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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이지 않는 에너지-정신·물질세계 모두 작용

기의 실체

동양의 인간관과 자연관에 뿌리를 둔 기(氣). 과연 기의 실체는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기'를 어떻게 인식해야 되는 것일까.

평상시에 우리는 기와 관련된 표현을 자주 쓴다. '기를 펴다' '기가 꺽인다' '시장기를 느낀다' '생기가 돈다' 등. 단어에도 기는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다. 기분 분위기 총기 기력 등 심리나 생리적인 차원을 나타내는 표현뿐만 아니라 물질을 표현하는 공기 전기 자기에 이르기까지 기(氣)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이처럼 기는 알게 모르게 우리 생활에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수 있다.

지금 우리는 기(氣)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국내에서 활약하는 기와 관련된 단체만 수십개나 되고, 기와 관련된 여러가지 건강비법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심지어는 기를 이용해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리며, 기를 상품화한 제품(베개 조끼 등)조차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의 범람을 정확히 평가하고 대응할 만한 잣대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기에 관한 한 '혼란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기란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한다면 기의 실체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답은 간단하지 않다. 기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아 '눈에 보이는 것만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는 서양과학에 경도돼 있는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접근조차 어렵다. 기란 일원론(정신과 물질의 세계가 하나) 의 전통이 강한 동양의 인간관과 자연관에 뿌리를 갖고 있는 개념이다.
 

역사 속의 기

기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역사적인 고찰을 해볼 필요가 있다. 공맹(孔孟)과 노장(老莊)은 기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살펴보자.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의 도를 설파 하기 위해 네가지 기를 이야기했다(辭氣 屛氣 食氣 血氣). 맹자는 기가 신체를 가득 채우는 극미한 구성요소라고 정의했다. 기는 사람 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 자연에도 널리 퍼져 있다고 하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강조했다.

노자는 기를 만물생성의 근원이라고 파악했다. "도(道)에서 하나의 기(一氣)가 나오고 그 하나인 기가 다시 둘로 나뉘어 음과 양이 생기고, 음과 양의 2기가 조화스런 화합체를 이루며, 이것들이 결합함으로써 만물이 나오게 된다." 장자 또한 만물의 생성 변화 소멸을 기의 이합취산으로 보았다. "무(無)인 혼돈에서 기가 생겼고 기가 변화해 형체가, 형체가 변화해 생명이 생겨났다."

노장사상에는 이원론과는 달리 일원론의 세계관이 짙게 깔려 있으며, 정신과 물질, 양자를 매개하는 것으로 기의 존재를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매개라는 의미는 눈에 보이는 물질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마음)이든 모두 기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관점은 물질과 정신을 완연히 구분하고 서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파악하는 서양 근대과학의 관점과는 철저히 배치된다.

상식적으로 파악하건대 기는 매우 심리적인 요소라고 느껴진다. 기분이나 분위기에서 쓰여진 기는 바로 이러한 주관적인 요소를 그대로 담고 있다. 그러나 공맹노장에서 표현된 기는 단순히 심리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기나 시장기 등 생리적인 것은 물론 공기나 전기처럼 물질인 것까지 모두 기라는 단어로 표현할 만큼 만물의 근원을 기라고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기를 이용한 무도인 기천문(氣天門)의 기본자세 중 하나


정신과 물질 모두에 작용

기는 우주의 삼계(三界, 心理生理物理)에 모두 적용되는 개념이다. 기는 단순히 심리적인 요소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인체의 생리적 측면에서도 영향을 미친다. 좋지 않은 소리를 듣고 기분이 나빠졌을 때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박동이 가빠지는 것은 심리와 생리 관계를 드러내주는 단적인 예다. 희노애락의 감정이 심장 위장 혈액 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이 부문은 서양의학에서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분야다. 모든 신경성질환이 그러한 예이며 '뇌와 마음'의 관계를 다루는 최근의 신경생리학은 바로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다. 물론 여기에서도 입장의 차이는 존재한다. 서양의학은 뇌의 사고나 마음의 작용이 신경전달물질에 의한 생화학적 작용이라는 환원주의적 입장을 견지한다. 전체를 항상 부분으로 환원하고 부분의 집합으로서 전체를 설명하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는 생리세계를 벗어나는 외부세계, 객관적인 형태로는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이 부분은 쉽게 증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명상법이나 기공 등이 자기훈련 또는 건강법으로서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은 기의 심리적 또는 생리적인 요소가 객관적인 효과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잘 훈련된 기 수련자는 기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으며 몸안의 기를 외부로 발산하기도 한다. 신경성질환 또한 심리나 생리적 변화가 객관적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기는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이며, 심리적이면서 생리적 또는 물리적인 생명체 특유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기는 몸과 마음을 일체로 파악하는 동양의 세계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의학의 입장 또한 이러한 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인간과 동물의 살아있는 신체에는 신경계나 혈관계처럼 경락(經絡)이라 불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가 깔려 있으며, 이 속을 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기는 일종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학의 신체관으로 보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경락과 같은 조직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몸을 해부해 확실히 눈에 보이는 것, 예를 들면 혈관계라든가 신경계 등과 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배척하는 것이 서양의학의 관점이다. 그러나 동양의학은 보이지 않는 신체의 시스템(경락)이 존재하고 이곳을 통해 기혈(氣血)이 흐르고 이 흐름의 이상에서 병의 원인을 찾는다. 전국시대 중국의 의사 편작이 바로 이러한 유체병리설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기혈(혈액과 기)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눈에 보이는 혈의 운동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기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황제내경' 영추편에는 "영기(營氣)는 혈맥 속을 밤낮없이 빙빙 돌고 있으며 이를 멈춘다거나 역행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수록돼 있다.
 

기를 느끼려면 스스로의 실천이 중요하다. 실천이란 몸과 마음을 사용한 수행이다.


이론보다는 실천

기를 이야기하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는 실천의 문제다. 서양에서는 '보이는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보이지 않는 신의 세계'에 접근할 수 없다. 그리스 신화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은 신들의 세계에 가까이 가려는 영웅들을 '오만죄'로 다스리고 있다.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에서는 인간은 육체에 사는 원죄 때문에 신과의 사이가 가로막힌 존재이다.

동양은 다르다. 인간의 몸은 바로 노자의 도(道)가 작용하는 용기이며, 그에 충실히 따름으로써 보이지 않는 세계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도교에서 말하는 선인(仙人)이라든가, 유교에서 말하는 성인(聖人)이라는 완성된 인격의 상태는 실천적인 노력을 통해 도달 가능한 존재이다.

자연은 객관적인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기 위한 무대다. 유교철학의 기본은 도덕과 정치의 실천활동이며, 도교는 자연을 정복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불교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넘어 깨달음에 이르는 실천의 노력을 중시한다.

기공(氣功)은 바로 이를 위한 수행법이며 불교의 수행 또한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훈련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기의 작용은 바라보고 생각함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느끼는 것이다. 실천이란 몸과 마음을 사용한 수행이다.
 

인체에는 보이지 않는 경락이 있으며 이곳을 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동양의학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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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김두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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