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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에너지 산업을 향해 치달아온 현대문명은 이제 갈림길에 섰다.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이 요구될까. 그 속에서 한국의 역할은 어떤 것이 될까.

청동기 시대에는 20세였다는 인간의 수명이 이젠 거뜬히 80-90세까지 늘어났다. 그런가 하면 온갖 기계 덕분에 너나 할 것 없이 노예 수십명을 부리듯 호사스럽게 살고 있다. 과학기술의 힘이 사회기반조차 변형시키다 보니, 기술은 '사회적 기술'로 자리한 지 오래고, 산업 생산고는 90% 이상이 기술혁신에 의존하게 되었다.

신의 세계였던 하늘나라는 20세기 후반 들어 인간의 거대한 실험장으로 바뀌었고, 마지막까지 신의 소관으로 남아 있던 생명현상마저 인간이 조작할 수 있는 단계(인간게놈계획)로 나아갔다.

미국에서는 50년대 말, 일본에서는 70년대 말에 정보산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여타 산업분야의 인력을 넘어섰다. 한국의 경우도 내년쯤엔 그런 양상을 띨 것이라 한다. 60년대 초 다니엘 벨의 예언대로, 우리 시대는 이미 컴퓨터와 전기통신기술의 결합에 의해 정보사회라는 새로운 문명형태로 진입했다.

한편 이데올로기로 갈렸던 세계 양대 진영의 구조가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어 홀연히 무너졌다. 그에 따라 명실공히 과학기술을 등에 업은 '총칼없는 전쟁'인 무한경쟁시대가 도래했다. 과학기술 개발환경의 격동기를 맞아 첨단과학기술 발전이 국가 발전의 운명을 거머쥔 막강한 요인으로 부상한 것이다.

선진국에는 정보고속도로가 깔리는가 하면 경이의 신소재, 청정 대체 에너지 등의 개발청사진이 나와 우리를 홀리기도 한다. 언젠가는 인간의 최고 욕망인 늙지 않고 병들지 않는 신통한 묘수도 나올 것 같다.

과학기술 발전의 필연성과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문득 '이것이 정녕 발전이란 말인가' 하는 회의가 고개를 드는 것이 사실이다.

유례없이 풍요로운 물질문명에 탐닉했으되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깨달음은 이미 60년대에 한바탕 바람을 몰고 왔다. 문명비판의 물결은 거기서 잠들지 않았다. 세상살이의 이쪽 환부가 좀 낫는가 하면 저쪽이 곪아 터지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관 모색의 틀

자원고갈과 수급 불균형, 환경오염과 생태계 훼손, 인구조절과 식량위기, 인간소외와 가치관 혼돈 등이 새로운 문제로 부상했다. 이 부정적 측면을 조율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미래가 또하나의 바벨탑이 되고 말 것이라는 우려는 단지 비관론자들의 기우만은 아닌 듯하다. 과학기술 발전이 무릇 시행착오식으로 전개됨을 부정할 수 없다면, 끊임없이 그 과정을 점검하는 작업은 문명존속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80년대 미국의 문명비평가인 리프킨은 현존 과학기술 문명에 깔린 '발전' 개념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 틀로서 엔트로피 법칙을 들고 나왔다. 그의 논의의 실마리는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난다.

"세상은 갈수록 혼돈의 와중으로 빠져들고 있다… 여기저기서 끝없는 수선과 짜집기의 연속이다.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사건이 터진다… 거기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몰아붙여 탓해 보아도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기만 한다… 정치권의 리더나 대단한 사상가라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붕괴로 몰고 가는 냉혹한 기운이 세계를 잠식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는 결국 현존하는 세계관에 대해 냉철하게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을 병들게 하고 그 속의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주범은 바로 우리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우리 산업사회를 위협하는 가시적·비가시적 오염의 재난은 좀 극적으로 말한다면 시대말의 위기상황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발전'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현대 산업사회를 주도했던 기술지향주의를 향한 줄기찬 행진에서 과연 인류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잃은 것이 무엇인가, 선진 산업사회의 모순은 무엇인가를 따져보노라면, 경제 에너지 제도 가치관 과학 교육 종교 군사 등 분야별 대차대조에서 이른바 '무한한 발전'의 허구성이 알몸으로 드러난다.

리프킨 방식 생태주의 시각의 분석은 물질주의의 긍정적 측면에만 혼을 팔아버린 듯했던 숱한 사람들에게 섬찟한 충격마저 던져준다. '지속가능한 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란 세상살이의 주어진 한계를 깨닫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준다.
 

