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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고대 4원소설에서 원자설 태어나기까지

물질의 기본개념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사색으로부터 출발한 물질에 대한 탐구는 연금술을 거쳐 근대에 들어 질량보전의 법칙이 설파되고 입자설 원자설을 지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우주에 합리성이 내재돼 있다고 믿고 이것을 발견하고자 했다. 우주의 조화와 형체의 완전함을 중시한 그는 지구가 불 흙 공기 물의 4원소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네 원소를 형체로 표시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불은 정4면체, 흙은 정6면체, 공기는 정8면체, 그리고 물은 정20면체에 해당된다. 불을 정사면체로 본 것은 정사면체가 정다면체 가운데 가장 예리한 각을 갖고 있고, 이것은 침투력이 강한 불의 속성을 반영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흙을 정육면체에 대응시킨 것은 흙이 네 원소 중에서 '가장 뒤집기 힘들고 단단한' 속성을 갖는 원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기와 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설명했다(그림1).

이와 함께 플라톤은 기하학적인 도형을 수로 바꾸어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불, 공기, 물은 한 면이 정삼각형으로 이루어진 정다면체다. 정삼각형을 같은 크기의 여섯개 직각삼각형으로 나눈 그는 각 도형속에 포함된 총직각삼각형을 세어서 이들 숫자 간의 상호 관계로부터 원소간의 상호 변화를 예측했다.


(그림1) 플라톤의 4원소


(1) 플라톤은 이러한 기하학ㅈ거인 도형의 수적 관계로부터 공기는 2개의 불로 바뀔수 있다고 보았다.
(2) 플라톤은 물이 2개의 공가와 1개의 불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관찰과 실험의 공헌자 연금술사

물론 플라톤의 기하학적인 우주관은 완전히 사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내용이야 어쨌든 중요한 것은 플라톤이 우주를 기하학적으로 생각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16세기에 시작된 천문학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원동력은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이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는 플라톤의 사고방식에 확신을 가졌으며, 이 믿음을 밀고간 결과 마침내 우주를 수학적으로 간단히 표현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4원소설을 그 자신의 경험적 세계관으로 새롭게 발전시킨다. 그는 4원소에 대응되는 추상학적인 기하학적 도형을 버리고 4원소가 갖는 기본적인 성질로서 온 냉 건 습을 들었다. 그는 기본 속성중 2가지의 조합에 의해 근본물질인 불(온+건), 공기(온+습), 물(냉+습), 흙(냉+건)이 생긴다고 보았다. 그리고 가능한 조합 중 온+건, 건+냉은 극과 극의 성질이므로 아무 것도 생길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한 원소가 성질의 조합 변화에 의해 다른 원소로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물질의 기본적인 4가지 속성은 변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했다.

물을 가열하면 수증기가 되고 그릇의 바닥에 물찌꺼기가 생기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관에 따라서 이 현상을 설명해보자(그림2).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관은 방식은 다르지만 원소간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중세 아랍의 연금술에 영향을 끼쳤다. 중세의 연금술은 여러가지 물질로부터 금을 얻으려는 다양한 시도를 말한다.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사변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는 동양의 아랍인들은 물질을 섞어서 가열하고 끓이고 태우고 녹이고 순수한 물질을 분류하기 위해 거르고 추출하고 증류했다. 이들은 금을 얻으려고 했으며 이들이 추구했던 연금술에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한 것은 고대 그리스의 사변적인 자연철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자신의 경험 속에서 물질을 불 공기 물 흙의 4원소로 나누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표면적으로 관찰하면 에너지를 대표하는 불과 물질의 세 가지 상태인 기체 액체 고체를 대표하는 공기 물 흙으로 물질을 분류하는 것은 실제 물질을 변화시켜서 물질의 화학적인 성질을 알게 된 이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림2)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
 

성질이 다른 물질을 원소로 보는 것은 잘못

관찰과 실험을 통해 아랍인들은 물질의 세가지 상태는 어느 물질에나 존재하는 공통된 성질이지만 자연에 존재하는 물질을 세가지 상태에 따라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았다. 같은 기체상태의 물질이라고 하지만 수은의 증기와 황의 증기는 전혀 다른 반응을 나타냈으며, 다른 상태의 물질이지만 고체인 황과 액체나 기체인 황은 같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인들의 4원소설 대신에 수은 황 소금의 3원소설을 채택하였다.

이 세가지 물질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물질의 화학적 성질을 대변한다. 자연계의 원소는 화학적 성질에 따라 크게 금속과 비금속으로 나눌 수 있다. 연금술사들은 수은은 금속을 대표하고 황은 비금속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술만으로는 분리가 불가능했던 소금과 같은 염을 원소에 추가한 것이다. 물질의 이러한 분류는 상당한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수은 황 소금은 물질의 화학적 성질에 따른 구별일 뿐이며 자연계의 물질이 세가지의 원소로 구성돼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물질의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원인을 4가지의 기본성질로 파악하고 있던데 반해 당시 자연 철학자의 한사람인 데모크리토스는 원자가 근본적이며, 공간 중 원자의 운동에 의해 색 냄새 맛, 그리고 차갑고 뜨거움을 경험할 수 있는 성질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실험적인 증거를 갖추지 못했고 극단적으로 우정 정의 용기 사랑 등도 원자의 조합 분해 운동 등으로 설명하려는 무모함 때문에 당시에는 호응을 얻을 수 없었다.

