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대한 불신이 높아가는 가운데 정수기를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정수기의 원리와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을 파헤쳐 본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깨끗한 물이 아니라 안전한 물입니다. 그게 국민 정서죠. 그렇지만 안전한 물은 결국 깨끗한 물이 아닐까요?" 최근 정수기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는 이유를 물 연구가들은 이렇게 설명했다. 잇딴 물 사고로 불안해지자 정수기를 찾는다는 것이다. 사실 지난해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41.3%가 수돗물에 대해 불신을 표시했다. 반면 만족한다고 한 응답자는 14%에 그쳤다.
그래서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이 물 산업, 즉 '먹는샘물'(생수, 생수란 표현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음)과 정수기로 대표된다.
현재 먹는 샘물을 공급하는 업체는 1백20여 개. 여기다 6종의 외국산이 더 뛰어들어 그 수가 늘고 있다. 정수기 경쟁도 마찬가지다. 미국 일본 유럽에서 수입해 판매하는 곳까지 합하면 1백여 개의 업체가 넘는다.
수많은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좋은가. 먹는샘물이든 정수기든 올바른 선택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먹는샘물은 각각의 수질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되겠지만, 정수기는 그 정수 방법을 잘 알고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흡착원리 이용한 활성탄 필터
원리를 알고 나면 정수기의 종류는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정수기의 원리는 크게 증류 흡착 이온교환, 그리고 기공의 크기를 이용해 거르는 4가지다.
정수기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활성탄 필터를 이용한 방식이다. 활성탄은 구멍이 많아 단위 부피당 표면적이 크다. 그래서 오염물질에 대한 흡착력이 매우 크다. 활성탄은 톱밥이나 야자껍질과 같은 식물계, 역청탄과 무연탄과 같은 석탄계, 피치와 같은 석유계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다. 여기서 '필터'(filter)란 어떤 것을 거르거나 여과시키고 제거하는 장치로 생각하면 쉽다. 활성탄을 이용해 물 속의 오염물질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활성탄 필터다.
재미있는 사실은 활성탄 필터를 선조들이 오래 전부터 써왔다는 것이다. 장을 담글 때 고추와 숯을 넣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고추가 살균 효과를 가지고 있고, 숯이 불순물질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숯은 대표적인 활성탄이다.
활성탄 필터는 냄새와 색을 없애고 물맛을 개선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 물 속에 남아있는 세제나 농약성분과 같은 유기물질을 제거하는 효과가 뛰어나다. 특히 발암성 물질을 제거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한다.
조사에 따르면 수돗물에 대한 불만은 소독약품 냄새(73%), 녹물에 따른 탁한 색깔(59%), 앙금 또는 이물질(54%) 순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다른 원리를 이용하는 정수기들도 활성탄 필터를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활성탄 필터가 냄새와 색을 없애주어 심미적 만족감을 줄 뿐 아니라 발암물질도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페놀'은 국민이면 누구나 잘 아는 유기 용매다. 석탄 증류 공장이나 석유 화학 공장에서 주로 나오며 방충제에도 섞여있다. 페놀은 호흡 장애를 일으키고 간장과 신장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법적으로 규제되고 있다. 이러한 페놀과 같은 유기용매를 없애는 데 활성탄 필터 이상 좋은 방법은 없다.
그러나 활성탄 필터도 단점이 있다.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와 같은 미생물을 없애지 못한다. 그러므로 활성탄 필터는 자칫 미생물의 온상이 될 수 있어 자주 갈아주어야 한다. 또 활성탄 필터는 중금속 이온과 무기 화학물질을 잘 걸러내지 못해 공단지역처럼 오염이 많이 된 곳에선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활성탄 필터와 같은 흡착 원리를 이용하는 정수기로 제오라이트 정수기가 있다. 제오라이트는 점토질 광물로 일명 '비석'이라고도 한다.
흡착 능력과 양이온 치환 능력을 가지고 있어 냄새를 없애고 암모니아가스나 아황산가스 망간 철 톨루엔 등을 제거한다. 제오라이트 정수기도 활성탄과 비슷한 약점을 가지고 있어 다른 정수 방법과 함께 사용된다.