미국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가 찍은 쿠웨이트 유정의 화재. 지상에서 에너지가 연소돼 궁중에 흩어지는 모습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과학사에서 엔트로피 법칙의 의미는 자연세계 변화의 방향성을 규정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엔트로피 법칙이 말하고 있는 줄거리는 이미 태고적부터 누구나 알고 있던 평범한 진리에 지나지 않았다.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저절로 거꾸로 솟아 올라가는 일은 없다는 정도의 너무도 당연한 진리를 단지 법칙으로 서술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개념의 명료화는 많은 과학자들을 혼동케 해, 엔트로피는 과학사상 가장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 개념이 되었다. 그리고 엔트로피 법칙은 그 출현과 함께 우주론에 연결돼 많은 과학자들이 엔트로피 법칙의 우주론적 결과로서 '열죽음(heat death)'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예컨대 엔트로피의 창안자인 클라우지우스는 '우주는 결국 사용가능한 에너지가 완전히 사용불가능한 형태로 바뀐 최대 엔트로피 상태에 이르러, 더 이상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정지라는 종말에 이를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 어느 곳에 질서가 더 생기는 것은 다른 곳에 그보다 더 큰 무질서가 생긴다는 것을 절대진리로 천명한다. 기계론적 세계관(mechanical philosophy)에서 이른바 발전에 의해 '더 질서있는' 물질적 환경을 만든다는 것은 동시에 다른 한편에 그보다 더 큰 무질서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자연세계에서의 인공적 변화란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불가능한 형태로 바꾸면서 주위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방향, 즉 값어치가 있는 상태에서 값어치가 없는 상태로의 한 방향으로 밖에는 일어날 수가 없음을 규정한다.

따라서 전지구가 경쟁적으로 벌이는 경제성장이란 결국 사용가능한 자원을 사용불가능한 쓰레기로 바꾸면서 엔트로피 증가를 가속시킴으로써 끝장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는 형상이 되고 만다.
 

정보화사회는 편리와 풍요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넘치는 정보는 사회적 엔트로피 증가를 낳고 있다.
 

고에너지 사회는 고엔트로피를 낳는다

'엔트로피' 식 논리전개에 깔려 있는 기본 주제는 에너지다. 기술결정론적 시각에서 비켜선다 하더라도, 인류사에서 에너지가 문명 형태를 결정짓는 주된 변수였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사회체제 변환도 자원 고갈 또는 풍요 정도와 밀접하게 얽혔던 측면이 강하다.

흔히 인간정신의 각성으로 암흑을 떨치고 근대화(과학화)로 넘어간 듯 묘사되는 서양중세(나무시대)로부터 근세(석탄시대)로의 이행에서도 에너지 기반 붕괴가 주요 동인이었음이 드러난다.

요컨대 역사를 통틀어 누적된 엔트로피 증가로 인해 주위 환경의 에너지원에 변화가 일어날 때 역사는 분수령에 이르렀고, 바로 그때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로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양식의 기술과 사회 경제 정치의 기간구조가 자리잡았다.

이 과정에서 사용가능한 자연계의 에너지양은 계속 줄어들었고, 산업 고도화에 따라 에너지 흐름이 촉진되면서 점점 복잡하고 비싼 기술 도입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각 엔트로피 분수령 사이 간격은 엄청나게 짧아졌다.

19세기 산업화 이래, 세계는 고속화 대형화 산업화 사회로 치달으며 고에너지 사회를 구가했던 반대급부로 고엔트로피의 거대한 분수령에 이르렀다. 수렵사회(수백만년)-농경사회(수천년)-근대산업사회(수백 년)를 거쳐, 이제 화석 연료의 고갈과 오염으로 인한 막다른 고비에서 새 시대는 산업후 사회(post industrial society)로 이행한 것이다.

인류 역사는 우리에게 어느 문명의 에너지 사용은 그것으로부터 발생되는 엔트로피를 배출할 수 있는 적절한 장치가 작동되고 있는 한에서 지속되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20조달러를 웃도는 화석연료 의존성 세계 경제가 가차없이 쏟아내는 오염은 실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더 이상의 시행착오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근년에 닥친 냉해와 혹서의 번갈음은 마치 자연의 복수인 듯하다.

