 여객선. 황급히 동쪽으로 향하던 뱃머리를 돌려 사고 해역으로 달려갔지만, 카파시아호가 위치 확인을 위해 내보낸 로켓 불빛이 구명정에 탄 사람들에 의해 목격된 것은 3시 30분경. 그리고 타이태닉호에서 빠져나온 첫 구명정이 구조된 것은 4시10분이었다.
결국 카파시아호가 달려온 두시간 동안 구명정에 타지 못한 나머지 승객들은 모두 수장되고 말았다. 승객과 승무원 2천2백6명중 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모두 1천5백3명이었다(기록에 따라서는 탑승객 2천2백27명, 사망자 1천5백17명으로 보는 데도 있음).
원래 타이태닉호의 구명정이 수용할 인원은 1천2백명 정도였다. 그러나 생존자가 이보다 적은 7백명밖에 안되는 이유는 이날 밤의 규칙인 ‘여자와 아기 먼저’ 거부한 채 남편과 한몸이 되겠다고 버틴 부인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조된 승객을 태운 카파시아호는 날이 밝은 8시 50분에 사고 해역을 떠나, 여자와 어린이가 대부분인 7백여명의 생존자와 함께 3일 후인 18일 저녁 9시에 뉴욕항에 도착했다. 이후 4월 22일부터 5월 15일까지 사고 해역에서 벌어진 수색과정에서 찾아낸 시체는 모두 3백28구였다.
시간별로 구성한 사고전모
4월10일 정오 아침부터 몰려든 손님을 태운 타이태닉호는 사우샘프턴항을 출발, 프랑스 셸부르항을 들러 다시 에이레의 퀸스타운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1일 오후 1시반에 본격적으로 뉴욕을 향했다.
11일 3백86마일, 12일 5백19마일, 13일 5백46마일 등 순조로운 항해가 계속되는 동안 승객들은 호화 유람선에 걸맞는 음식을 즐기며 함께 승선한 밴드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등 한껏 여유를 즐겼다. 이때까지 하루 뒤에 벌어질 끔찍한 사고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제의 14일은 일요일이었다. 아침부터 일곱번의 유빙 접근 경고가 내려지긴 했지만, 바다는 여전히 잔잔했다. 더구나 타이태닉호보다 앞서 만들어진 올림픽호를 처녀 운항하는 등 2백만 마일 무사고 항해 기록을 가진 베테랑 스미스 선장은 승객과 승무원 모두에게 ‘신뢰’ 그 자체였다. 스미스 선장은 화요일로 예정된 뉴욕 도착시간을 맞추고자 배를 전속력에 가깝게 운항했다.
밤 11시 40분, 22.5노트(1노트는 1.85km/시)로 운항하던 타이태닉호의 뱃머리 오른쪽이 거대 빙하에 얻어맞으면서 구멍이 생기고 말았다. 이어 4m가 넘는 물기둥을 뒤집어쓰면서 침몰하기 시작하자 상황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으로 바뀌고 말았다.
날이 바뀌어 15일 0시, 선장은 승객과 승무원들에게 이제 한두시간이면 배가 완전히 가라앉게 될 것 을 알리고, 갑판에 구명보트를 대기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덮개를 벗겨놓은 구명정은 16대의 목재 배와 4대의 접는 닻배를 합해 고작 20대. 여기에 탈 수 있는 인원은 전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선장은 먼저 아이와 여자들을 먼저 태울 것을 지시했다. 나머지 인원은 갈수록 심하게 들이치는 바닷물에 점점 가라앉는 배와 운명을 같이해야할 판이었다. 2시5분 마지막 구명선이 떠나자 선장은 승무원들에게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각자 알아서 하라”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뱃머리는 이미 물에 잠긴 상황이었다. 그러나 배의 굴뚝이 무너져내리자 승객들은 갑판에서 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들
타이태닉호의 침몰 이후 연구자들은 이 사고와 관련된 크고 작은 의문점을 지적하고 있다. 가장 빈번히 제기되는 이슈는 침몰 이유. 타이태닉호와 그의 형제 여객선은 이후에 제조된 퀸 메리호(3백10m)나 퀸 엘리자베스호(3백8m),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퀸 엘리자베스 2호(2백93m)에 의해 기록이 깨지긴 했지만,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여전히 큰 배에 속한다. 특히 지금보다 기술이 뒤질 수밖에 없는 당시로선 4만t에 2백60m가 넘는 선박이 물에 뜰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실제 화이트 스타의 대형선박 건조 계획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은 “물에 들어가는 순간 그냥 가라앉을 것” 라고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이 배의 건조과정을 총감독한 토마스 앤드류는 ‘절대 가라앉을 수 없는 배’ 고 자신있게 말했다. 배에 구명정이 충분히 갖춰지지 않았던 데는 이같은 안전에 대한 확신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이태닉호가 ‘비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뜰 수 있었던 데는 독특한 방수기술이 큰 역할을 했다. 제작사는 선체를 모두 16개의 방수 구획으로 나누고, 각 구획과 구획 사이의 틈을 방수문으로 봉해 16개중 2개만 떠 있으면 배가 뜨도록 처리했다.