활성탄 필터나 제오라이트 필터가 세균 오염에 무력하다는 점을 보완하고자 등장한 것이 바로 은코팅활성탄 필터. 은코팅을 함으로써 균의 번식을 막게 한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실험 자료가 없어 아직까지는 항균 능력에 대해 의심을 받고 있다. 또 은이 코팅되어 있으므로 흡착 능력이 떨어지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최근 각광 받는 역삼투막 정수기
구멍은 자기보다 작은 물질은 통과시키지만 큰 물질은 통과시키지 않는다. 물 속의 오염물질을 거르는 방법 중 이보다 간단한 게 있을까. 구멍의 크기를 작게 하면 할수록 많은 오염 물질을 거를 수 있다. 이 원리를 이용한 것이 세라믹 필터, 한외여과막, 역삼투막 등이다.
세라믹 필터는 구멍이 많은 점토 분말을 높은 온도에서 구워 만든다. 구멍 크기는 0.5-1㎛ 정도. 주로 물 속에 함유된 녹찌꺼기와 같은 부유물질을 제거한다. 그러나 바이러스 중금속 발암물질 화학오염물질 등 미세한 크기의 오염물질은 거의 제거하지 못한다. 그래서 고가의 필터를 쓸 경우 미리 큰 오염물질을 걸러내 비싼 필터의 수명을 연장할 목적으로 많이 사용한다.
한외여과막(ultrafilter)은 세라믹보다 기공이 작기 때문에 더 많은 오염물질을 걸러낼 수 있다. 기공 크기는 0.001-0.1㎛ 정도. 여기서 '한외'란 영어의 'ultra-'의 뜻을 지닌 말로 필터의 성능을 나타낸다. 재료로는 매우 가는 대롱이 실타래처럼 묶인 '중공사막'(中空絲膜)을 많이 쓴다. 한외여과막은 말 그대로 성능이 우수해 대장균과 미생물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유기물질을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이온성 물질은 걸러내지 못하는 게 흠이다.
'삼투현상'은 물이 저농도에서 고농도로 흐르는 현상을 말한다. 거꾸로 고농도에서 저농도로 펌프를 이용해 물을 보내는 방식을 '역삼투'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불순물이 역삼투막에 의해 걸러진다. 역삼투막으로는 '멤브레인'이라는 세포의 원형질막과 같은 지극히 미세한 분리막이 사용된다. 이 멤브레인이 역삼투막 정수기의 핵심 부품인 것이다. 멤브레인은 기공의 크기가 0.0001㎛ 이하로 가장 정수 능력이 뛰어나다.
역삼투 방식의 정수기는 미생물은 물론 유기 물질, 중금속이온 등 거의 모든 오염물질을 걸러낸다. 그러나 펌프를 써야 하기 때문에 전력이 다소 많이 들고, 소음이 있을 수 있다. 또 멤브레인 필터를 보호하기 위해 세척 기능을 추가하는데, 먹는 물의 양에 비해 많은 물이 허비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증류수를 마신다면 아마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런데 증류한 물을 미국인들은 먹고 있다. 증류수란 물을 끓여 생성된 수증기를 받은 물이다. 그래서 세균이 있을리 없고, 중금속이온이나 유기물질이 있을 리 없다. 깨끗하다 못해 순수한 물(${H}_{2}$O) 자체이다.
사람들은 증류수를 먹으면 무슨 큰일이 나는 것처럼 알고 있다. 설사나 배탈이 나고, 생체내 이온 농도가 달라져 몸에 문제가 생길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물을 마실 때 미네랄을 섞어 마신다고 미국을 다녀온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물 연구가들은 "증류수를 마신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체질에 따라 일시적으로 배탈이 날 수 있을 뿐 적응되면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미국사람들은 왜 미네랄을 섭취하는 걸까. 외국의 먹는샘물을 연구해 온 한국수도연구원 백영석 과장은 "미국에서 먹는샘물에 미네랄을 함께 섭취하라는 문구를 본 적이 없다. 미국인들이 미네랄을 함께 섭취하는 것은 맛 때문이지 영양 때문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증류기는 물을 끓이고 다시 식히는 번거로움과 에너지 소비가 크다는 단점이 있어 한국인의 정서와는 잘 맞지 않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선 잘 쓰이는 정수기는 아니다.
