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의학이 해부조직학적 구조를 중심으로 발전한 반면, 한의학은 생리 기능 현상에 중점을 두고 발전했다. 따라서 경락과 경혈을 연구할 때 그 구조를 확인하는 것 못지않게 기능을 입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의학 고전에 따르면, 경락은 기혈이 전신을 순환케 하여 생체의 정상적인 생리활동을 유지하게 한다. 또한 내부장기에 질병이 발생하면 병리현상이 체표의 경락을 따라 표현된다. 따라서 한의사들은 이들의 변화(통증 이상감각 경결(硬結)등)를 면밀히 관찰, 질병 진단에 이용했으며 경혈 부위에 다양한 자극(침 뜸 지압 등)을 주어 질병을 치료했다.
내장이 병들면 피부가 운다.
경락이 한의학적 진단에 사용되는 근거는 현대의학으로도 설명된다. 한의사는 환자를 진단할 때 종종 환자 몸의 여러 부위를 눌러보며 환자의 상태를 관찰한다. 이 때 한의사는 환자는 아프다고 호소하는 부위를 통해 환자 내장기관의 질병을 알아낸다. 그러나 아픈 부위의 위치가 반드시 그 속의 병든 내장 위치와 일치하지 않는다. 가령 심장질환 환자의 어깨를 누르면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는 것. 한의사는 이를 통해 환자 심장에 문제가 있으리라고 판단한다.
내장과 피부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내장에 질환이 있을 때 피부에는 '과민대'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 과민대가 척수신경의 지배영역을 나타내는 피부절(dermatome)과 잘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그림1). 가령 교통사고를 당한 환자가 어떤 척추를 다쳤는지 알기 위해 피부절마다 바늘로 찔러 환자상태를 관찰하자. 만일 환자가 가슴 부위에 바늘을 무감각하게 느낀다면 그 환자는 해당 위치(가령T4)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이처럼 유해자극이 가해지지 않은 장소에 느껴지는 통증은 현대의학에서 '관련통'(referred pain)이라고 알려져 있다(그림2,3). 이는 인간의 반사(反射) 종류의 하나인 '내장(자율)-체성' 반사에 의해 이루어진다.
내장질환이 있으면, 그 기관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수용기가 흥분해 감각정보가 척수의 뉴런(신경세포)으로 전달된다. 이 정보는 통각을 인지하는 상위 중추로 보내지며, 이곳에서 피부로 통각을 투사하면 사람은 피부가 아프다고 인식하게 된다.
물론 척수의 뉴런은 피부 자체의 통각도 입력한다. 또한 평소에는 내장에서 강한 자극이 입력되는 일이 별로 없다. 따라서 상위 중추는 보통 피부쪽으로만 주의가 기울어진다. '내장에 병이 있어' 피부가 아픈 것과 정말로 피부가 아픈것이 잘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
내장-체성 반사가 한의학적 진단에 쓰인다면, 역으로 체성-내장 반사는 침치료의 기초가 될 것이다. 이 반사는 내장기관의 운동, 분비 및 혈관작용 등에 효과를 나타낸다.
침치료는 특정 부위에 특이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성질을 갖는다. 만약 어떤 부위의 혈류(血流)가 침치료에 의해 반사적으로 개선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치료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혈류가 증가해 그 부위에 산소나 영양 등이 공급되며, 그 부위에서 대사산물이 배출돼 병적 상태를 개선하는 것. 동물실험에서 내관(內關) 등의 경혈에 침자극을 하면 관상동맥의 혈류가 증대하는데, 이것이 혐심증(angina pectoris)에 대한 침치료의 이론적 기초가 된다.
경혈 자극으로 통증 멈춰
경혈에 자극을 가해 얻는 효과 중 가장 분명한 것은 진통효과다. 특히 침자극으로 유발되는 진통효과에 대해 세계의 많은 학자들이 집중적으로 연구했으며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통증은, 신체의 거의 모든 부위에 분포하는 통각수용체(자유 신경종말, free nerve ending)가 기계적 온도적 화학적 자극에 의해 흥분하고 이 정보가 신경신호로 변해 중추에 전도됨으로써 인지된다.
침자극이 통각지표(pain index) 또는 통각신호를 억제하는 몇가지 예를 살펴보자. 먼저 척수에서 촉각과 통각을 모두 수용하는 뉴런(polymodal neuron)에 촉자극과 통증자극을 지속적으로 준다. 이때 이 뉴런에 침을 놓자 통각에 의한 뉴런활동이 억제됐다(그림4).
한편 통증감각만을 느끼는 이빨의 신경부위(절치치수, 切齒齒髓)에 전기자극을 가하면 악이복근이 수축, 입을 벌리게 된다(개구반사). 마치 우리가 아플 때 입을 벌리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다. 이 개구반사의 크기는 침자극으로 억제된다고 알려졌다(그림5).
또한 이빨 신경에 전기자극을 가하면 뇌에서 전위가 발생하는데, 이 때 안면의 사백(四白) 인중(人中) 영향(迎香)이나, 손의 삼간(三間) 합곡(合谷) 등에 침을 놓으면 많은 경우 치통이 감소되고 전위의 진폭이 감소 또는 완전히 소실된다.
이상과 같이 경락·경혈의 기능적 증거라고 추론되는 생물과학적 사실들을 통해 보다 가까이 경락·경혈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증거는 단편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해 경락을 이해하는 데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 미지의 과제를 우리나라의 젊은 과학자들에게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