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하면 불구까지 된다는 류마티스 관절염. 이 병의 최초 치료제 코르티손이 개발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이다. 코르티손의 개발은 스테로이드계 호르몬의 인공합성법을 탄생시켰다.
현대약은 19세기 초 천연물에서 분리된 약효성분으로 출발했다. 그 후 천연에서 추출해 얻던 비교적 간단한 구조를 가진 약들은 공장에서 합성해 제조됐다. 그러나 이런 약은 약효가 떨어지거나 부작용과 독성이 컸기 때문에 일부 구조를 바꿔 좀 더 향상된 약을 얻으려 했다. 이러한 구조변형은 19세기 하반기에 시작됐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약은 거의가 '구조최적화'에 의해 나온 것이다.
현대 약역사의 처음 1백년간 약발견의 주된 재료는 식물이었으나, 20세기 동물장기 추출물의 약효가 인식되자 동물장기로부터 활성성분을 분리하는 경주가 시작됐다. 그 결과 20세기 상반기에 아드레날린 아세틸콜린 히스타민 인슐린 스테로이드 등의 호르몬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다. 약 발견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 것이다.
부신 추출물에서 발견
1935년 스위스 연방기술대학의 타도이스 라이히슈타인(Tadeus Reichstein),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오스카 윈터스타이너(Oskar Wintersteiner), 영국 로체스터 메이오클리닉의 에드워드 켄들(Edward Kendall)은 부신(副腎)추출물에서 코르티손(cortisone)을 분리해냈다. 코르티손은 최초의 류마티스 관절염 치료제다. 동물 장기에서 소량밖에 얻을 수 없던 코르티손 덕택에 스테로이드계 호르몬의 인공합성 연구가 본격화됐다.
화학자 라이히슈타인은 코르티손 뿐만 아니라 부신피질에서 분비되는 많은 호르몬을 계통적으로 분리, 확인했다. 이들 호르몬은 성호르몬과 마찬가지로 스테로이드 호르몬이라고 통칭되는 것이다. 화학자 켄들도 호르몬의 분리, 확인에 기여했고 코르티손의 합성과정을 연구했다. 또한 메이오클리닉의 관절염 전문의 필립 헨치(Phillip Hench)와 손잡고 코르티손이 류머티스 관절염 치료에 효과가 있음을 증명했다. 이 공로로 라이히슈타인, 켄들, 헨치는 1950년 노벨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당시 부신피질 호르몬 분리 연구는 엄청난 경비가 소요됐을 뿐만아니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지루한 연구였다. 한 예로 라이히슈타인은 2만5천개의 가축 부신을 처리해 겨우 25개 정도의 스테로이드만을 분리할 수 있었다. 이 중 코르티손(라이히슈타인 물질F)을 포함한 6개의 생리활성을 나타냈다. 이 때 분리된 물질의 양은 소량이어서 단지 구조 결정과 기본 활성 측정만이 가능했다.
활성 성분이 분리, 확인되자 약으로 사용될 가능성에 관심이 집중됐다. 활성 실험에는 다량의 물질이 필요했는데, 추출로 얻는데는 한계가 있어 실험실에서 합성해내야 했다. 약발견 역사를 보면 이 단계에 제약회사 연구진의 활동이 시작된다. 그들은 최초 분리자와 제휴하거나 단독으로 합성연구를 시작한다.
미국과 독일의 군사 경쟁
1941년 독일이 전투기 조종사들의 스트레스를 극복할 약을 만들기 위해 아르헨티나의 도살장에서 대량의 부신을 구입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미국은 켄들과 제약회사 머크(Merck)의 공동연구를 주선했다. 켄들이 분리한 '물질 A'와 '물질 E'를 합성하도록 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기 전 기초 합성경로가 검토됐으나 첩보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돼 군사용 연구로서는 가치가 없어졌다. 그러나 약으로서 가능성 탐색연구는 계속됐다.
1944년 머크사는 '물질 A'를 약으로 시험하기로 결정하고, 거의 2년간의 연구 끝에 1945년말 부신피질 기능부전(아디슨병)에 임상시험했으나 별무효과. 켄들은 이 사실에 낙담하지 않고 '물질 E'에 기대를 걸었다.