물 속에는 많은 이온들이 녹아 있다. 이들 이온 중에서 수은 불소 카드뮴 시안 황산 비소 6 가크롬 구리 철 망간 납 등의 이온들은 인체에 해를 끼칠 수 있으므로 환경부에서 법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카드뮴은 일본에서 발생했던 이따이이따이병의 원인 물질이다. 인체에 소량만 축적되어도 골연화증을 유발하며, 만성 중독될 경우 위장 장애와 내분비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이온만을 전문으로 거를 목적으로 만든 정수기가 이온교환수지다. 이온교환수지란 플라스틱 수지 표면에 ${Na}^{+}$ 이온을 붙여 물 속에 있는 금속 이온과 치환하는 방법이다. 이런 방법을 쓰면 칼슘 마그네슘 철 납, 그리고 카드뮴 등의 금속이온을 분리 제거할 수 있다. 이온교환수지는 센물을 단물로 바꾼다고 해서 '연수기'라고도 불리며 목욕탕과 보일러 장치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단물은 때가 잘 지고 기계 수명을 연장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생물이나 유기물질을 제거하지 못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알칼리수와 육각수 논쟁
지금까지 살펴본 4가지 원리(흡착 증류 이온교환, 그리고 기공크기를 이용한 분리)를 적용한 것들이 엄밀한 의미의 정수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국내에선 이온수기 파이워터기 그리고 살균을 목적으로 하는 자외선 발생기와 오존발생기가 정수기란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물론 이런 원리와 정수 원리가 결합된 경우엔 정수기라 할 수 있다.
'이온수기'는 이온교환수지와 이름이 비슷해 혼동하기 쉽지만 원리는 전혀 다르다. 이온수기는 전기분해를 통해 알칼리수와 산성수를 만들어내는 장치다. 그러므로 정수기능은 거의 없고 다만 약간의 불순물과 냄새를 제거할 수 있다.
주로 일본에서 발달했으며 한때 우리나라에 건너와 불티나게 팔렸다. 이때 알칼리수가 건강에 좋다는 말이 '별 근거없이' 퍼졌다. '인간이 1백세 이상 살지 못하는 것은 산성수를 마시기 때문이며, 모든 질병과 조기 사망의 원인은 산성수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칼리 수를 마셔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요즘 알칼리수가 몸에 좋다는 주장은 의학계의 반발로 주춤해졌다. 의학 전문가들은 "알칼리수든 산성수든 위에 들어오면 강한 산성인 위액과 섞이게 되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이와 비슷한 이론이 최근 한국과학기술원 전무식 교수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6각수 이론이 바로 그것. 간단히 설명하면 물을 차게 하거나 자석을 댄 자화수, 게르마늄이 든 물은 6각형 고리 모양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6각수는 노화를 방지하고 암을 예방한다는 것이 전교수의 주장이다.
이런 원리를 이용해 만든 것이 '파이(π) 워터기'다. 파이 워터기는 자석을 이용한다고 해서 '자화수기'라고도 불린다. 이 역시 일본에서 발달한 제품으로 국내에서도 개발 보급되고 있다. 정수기로 만들어진 것을 들여다 보면 부유물질을 제거하는 세라믹 필터, 미네랄을 방출하는 코랄 샌드, 유기물질을 흡착하는 활성탄 필터, 그리고 자석이 들어 있다.
국내 많은 업체들이 자화수 정수기 제조에 참여하고 있지만 그 성능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꽤 있다. 우선 전 교수의 주장이 임상 실험에 의해 입증된 것이 아니며, 인위적으로 만든 6각수의 물은 짧은 순간에만 존재해 먹는다고 해도 별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전 교수의 6각수 이론과는 별도로 자화수 정수기는 정수 원리에 있어서 다른 세라믹 필터나 활성탄 필터를 이용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살균기도 한몫
마지막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정수기라기 보다는 '살균기'라고 해야할 것들이다. 미생물을 얻는 생물을 살균한다는 측면에서 안전한 물을 얻는 안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자외선(UV)은 가시광선보다 짧은 1천-4천Å의 파장을 갖는 빛이다. 미생물의 DNA를 파괴함으로써 그 증식을 억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 살균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실험에 따르면 10만㎼ 초/㎠에서 대장균은 3초면 죽는다. 그래서 살균 기능이 약한 정수기에 도입돼 보완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자외선 필터 정수기'라고 한다.
