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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의 치열한 정자 전쟁

자손번식 위한 조직적 전략·전술

한번의 수정을 위해 방출되는 수억마리 정자. 수컷들 간의 경쟁으로 난자에 쉽게 도달하지 못한다. '방어' 책임을 맡은 정자부대가 다른 수컷 정자를 공격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와 같은 경쟁사회는 없다고 한다. 대학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취직하긴 더 어렵고 취직했다고 모든 것이 끝나지도 않는다. 승진시험은 회사원들의 생활을 더욱 고달프게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경쟁도 정자들의 경쟁에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암컷의 생식기관에 동시에 들어온 정자의 수가 많게는 3-4억 마리, 적게는 수천만마리에 이르지만 결국 수정에 성공하는 정자는 단 한마리 뿐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쟁이 이보다 치열하고 처절할 수 있을까?
 

난자에 최초로 도착한 정자가 난자벽을 뚫고 들어가는 모습.


가계 보존을 위한 수컷의 치열한 노력

'정자경쟁'하면 사람들은 보통 한 수컷이 만든 정자끼리의 경쟁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의미의 경쟁으로 보기 어렵다. 경쟁에는 당연히 상대편이 있게 마련이고 그 상대는 나와 다른 남임에 틀림없다. 즉 한마리 수컷의 정자경쟁은 전부 같은 편끼리의 경쟁이므로 누가 이겨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경쟁이란 암컷의 생식기관에 존재하는 다른 수컷들 정자 간의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만일 정자가 암컷의 생식기관에서 살아있는 시간이 충분히 길고 암컷이 다른 수컷과 그 시기에 교미한다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실제 이런 일은 생물계에서 자주 발생하는데, 대부분 동물들은 경쟁에서 승리하려고 진화적으로 흥미로운 나름의 전략을 개발, 구사해 왔다.

우선 동물들이 텃세권 혹은 세력권을 설정하는 예를 들 수 있다. 조류나 어류의 수컷은 암컷을 다른 수컷으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텃세권을 행사한다. 이 때 수컷은 목숨을 걸고 암컷을 지킨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별로 성공적이지 않다. 가령 조류 새끼 중 많은 수가 부양하고 있는 수컷의 새끼가 아니라는 유전학적 검사 결과가 자주 보고되고 있는 것이다.

수컷 간의 싸움도 정자경쟁의 한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정자경쟁의 목적은 결국 자신의 정자와 암컷 난자를 수정시키는 일이므로, 암컷을 두고 벌이는 수컷들의 한판 결투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정자를 암컷에게 주입하기 위한 것이다.

수컷의 생식기 구조가 다른 수컷의 정자 침입을 방해하도록 발달된 경우도 있다. 곤충이 그 대표적인 사례.

우선 곤충 수컷들이 암컷과 교미할 때 나중에 교미한 수컷이 득을 보는 경우가 있다. 가령 실잠자리(Calopteryx maculata) 수컷의 생식기는 암컷의 생식기내에 자신의 정액을 사정하는 동시에 이미 존재하는 다른 수컷의 정자를 퍼내도록 발달돼 있다. 어떤 종은 생식기를 이용, 암컷 저장기관의 정자를 한쪽으로 몰아 내기도 한다.

심지어 교미마개로 암컷의 생식기관을 막는 수컷도 있다. 보통 교미마개는 정자가 누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적어도 나비류와 물방개과의 일부 곤충에게 교미마개는 다음에 있을지도 모를 교미를 방지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경쟁 상대의 정자 침입을 막으려는 것이다.

이 교미마개는 유대류나 박쥐 고슴도치 쥐 등 포유류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사정된 정자를 보호하기 위해 긴 교미기간을 갖는 생물도 있다. 노린재류의 일종(Nezara virigidula)은 암컷과 수컷이 어떤 비율로 존재하는가에 따라서 교미기간이 달라진다. 암컷 1마리 당 수컷 2마리면 교미기간이 2배 이상 길어져 교미가 일주일 내내 지속되기도 한다. 가장 긴 교미 기록이 79일에 이르기도.

정소 크기도 정자경쟁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다. 원숭이나 유인원에서 몇마리의 수컷이 한마리 암컷과 교미하는 종은 1대1로 교미하는 종에 비해 몸에서 차지하는 정소의 상대적 크기가 더 크다고 한다. 정소가 클수록 더 많은 정자를 생산할 것이다.
 