1946년 '물질E' 합성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머크사는 켄들의 연구 방법을 일부 개선해 1948년까지 5g이상의 '물질 E'(코르티손)를 합성해내는데 성공했다. 합성의 주역은 프린스턴 대학 박사출신인 20대의 루이스 사렛(Lewis Sarett). 그는 메이오 클리닉의 헨치에게 처음 1g의 코르티손을 제공했고 그 후 큰 반응기로 수주일 동안 36단계의 화학반응을 거쳐 1천g을 합성해 전달했다.
한편 헨치는 류머티스 관절염 환자가 임신을 하거나 황달에 걸리면 그 통증이 급격히 감소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41년 헨치과 켄들은 이런 통증 감소가 아마도 스트레스에 대항하기 위해 생체내에 생긴 모종의 '물질X'에 기인한 것으로 추측하고, 코르티손이 합성되면 류머티스 관절염에 시험해볼 필요가 있다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제 다량의 코르티손이 합성됐으므로 시험해볼 단계가 된 것이다.
1948년 9월 헨치는 사렛으로부터 1g의 코르티손을 공급받았다. 켄들의 자서전에 최초의 환자에게 투여한 결과가 나타나 있는데 투여량은 1일 1백mg이었다. 이 약을 주사하기 전 환자는 통증으로 침대에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틀 후 두번째 주사를 맞자 환자는 침대에서 뒤척일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훨씬 나아졌고 6일간 주사를 맞자 굳는 증상이 거의 없어졌다. 8일째 오후에는 3시간 동안 로체스터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머크사는 1949년 말 1g에 2백달러의 값으로 코르티손을 병원에 공급했고 1년 뒤에는 35달러로 가격을 낮추었다. 그리고 1951년 5월에는 정식 제제로 발매했다.
아담을 이브로 만든 로젠크란츠
신텍스(Syntex)사는 1944년 솜로 레만 마커 세사람이 멕시코에 설립한 회사다. 럿셀 마커(Russel Marker)는 본래 펜실베니아 주립대학 교수였으나 1939년 멕시코산 참마(yam)에 풍부한 디오스게닌으로부터 프로게스테론을 합성하는 방법을 개발해 회사를 설립했다. 마커의 합성 프로게스테론은 동물 장기로부터 추출하여 얻은 것보다 값이 싸 신텍스사는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나기 전 창립자 세사람 사이에 알력이 생겨 마커는 회사를 떠나고 말았다. 솜로와 레만은 프로게스테론 합성방법을 몰랐다. 더욱이 마커는 학술잡지에 내용을 발표할 때도 중요 부분은 공개하지 않은데다가, 시약병에도 암호명을 달아 조수들도 합성을 재현할 수 없었다. 모든 제조공정을 가지고 떠난 셈이었다.
당황한 솜로는 같은 헝가리인인 게오르게 로젠크란츠(George Rosenkranz)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는 스위스에 있었으나 전쟁이 발발하자 미대륙으로 건너와 쿠바에 머무르고 있었다. 로젠크란츠는 신텍스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멕시코로 와 휴일도 없이 연구에 몰두했다. 가끔 부인과 영화를 본 날에도 밤 11시에는 반드시 실험실에 들러 반응을 확인하곤 했다. 그 결과 자신이 고안한 방법으로 2개월 후 프로게스테론 생산을 재개시켰다. 계속해서 로젠크란츠는 다양한 스테로이드 합성에 착수했다.
1946년 프로게스테론으로부터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을 합성했고 1947년에는 아디슨병 치료제인 코티코스테론을 합성했다. 끈질긴 노력끝에 2년 후에는 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을 합성하는데 성공했다. 테스토스테론 중간체로부터 에스트로겐이 합성되자 당시 멕시코 대통령은 "아담이 시험관에 들어가 이브가 나오게 하는 화학이야말로 굉장한 것"이라고 감탄했다.
연구가 본격화되자 로젠크란츠는 연구소를 확장하고 칼 드저라시(Carl Djerassi)를 채용했다. 그는 비엔나 태생의 불가리아인으로 2차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와 스위스 시바(Ciba)의 자회사에 근무하며 위스콘신 대학에서 에스트로겐 합성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9년 그는 코르티손 합성 아이디어를 냈으나 회사는 다른 과제를 할당해 불만이 쌓여있는 상태였다. 로젠크란츠가 코르티손 합성을 적극 지원하고 원하는대로 실험실을 꾸며주겠다고 제의하자 드저라시는 선뜻 신텍스로 옮길 결심을 한 것이다.