오존도 세포막을 파괴해 미생물의 증식을 억제하는 기능에서는 자외선 필터와 같다. 오존 농도가 0.01㎎/L에서 1분이면 대장균은 99% 죽는다. 이런 원리를 이용한 것이 '오존 발생기'다.
대부분의 정수기는 한 가지 원리만을 이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이것저것을 붙이게 되는데 정수효과와 살균효과를 높이기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가격도 이에 따라 달라진다.
수질에 맞는 정수기 골라야
정수기를 고를 때 가정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수질이다. 수질은 국가마다 지역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수기 이용도 그에 따라 차이가 있다.
미국의 정수기 보급률은 약 15%. 오존발생기 증류기 이온교환수지보다는 자외선 필터 정수기, 활성탄 정수기, 그리고 역삼투막 정수기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우리가 잘 쓰지 않는 증류기가 많이 이용되고 있다는 것.
'리서치 스터디스'지 1994년 2월호에 따르면 이온교환수지는 지난 1986-1992년 사이에 3.6%의 증가를 보였으나, 1993년 이후에는 4.2%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달리 역삼투막 정수기는 1993-1998년 사이에 9.4%로 증가할 것이며, 활성탄 정수기는 같은 기간 동안 9.2%의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또 그동안 15.5%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던 자외선 필터 정수기 역시 9.3%의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지하수와 지표수가 많이 오염되어 있다. 특히 75%의 인구가 모여사는 중화학공업지역은 더욱 심한 오염을 앓고 있다. 그래서 정수기 산업도 호황을 누리고 있다. 정수기의 수질 기준은 일본수도협회에서 정하고 있는데 비교적 까다롭지 않다. 일본에서 간단한 정수 원리를 이용해 만든 소형 제품들이 많은 것도 이런 배경을 두고 있다. 그래서 일본 제품을 구입할 때는 정수 능력을 잘 살피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 나라는 아직까지 먹는 물이 비교적 양호하다는 것이 물 전문가들의 평이다. 환경부의 조사에 따르면 일부 수돗물에서 발암물질인 트리할로메탄(THM)의 일종인 클로로포름, 그리고 바륨과 나트륨이 미량 검출되었다. 그러나 염려했던 농약류나 페놀류는 검출되지 않았다. 아직까지 정수된 수돗물은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급수관과 물탱크가 부식되어 생기는 녹물이나 이물질, 소독약 냄새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다.
지하수와 약수는 날로 오염이 증가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안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독되지 않은 물의 주요 오염원은 대장균과 같은 미생물이다. 또 일부 공장 인접 지역에선 지하수에서 금속이온이 검출된다. 그래서 정수기를 구입할 때는 이런 점들을 고려해야 한다.
물에서 녹물이나 찌꺼기가 나올 경우 예전에 '등나무정수기'라고 불렸던 초보적 정수기 이상의 성능을 지닌 것이면 모두 좋다. 냄새와 맛에 이상이 있을 경우에는 활성탄 필터가 가장 좋다. 그래서 대부분의 정수기들은 활성탄 필터를 함께 사용한다.
동물의 배설물이나 폐수에서 나오는 암모니아성질소나 질산성 질소,그리고 중금속 이온들은 역삼투나 이온교환수지를 써야 없어진다. 또 일반 세균이나 대장균 농약류 유기물질들을 없애려면 활성탄 필터나 역삼투막을 이용한 정수기가 좋다. 결국 정수기를 선택할 때 어떤 물을 먹는가를 생각해서 결정하는 것이 좋다.