환경오염은 자원고갈 위협보다 더 매섭게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우선 갖가지 국제 환경협약이 산업활동과 일상생활에 족쇄를 채우는 양상이다. 산업후 사회로의 또하나의 분수령에 선 지금, 인류 사회는 문명 존속을 원한다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키 위한 새로운 에너지 기술과 사회적 기간산업으로 옮아가야 할 상황에 몰리고 있다.

인위에서 자연으로

과연 새로운 에너지 기초 위에 재편성될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이라야 하는가. 문명이 야기하는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으로 밝혀져 있다. 인위적인 변화는 자연의 일부로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귀결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엔트로피 법칙은 동양의 전통적인 과학사상(예컨대 천인합일의 유기론적 세계관)과 만나게 된다. 엔트로피 개념이 제시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세계관은 과도한 물질주의를 철저히 배격한다. '어찌됐건 물질적 진보를 추구한다' 든가 '클수록 좋다'는 식의 고엔트로피 개념은 헛되고 덧없다.

에너지 전환의 분수령에서, 재생가능한 에너지의 몫은 더욱 커져야 하고, 저엔트로피 사회야말로 자원의 낭비와 오염을 줄일 수 있는 대안이라는 믿음이 체화되어야 한다.

서구 근대화가 17세기 근대과학 형성에서 비롯됐다면, 동양의 근대화는 서구 과학문명 도입에서 이룩된 것으로 요약된다. 그속에서 우리나라의 발전도 1960년대 이후 급진적 산업화로 선진국 발전모델을 옮겨다 놓는 것에서 이루어졌다. 보릿고개를 벗어나려는 본능적 욕구가 앞서는 상황에서 선진산업사회 모델 자체의 본질적 결함과 약점을 짚어볼 만한 여유는 당초 없었다.

한국의 70년대 산업구조조정은 중화학공업 집중육성으로 시도되었고 나름의 성과도 얻어졌다. 그러나 그러한 구조조정은 에너지 수급체계에 커다란 부담을 주었다. 전반적으로 70년대 이후 경제생활의 경이로운 변화에 따라 에너지 수급 곡선의 변화 양상 또한 경이로웠다.

이제 90년대 한국의 에너지 사정은 한바탕 고비에 맞닥뜨리고 있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5%(93년 현재)인 데다가 화석연료 의존도(93년 87%)가 다른 산업국가는 물론 세계평균치보다도 상당히 높다. 89년 이후 석유 소비 증가율은 세계 1위이다. 에너지 탄성치(에너지 소비증가/경제성장)가 계속 올라 90년대에는 1위 넘어섰다.

80년대 중반(원자력 발전의 확장기)에는 60%를 상회하던 발전 예비율이 90년대에는 10% 이하로 떨어졌고, 올해 여름의 혹서에는 마이너스를 향해 곤두박질하는 듯했다. 에너지 관련 국제환경규제의 태풍이 가시화된 시점에서 에너지 절감형으로의 산업구조 조정과 각 부문의 에너지 긴축 프로그램은 발등의 불로 떨어진 형국이다.

이제 전환기의 한 고비에서 물질적 발전의 허상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은 매우 긴박하고 절실한 과제다. 산업후사회로 이행함에 있어 현재의 숱한 낭비와 착오가 반드시 혹독하게 치뤄야 할 대가는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 등 선진국은 기술의 충격으로 사회를 엔지니어링하는 것에 의해 현대 산업사회를 탄생시켰다. 그 과정에서 방법과 가치에서 체계와 조종, 효율을 중시하는 새로운 기준을 확립시켰다. 기계화 체계화 산업화의 본고장인터라, 그들은 그 관성의 영향권에 묶여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산업후사회의 새로운 가치관은 산업사회의 그것과는 궤적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산업화의 본고장이 아닌 다른 문화권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점쳐진다. 그런 관점에서도 동양 문화권은 관심의 대상이 됨직하다.

한편 한국의 앞날에는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이라는 변수 외에도 '한반도 통일'이라는 또다른 변수가 개재하고 있다. 인간의 합리적 예상을 넘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큰 통일 변수까지 내포하여 해결방정식이 어떻게 찾아질 수 있을런지는 불투명하다. 어찌됐건 그 불확실성 속에서 이 시대 한국인의 사명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원자력은 고갈위기에 처한 화석연료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엔트로피 이론에 따르면 원자력 에너지는 더 많은 엔트로피 증가를 가져오게 된다. 사진은 그린피스가 벌이는 반원자력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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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김명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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