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이 온혈동물이었다는 학설이 근래들어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70년대 처음 이 주장이 나온 이래, 연구자들은 과거 외형상의 특징을 위주로 한 파악보다는 더 상세하고 과학적인 증거들을 공룡온혈동물설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공룡은 정말 냉혈동물이었을까. 그 거대한 체구에 비해 매우 작은 뇌의 용량 때문에 공룡은 바보스런 동물의 상징처럼 생각되었다. 대부분 현생 파충류가 그러하듯 공룡도 대부분의 시간을 정지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가 비교적 짧은 시간에만 민첩하게 움직인다고 생각하였다. 공룡이 이처럼 바보스럽도록 굼뜨고 미련한 동물이었을까.
모든 잘못이나 욕이 말못하는 죽은 자에게 돌아가듯, 지구상에서 사라진 동물이라고 하여 공룡을 지나친 편견으로 억울하게 혹평해 온 것은 아닐까? 공룡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그 연구가 진척될수록 과거 공룡에 대해 지녔던 우리 생각에 잘못된 부분이 있는 건 아니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6천 5백만년 전이라는 오랜 옛날에 지구상에서 사라진 동물군에 관한 문제는 흥미는 있지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1억년 이상 지구의 각종 생태계를 주름잡다 돌연히 사라진 이 동물군에 대해 새삼 학자들간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믿어왔던 사실들에 대해 강력한 반대 이론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고에너지형 자세, 큰 체구
공룡의 화석은 처음 영국에서 발견돼 그 이름이 명명됐다. 당시 그 화석의 이빨모양이 에콰도르 소속 갈라파고스 섬에서 현재도 살고 있는 이구아나(Iguana)와 가장 가깝다는 사실에서 '이구아노돈'(Iguanodon)이라는 명칭이 주어졌다.
그리고 머리 뼈가 파충류와 닮았고 엄청난 크기의 체구를 갖는 동물이라는 이유에서 '공포의 도마뱀'이라는 의미의 공룡(Dinosaur, 그리스어로 deinos(공포)+saurus(도마뱀))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 이후 이구아나가 파충류이듯 공룡도 파충류이고, 파충류가 냉혈동물이므로 공룡도 당연히 파충류에 속하는 냉혈동물로 알려져 왔다.
사실 이빨과 머리뼈뿐만 아니라 피부가 비늘로 덮여 있다든가, 알을 낳는다는 사실 등에 있어서도, 그리고 악골(턱뼈)의 구조에 있어서도 외형상 공룡은 포유류보다는 파충류에 가깝다. 따라서 현재도 많은 학자들은 공룡을 냉혈동물인 파충류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최근 일부 고생물학자들 중 특히 비교해부학이나 생태학과 행동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공룡의 냉혈동물설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들이 제기하는 논거를 간단히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공룡의 다리는 동체 아래로 뻗어 있어 체중을 다리에 온전히 싣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파충류보다는 포유류에 가까운 체형이다. 파충류는 다리가 없는 뱀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다리가 동체 옆으로 뻗어 있어 다리 윗부분이 동체와 수평에 가깝게 배열돼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파충류는 기어서 움직인다.
한편 포유류나 공룡은 대부분 다리에 체중을 온전히 싣고 또박또박 걸어서 움직인다. 즉 공룡은 파충류와 다른 모습으로 움직였다고 생각되며, 이는 공룡의 발자국 화석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중생대 지층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 공룡의 발자국 화석들을 보아도 모두 독립된 형태로 또박또박 걸어간 흔적들을 보여주고 있다. 꼬리조차도 땅에 끌지 않았음을 확실히알 수 있다.
이러한 자세로 움직이는 모습은 온혈성 동물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이를 특히 고에너지 방식(high-energy system)의 행동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행동방식이 많은 음식물을 섭취하고 왕성한 열량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동양식은 곧 온혈성 동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공룡이 냉혈동물이라 보기에는 체구가 너무 크다는 사실이다. 냉혈동물인 파충류도 실제로 피가 차가운 것은 아니다. 다만 체온이 주위의 온도변화에 따라 어느 정도 범위에서 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포유류처럼 그들도 체온을 어느 정도 따듯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파충류는 햇볕을 쪼여 체온을 따듯하게 유지한다.
그러나 거대한 체구의 공룡이 이러한 방식으로 체온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0t의 체중을 갖는 동물이 체온을 1℃ 높이기 위해서는 뜨거운 햇볕에 86시간 계속 서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공룡이 살던 백악기에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밤낮의 변화는 물론 계절의 변화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86시간 계속 햇볕을 쪼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겨울철의 냉기를 견디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태양열을 흡수한다고 해도 몸 표면의 열 때문에 필요한 열이 몸속으로 전도되기도 전에 피부가 타서 동물은 죽고 말 것이다. 10t 정도의 공룡도 이렇거늘 그보다 더 많은 80t의 체중을 가진 거대 공룡들은 체온 유지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민첩한 동물
셋째, 공룡은 골격 속에 하베스관(Haversian canals)이라는 많은 혈관들을 가지고 있다. 이 혈관은 고에너지 방식의 동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이한 기관이고 냉혈성 동물에는 없는 것이다.
넷째, 냉혈성 동물들은 온혈성에 비해 정적이고 비활동적이기 때문에 먹이 동물과 포식(捕食) 동물의 비가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고 한다. 즉 냉혈동물은 에너지 섭취가 온혈동물에 비해 현저히 낮기 때문에 먹이동물/포식 동물의 비에서 차이가 난다.
이러한 차이는 군집화석에서 이들 동물이 냉혈성이냐 온혈성이냐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공룡의 골격 화석이 집단적으로 보존된 곳에 나타나는 먹이 동물과 포식 동물의 비는 공룡이 온혈성에 가까움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육식 공룡의 수가 초식공룡의 수에 비해 매우 낮다.
이는 우리나라 남해안에 집단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발자국 화석을 보더라도 육식 공룡의 것이 전체의 3% 미만으로 매우 낮은 비율로 보인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이는 아프리카 정글을 연상해보면 된다. 수백수천 마리씩 떼를 지어다니는 초식동물들에 비해 사자와 같은 육식동물은 언제나 외롭게 행동한다.
이처럼 육식 공룡의 비율이 초식공룡에 비해 낮은 것은 육식공룡이 먹이를 많이 취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냉혈동물인 파충류의 경우는 온혈동물에 비해 현저히 적은 양의 먹이를 취한다. 현존하는 파충류는 대부분 그 자신의 체중과 맞먹는 양의 먹이로 60일 이상을 사는 데 비해 사자는 자신의 체중에 해당하는 양의 먹이를 약 1주일 간에 먹어치울 수 있다고 한다.
다섯째, 공룡의 다리에서 그 길이와 상대비가 파충류보다도 포유류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즉 파충류는 체구에 비해 짧은 다리를 갖고 있지만 공룡은 포유류처럼 긴 다리를 갖고있다. 이는 공룡이 매우 민첩한 동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의 여러 증거들은 공룡에 대한 종래의 생각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즉 공룡이 현생 파충류처럼 냉혈동물이 아니라 포유류와 같은 온혈성이라는것, 그리고 상당히 민활한 행동을 보인 동물이라는 것이다.
공룡이 둔하고 어리석은 동물이라는 생각은 사라진 동물에 대한 지나친 평가절하라 보인다. 이들이 1억년 이상 지구상의 온갖 생태계를 주름잡은 동물군이라는 사실을 결코 과소평가 할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종래에는 공룡을 당연히 파충류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했으나, 파충류와 조류(鳥類)의 중간에 해당하는 독립된 분류군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