1995년 7월 1일부터 환경부가 지정한 수질 기준을 통과한 정수기는 '물'마크를 부여받게 된다. 그런데 물 마크를 전적으로 믿어선 곤란하다. 지금까지 사용해 온 정수기 품질 마크는 민간단체인 한국수도연구원에서 인증하는 'C' 마크와 한국정수기공업협동조합에서 인증하는 '정' 마크 등 2종이 있다.
국내 1백여 정수기 업체 중 'C' 마크를 부여 받은 곳은 5개. 대부분 'C' 마크를 받은 업체는 역삼투막 정수기를 생산하는 곳이어서 다른 방식의 정수기를 생산하는 업체로서는 우리 현실에 맞지 않게 너무 기준이 까다롭지 않느냐는 반발을 사고 있다.
이와 달리 정수기 업체들이 품질관리를 위해 자율적으로 도입한 '정' 마크를 획득한 업체는 20여개. 그러나 '정' 마크 제도 역시 까다롭다는 업체들의 의견이다. 현재 '정'마크조차 받지 않고 유통되는 정수기는 전체의 95%에 이른다. 그래서 환경부에서는 검사 기준을 완화해 많은 정수기 업체들이 검사필증을 받도록 한 것이다.
환경부가 지정한 검사기준은 모두 43개 항목에 이른다. 그러나 냄새 맛 탁도 색도 일반세균 등 5개 항목만 의무적으로 검사받도록 하고, 나머지 38개 항목은 제조업체가 선택적으로 받도록 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수질을 비교적 괜찮다고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며, 가능한 많은 정수기 업체들이 품질 표시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래서 '물' 마크만 보고 구입하기보다는 용도에 맞는 것을 신중하게 고르는 게 필요하다.
정수기를 고를 때 가장 신경써야 할 부분은 애프터서비스다. 일단 좋은 정수기를 구입했다 하더라도 관리가 되지 않으면 정수기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정수기의 수명은 필터의 수명과 같다. 필터는 일정량의 물을 거르고 나면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래서 필터의 성능은 얼마나 많은 물을 거를 수 있는지 그 양으로 결정한다. 일부 정수기에는 아예 센서를 달아 필터 오염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정수기에는 센서가 없어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애프터서비스를 해 준다. 그러므로 애프터서비스가 잘되는지를 살피는 것은 정수기 자체를 고르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정수기 구입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일반 가정에서의 정수기 관리다. 정수기를 구입해 놓고 1년이 넘도록 필터를 갈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주 필터의 오염 정도를 확인해 필터를 교환해 주는 것은 필수. 집을 오랫동안 비웠을 땐 물을 20분 이상 흘려 보낸 후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온수는 거르지 않는 것이 좋다. 온수를 거를 경우 필터의 기능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정수기 대용, 응급 정수 요령
현재 국내에 보급된 정수기는 1백20만 대로 추산하고 있다. 음식점 회사 등에서 사용하는 것을 빼면 1천2백만 전국 가구수의 10% 미만. 나머지 90% 이상의 가정은 정수기를 이용하지 않고 수돗물과 지하수, 그리고 약수를 그냥 먹고 있다.
그렇다면 정수기가 없는 가정에서는 대책이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정수기가 없어도 간단한 방법으로 훌륭한 정수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물을 끓이는 것이다. 먹는 물은 세균 오염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요즘과 같이 콜레라가 유행할 경우에는 물을 끓여 먹어야 한다. 물을 끓이면 대장균과 일반 세균이 죽게 될 뿐만 아니라 휘발성 유기물질이 날아가게 된다. 수돗물의 경우엔 소독할 때 사용한 염소의 냄새를 제거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또 발암성 물질로 알려진 트리할로메탄도 휘발되어 없어진다. 실험에 따르면 휘발성유해물질은 물이 끓기 시작한 때로부터 2분이면 15% 이하로 줄고, 15분이 지나면 거의 2% 미만으로 줄게 된다.
이밖에도 물을 끓이면 센물이 단물로 바뀐다. 이온교환 수지와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약수와 지하수는 반드시 꿇여먹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보리차나 옥수수차를 끓여먹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된다. 태운 보리와 옥수수가 활성탄과 같은 구실을 해 물 속의 발암물질과 오염물질을 흡착함으로써 물을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냥 물을 끓여 먹는 경우보다는 물맛을 함께 즐길 수 있어 더욱 좋다.