드저라시의 합류로 신텍스 연구진의 사기는 충천했고 코르티손 합성 연구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1950년 말에서 1951년 초에 이르는 3-4개월 간은 휴일도 없이 밤 낮 2교대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드저라시는 1951년 봄 디오스게닌을 원료로 코르티손 합성에 성공했다. 이 때 처음 합성된 5mg의 코르티손은 즉시 스위스의 라이히슈타인에게 보내 천연 코르티손과 동일하다는 확인을 받았다.
최후(?)의 승리자 업존
1949년 코르티손이 류머티스 관절염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발표되자 미국 칼라마주의 업존(Upjohn)사도 재빨리 움직였다. 그들은 전 연구인력의 반을 7개 팀으로 나누어 모든 가능한 경제적 합성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50년 봄 2백명이던 연구소 연구인력이 2년내에 4백명으로 늘어난 것만 보아도 업존이 코르티손 개발에 얼마큼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다. 어떤 팀은 값싼 원료 물질을 찾는다고 중앙아프리카를 6개월 동안 무려 1만8천km나 누비고 다녔다.
행운은 코르티손 합성의 다단계 과정에서 일부 화학적 과정을 미생물이 대신해 주는 방법을 찾은 팀에게 돌아갔다. 팀장은 생화학자 듀리 피터슨(Durey Peterson)이었다. 연구원들은 "공휴일도 없이 일했고 이른 새벽까지 실험실에 남아있는 일이 흔했지만 재미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활약을 보인 것은 미생물학자 허브 머레이(Herb Murray)였다. 그는 실험실 곳곳에 배양접시를 두고 미생물을 배양시켜 원하는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확인했다. 이 확인에는 당시 새로 도입된 '종이 분배 크로마토그래피'가 이용됐다. 그리하여 코르티손 합성에 필요한 곰팡이를 찾아냈고 유사속(屬) 곰팡이를 주문해 그중 가장 적합한 것을 찾아냈다. 이 곰팡이는 프로게스테론을 코르티손으로 100% 바꾸어 주는 것이었다. 이 발견은 업존 역사상 최대의 발견 중 하나로 꼽힌다. 피터슨과 머레이는 하루 아침에 영웅이 되었다.
이 때 콩 성분인 스테롤로부터 프로게스테론을 합성하는 연구가 마무리 단계에 있었으나, 경영진은 경쟁사인 신텍스에서 프로게스테론을 구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무려 5백만달러어치 구입계약이 맺어졌다. 당시 신텍스는 드저라시가 연구한 코르티손 합성법을 공업적으로 이용하는 법을 연구하던 단계였으므로 업존보다 한발 늦었던 상황. 그러나 프로게스테론을 팔아 경제적인 보상을 받았다.
업존은 1952년 5월말 코르티손을 판매했다. 1953년에는 히드로코르티손도 발매했다. 미생물 방법을 가격면에서 경쟁력이 있어 결국 선두주자였던 머크를 제압할 수 있었다. 업존 연구원들에게는 황홀한 순간이었다.
지금도 계속되는 경쟁
모든 약이 그렇듯이 코르티손도 이상적인 약은 아니다. 좀 더 항염증(抗炎症) 효과가 크고 부종(浮腫)과 같은 부작용이 없는 약이 필요했다. 이 경쟁의 최초 승리자는 미국 쉐링(Scherig)사로 1955년 미생물법으로 코르티손보다 향상된 프레드니손과 프레드니솔론을 얻어냈다. 업존도 1956년 메틸프레드니솔론을 개발해 이에 응수했다. 1958년 머크와 쉐링은 동시에 덱사메타손을 발견했다. 신텍스는 이 방면에서 지지부진했으나 피임제 개발에는 성공했다.
다양한 코르티손 유사약이 여러 제약회사에서 개발돼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부종 감염 위궤양 근위축 행동장애 백내장 골다공증 성장장애 등의 부작용 때문에 위험한 약으로 분류됐다. 자연히 스테로이드 구조를 가지지 않는 부작용이 적은 항염증제 개발이 시작됐고 이 때에도 이미 코르티손 개발에 경험이 있는 회사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1960년대 머크의 인도메타신, 신텍스의 나프록센, 업존의 이부프로펜이 잇따라 발견됐다. 약개발 경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