그렇다면 이렇듯 안전하게 만들어진 배가 왜 가라앉았을까. ‘공식적인’ 침몰 이유는 거대한 빙하와 선체의 충돌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유람선의 침몰에는 적지 않은 의문점들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비공식적인’ 침몰 이유 중에는 빙하와 충돌할 당시 승무원들이 술을 마셨다는 설, 보험금을 노린 회사 경영진이 의도적으로 사고를 유발했다는 설 등 구구한 ‘억측’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1995년 이 배를 탐사한 캐나다 연구팀은 타이태닉호의 선체가 안전하지 않은 금속으로 제작됐으며, 각 연결부를 잇는 리벳이 불량품이었음을 밝혀냈다. 게다가 이 배의 키가 규모에 비해 매우 작아 조타가 쉽지 않았음에도, 무리해서 유빙을 빠른 속도로 헤쳐나가려 했던 것이 결정적인 난파의 원인으로 지적됐다. 결국 기본적으로 배에 결함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한편 타이태닉호를 책임졌던 스미스 선장이 어떻게 죽음을 맞았는가도 자주 이야기된다. 그의 죽음에 관한 생존자들의 증언에는 전혀 다른 3가지가 있다. ▲선원들에게 개인 행동을 허용하도록 한 뒤 스스로는 얼음물로 뒤덮힌 갑판 위로 걸어나갔다는 설 ▲조용히 권총을 뽑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는 설 ▲한 아기를 팔에 앉고 구명정을 향해 헤엄쳤다는 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누구도 어느 것이 정설인지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이 사고를 계기로 세계는 그동안 도외시 됐던 해상에서의 안전사고 문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배 구조와 구명 설비, 무선 설비 등 유사시 승선자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각종 국제회의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도 이 사고 이후다.
이 가운데 가장 괄목할 결과물은 ‘국제 빙산 패트롤’(IIP, International Ice Patrol)의 결성이다. 1914년 미국 해안경비대를 주축으로 유럽국가들과 캐나다 등이 함께 결성한 이 기구는 매년 2월부터 8월까지 대서양 지역, 특히 뉴펀들랜드 남동부 근해의 얕은 바다인 그랜드 뱅크를 떠도는 빙산으로부터 선박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정찰비행을 실시하고 있다. 해류의 흐름 등 정찰기가 보내온 각종 데이터는 곧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빙산이 어디로 흐를 것인지를 판단한 다음 인근을 지나는 선박들에게 위성을 통해 전달된다.
부풀려지는 신화들
20세기 들어서 일어난 해난사고를 살펴보면 타이태닉호가 최악의 경우는 아니다. 1948년 11월 1일 남만주해에서는 중국상선이 폭발하면서 침몰해 무려 6천여명이 사망했으며, 또 같은 해 12월 3일 상해 부근에서 일어난 사고로는 3천9백여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이를 기억하는 세계인은 거의 없다.