체내에서 정자가 난자까지 도달하는 과정


동료정자 돕는 고도의 팀워크 구사

정자경쟁의 입장에서 보면 수정에 성공하는 정자가 1마리 뿐인데도 수억마리의 정자가 한번에 사정되는 이유가 설명된다. 언뜻 생각하면 이는 상당히 비효율적이며 낭비적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정자수가 많은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흔히 정자수가 많은 이유로 암컷 생식기관내 난자에 도달하기까지의 많은 어려움을 얘기한다. 어려움을 뚫기 위해 수 많은 정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분명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수정하지 않는 일부의 정자들은 동료 정자가 수정에 성공하도록 가미가제식 특공 작전을 벌인다고 한다. 이 정자들은 흔히 생각하듯 서로 무한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고도의 팀워크를 이뤄 다른 개체의 정자침입을 방해하는 것이다.

실제로 정자들 중 비정상적인 것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고 한다. 수정용 정자는 약 1%에 불과한 것.

영국 맨체스터대 생물학자 로빈 베이커와 마트 벨리스 박사에 따르면 이 비정상적인 정자는 매우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우선 이들은 콘크리트 철근처럼 서로 엉켜 장벽을 만들어 다른 수컷의 정자침입을 막는다.

또한 암컷 생식기의 일정 지점에서 보초를 서다가 머리부위의 가수분해 효소를 방출, 다른 정자를 요격하기도 한다. 이 효소는 정상적인 정자가 수정하기 위해 난자의 막을 녹이는 데 쓰이는 것.

흔히 정자가 올챙이를 닮았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적진을 향해 날아가는 고성능 미사일을 닮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물론 이 미사일의 탄두는 머리부위의 가수분해효소다.

경쟁상대가 없으면 수컷의 정자수가 줄어들기도 한다. 가령 쥐 암컷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교미할 때 수컷의 정자수가 5천1백만마리였으나 암컷이 정해진 상대와 교미할 때는 2천9백만마리로 그 수가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동물의 다양한 정자모습


인간의 정자경쟁, 보다 많은 연구 필요

인간에게도 동물과 같은 정자 경쟁이 일어날까? 또한 그것이 인간의 진화에 시사하는 점은 무엇이며 어떻게 기여했을까?

만약 정자경쟁이 인간에게 있었고 그 정자 경쟁이 인간의 진화에 영향을 미쳤다면 우리의 성적 생리에 뚜렷한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남성을 생각해보자. 성관계 동안 남성이 사정하는 정자수는 아마도 난자를 수정시키기 위해 필요한 양과 생물학적 비용을 가급적 낮추려는 힘 사이의 타협의 산물일 것이다. 만일 한 남성의 정자가 다른 남성의 정자와 경쟁해야 하는 위험이 있다면 그는 정자수를 늘려 상대편을 격퇴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의 정자만이 수정에 참여하는데도 수억마리의 정자가 생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은 어떤 경우에 위험을 감지하는 것일까? 남녀가 함께 지낸 시간과 정자수의 관계를 관찰, 한가지 해답을 추정할 수 있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파트너와 떨어져 있던 남성이 파트너와 오래 지낸 남성에 비해 많은 양의 정자를 사정했다고 한다. 물론 이 현상은 남성들의 개인적 원인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파트너와 떨어진 남성이 파트너가 다른 남성과 관계를 맺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느끼고, 그 결과 정자수가 늘어났다는 것.

최근 해외토픽란에 흥미로운 기사 한가지가 실렸다. 산업용 유독화학물질의 남용으로 남성의 정자가 계속 줄고 남녀의 성별 특성이 점차 사라져 인류 번식에 심각한 위기가 닥쳤다는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지난 40년동안 남성 정자 수는 평균 40%나 감소했으며, 특히 최근 10년간 연평균 감소율이 2.6%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북극 에스키모나 아프리카 마사이종족의 정자수를 산업화가 많이 진전된 지역의 남성 정자수와 비교했을 때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자수의 감소는 환경오염 뿐만이 아니라 다른 요인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현대화 과정에서 사회와 문화도 많은 변화를 겪었고 이런 요인이 정자수 감소에 기여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 살펴본 진화론적 요인도 정자수 감소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모든 판단은 좀 더 많은 자료와 연구를 필요로 한다.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기 위한 생물들의 전략과 전술은 상상을 초월한다. 손자병법에도 없는 그런 계책을 누가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어떻게 개발했을까! 아마 알만한 사람은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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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김학현 생물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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