그리고 수돗물을 뚜껑 없는 큰 그릇이나 물통에 담아두는 방법이 있다. 하루 정도만 지나면 물 속에 잔류하는 많은 트리할로메탄과 휘발성 물질이 날아간다. 염소 냄새가 없어져 불쾌감도 사라진다. 낡은 급수관이나 물탱크에서 나오는 녹과 같은 작은 입자들은 가라않게 되므로 맑은 물을 먹을 수 있다.
우리 나라의 먹는 물은 대부분 세균에 의한 오염과 휘발성 유기물질에 의한 오염이 주류를 이룬다. 그래서 중금속 오염 지역이 아닌 이상 물을 끓여 먹거나 하루 정도 두었다 먹는 방법으로 충분한 정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물 속의 미네랄' 환상이다
"우리 집에서도 정수기를 쓰는데 아무래도 역삼투압형인 것 같습니다. 방송에 나온 것과 같은 측정기로 이온(미네랄을 포함해서)이 없음을 보여준 적이 있었거든요. 그 당시 저의 평범한 상식으로도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반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은 PC통신을 통해 모 방송의 카메라출동에 대해 시청자가 보낸 의견이다.
지난 8월 20일 방송된 내용의 골자는 역삼투 방식의 정수기가 물 속의 미네랄을 걸러내 인체에 미네랄 결핍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도가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여기에 있다.
우리 인체에는 섭취해야 할 미네랄들이 있다. 칼슘 인 칼륨 나트륨 철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름만 들어도 뼈와 이를 구성하고, 혈액과 체액의 농도를 조절하며, 부족하면 빈혈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물질들이다. 만약 이런 미네랄이 부족하다면 인체는 크나큰 장애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인체에 해를 끼치는 미네랄도 있다. 알루미늄 수은 카드뮴 비소, 그리고 납과 같은 성분들이다.
결국 물 속에 녹아 있는 미네랄 중에는 인체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는데, 어떻게 좋은 것만 골라 섭취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정수기는 없다.
두번째 논쟁의 초점은 "인체에 필요한 필수 미네랄을 물에서만 흡수하는 걸까"하는 점이다. 미네랄은 크게 무기 미네랄과 유기 미네랄로 나눈다. 물과 공기. 그리고 흙에 함유된 것을 무기 미네랄이라 하고, 식물이나 동물에 함유된 것을 유기 미네랄이라고 한다.
미국의 '워터 테크놀로지' 93년 7월호는 물 속의 무기 미네랄이 인체에 어떤 영양학적 가치를 갖는가에 대한 논쟁을 다루었다. 여기서 많은 건강 전문가들은 음식과 신선한 과일, 야채 등에 존재하는 유기 미네랄만이 인체 세포와 조직에서 흡수된다고 주장했다. 설령 물 속의 미네랄을 흡수한다고 해도 그 양은 극히 작아서 인체에 필요한 양을 채울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석연치 않은 부분이 또 하나 있다. 물 속에 녹아 있는 필수 미네랄에 대한 미련이다. 먹는 물에서는 영양분을 얻을 수 없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마시는 물에서 몸에 필요하거나 좋은 성분을 특별히 섭취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맑고 깨끗한 물이면 족하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미네랄이 물맛을 내거나 위산중화효과를 내는 것 외에는 효과가 거의 없다.
한때 일본에서는 게르마늄이 들어 있는 건강수가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게르마늄이 녹아있는 물은 성인병과 노화 예방에 좋다는 것이었다. 어떤 업체는 게르마늄 함량을 자랑하기 조차 했다. 그런데 알고보면 게르마늄은 유독물질로 많이 먹으면 중금속 중독과 같은 증세를 보인다. 독을 많이 먹으면 해가 되지만 조금 먹으면 약이 된다는 일반적 속설을 함부로 따를 수 있을까.
물은 맑고 깨끗한 것이 좋다는 것이 아직까지는 정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