결국 타이태닉호가 무려 84년이 지난 오늘까지 꾸준한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데는 부자 승객들과 함께 수장된 ‘보물’ 건져내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사고 자체를 상품화한 영국과 미국인들의 ‘장사속’ 맞아 떨어진 때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이번에 주몸체를 인양하려 했던 RMS 타이태닉사는 인양 자체를 영화로 만드는 한편, 관광상품화 했다. 인양 현장을 중심으로 짜여진 이 6박7일짜리 코스의 가격은 1인당 3백만원이나 됐다.
이 회사는 지난 87년부터 94년까지 3번에 걸쳐 5백시간 이상을 탐사, 머리빗, 시계, 그릇, 도자기류 등 약 4천점에 이르는 부자 승객들의 유품과 배의 비품을 건져올렸다. 이들 물건은 실제 호사스럽긴 해도 아주 비싼 것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타이태닉호에서 건져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수집가들의 군침을 삼키게 했다.
한편 타이태닉호 사고를 토대로 한 30여편의 영화와 다큐멘터리 비디오 등 영상물, 그리고 1백권이 넘는 소설, 자료집 등 서적은 이 비극의 사건을 많은 사람들에게 좀더 극적이며 과장되게 알리는데 일조했다.
영화 가운데 가장 유명하면서도 사실에 가까운 것은 1958년 제작된 ‘기억해야 할 밤’(A Night To Remember)이다. 하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제작된 이 영화에도 흠이 없진 않다. 이를 테면 배가 세례를 받는 장면 등은 화이트 스타 선박회사에선 한 번도 행해지지 않았던 일이다.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사고 예견
인류를 경악케 한 비극은 계속 반복되는 것일까. 타이태닉호의 침몰 뒤에도 세계는 지금까지 적지 않은 사고를 경험해왔다. 과거를 거울로 삼아 오늘의 현실을 비추려는 연구자들은 타이태닉호의 침몰을 지난 1986년 1월 발생한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폭발과 비교해 인간의 자만심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공교롭게도 두 사고는 모두 얼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타이태닉호는 7번의 경고를 무시하다 빙하와 부딪쳤고, 챌린저호는 1월의 매운 날씨로 얼어붙은 발사장 주변 상황이 가져올 사고 가능성을 무시했다 74초만에 공중 폭발했다. 당대 최고를 자랑했던 타이태닉호와 마찬가지로 챌린저호 역시 당대 최고의 우주선이었다.
사고 이후 나사(미국 항공우주국)는 이전에 행해진 24번의 성공에 고무돼 교사출신인 맥컬리프를 비롯한 챌린저호 승무원들을 우주로 내보내면서 마치 통근버스를 태우듯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또 타이태닉호는 ‘절대 가라앉지 않는 배’ 별명으로 불렸다.
타이태닉호의 침몰 위치를 찾아낸 로버드 발라드 박사는 챌린저호가 발사되기 1달 전 “나사와 타이태닉호를 만든 사람들은 대단히 비슷하다. 인간은 새로운 기술의 장을 정복하고 나면, 스스로를 지나치게 믿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경고는 사고가 나서야 상기됐다. 결국 두 사고 모두 과학과 기술에 도취된 인간의 자만심 때문에 일어났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에 예견된 타이태닉호의 최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들이 적지 않다. 타이태닉호의 침몰과 관련된 주변 이야기도 이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사고가 일어나기 14년 전인 1898년 소설가 몰건 로버트슨은 인간의 탐욕과 무지를 꾸짖는 ‘무용지물’(futility)이란 소설을 썼다. 타이탄이란 가공의 초호화 대서양횡단선이 처녀항해에 나서 빙하와 충돌, 엄청난 인명사고를 낸다는 것이 줄거리.
그러나 이 소설은 배의 이름과 출발지를 비롯해 ▲사고가 일어난 시기(4월) ▲탑승객 숫자(타이탄 3천명, 타이태닉 2천2백여명) ▲구명정 수(타이탄 24척, 타이태닉 20척) ▲배의 규모(타이탄 8백피트 , 타이태닉 8백82.5피트) ▲최대속도(타이탄 25노트, 타이태닉 23노트) 등 모든 서술이 실제 사고와 너무도 유사했다. 사고 이후 이 소설을 떠올린 독자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소설은 예언서였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