근대 과학자인 보일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보일은 입자설이라고 했다)을 다시 제기했다. 그는 물질의 상태가 변해도 변하지 않고 물질이 반응을 일으켜도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성질은 질량이라고 생각했다. 입자론적인 사고를 갖고 있던 보일은 특정 질량을 갖는 물질의 최소 단위가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은 기본단위의 작은 입자들이 합쳐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보일이 살았던 시기까지 많은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의 4원소설이나 연금술사의 3원소설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보일은 이들의 생각과 싸워야 했고,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점차로 확신하게 됐다.

보일의 논리는 정연하였다. 그는 고대의 원자론자와는 달리 그 자신의 입자설을 뒷받침할 실험적인 증거를 준비해 나갔다. 그는 기체의 압축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지팡이 모양의 관에 수은을 넣고 공기를 외부와 차단시킨후에 압축시켜 나갔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서 압축시키는 압력과 밀폐된 공기의 부피사이에 일정한 수학적 관계성을 발견했다. 즉 밀폐된 공기의 부피는 가해준 압력을 1, 2, 3배로 증가시킬수록 1, 2분의 1, 3분의 1배로 감소했다. 이를 수식으로 표시하면 P(압력) × V(부피) = K(일정한 상수)가 된다.

보일은 이 규칙적인 변화를 자신의 입자설로 설명했다.

"기체상태의 입자들은 넓은 공간 속에서 운동하고 있다. 운동하는 입자들은 서로 충돌하고 그 충돌에 의해 일정한 공간을 확보한다. 입자들이 충돌하는 힘보다 큰 압력이 외부에서 작용하면 입자들 사이의 간격은 좁아진다. 그러나 간격이 좁은 상태에서 입자들 사이의 충돌 횟수가 증가하므로 입자들의 간격이 계속해서 좁아지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간격이 되면 입자들이 충돌하는 것에 의해 외부의 벽에 작용하는 압력과 외부에서 작용하는 압력이 같아진다. 두 압력이 같아지는 지점에서 기체의 부피가 일정해진다. 외부의 압력이 또다시 증가하면 마찬가지 방식으로 기체의 부피가 감소하게 된다. 따라서 외부에서 기체에 작용하는 압력과 내부의 공기입자들이 운동에 의해 외부의 벽과 충돌하는 압력의 상호작용에 의해 기체의 부피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기체의 부피가 외부의 압력과 일정한 수학적인 반비례 관계에 있는 것은 이와같이 공기 입자의 운동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불행한 과학자의 위대한 업적

물질의 보편적인 성질이 질량이라는 사실을 토대로 물질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인 질량보존의 법칙을 세운 사람은 프랑스 과학자 라부아지에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과학자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장인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된 과학자로도 유명하다.

물을 가열하면 찌꺼기가 생긴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앞에서 살펴본 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4원소설로 물질의 변화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반응 전후에 물질의 질량을 측정하는 방법을 통해 같은 현상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저울로 질량을 측정할 수 있을 정도의 많은 양의 찌꺼기를 얻기 위해 오랫동안 물을 끓였다. 그는 자신이 특별히 고안한 유리 기구에 물을 넣어 입구를 봉한 다음에 1백일간 가열하였다.

그 결과 물 바닥에 많은 양의 앙금이 생성됐다. 가열 전과 가열 후의 물의 질량을 측정한 결과 물의 질량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라부아지에는 "물의 질량에 변함이 없음으로 물은 변화하지 않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물과 불이 반응해 공기와 흙이 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이 잘못됐음을 간결하게 설명한 셈이다.

그러면 물 바닥에 생긴 앙금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질량측정을 이용했다. 그는 앙금의 질량을 측정하고 가열 전 후의 유리 기구의 질량을 측정했다. 그 결과 앙금의 질량은 가열 전후의 감소한 유리 기구의 질량과 같았다. 이 결과에 대해 라부아지에는 "유리 기구의 감소한 질량이 앙금의 질량과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가열에 의해 유리기구의 성분이 녹아 나왔다고 보아야 한다"라고 해석했다.

그는 물질의 변화를 질량의 측정에 근거해 설명하는 접근 방법(정량적 접근법)을 이용해 그 당시 연금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잘못된 연소이론을 타파했고 실험에 의해 원소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당시의 많은 실험 과학자들은 물질의 연소 현상을 플로기스톤설로 설명했다. 플로지스톤설에 따르면 물질에 플로기스톤이 들어 있어서 물질을 태울 때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간다고 보았다. 종이 황 인 등에는 플로지스톤이 많이 들어 있어서 이들이 연소할 때 많은 양의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며 모래 및 돌 등에는 플로지스톤이 거의 없어서 잘 타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들은 처음에 종이나 나무가 타서 재가 되면 질량이 작아지는 점을 예로 들어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간 결과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후 금속을 태우고 남는 재는 질량이 증가하는 결과를 보이자 플로지스톤 중에는 음(-)의 질량을 갖는 경우도 있다는 식의 궁색한 설명을 했다. 이를 반응식으로 쓰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것이다.


반응식
 

라부아지에는 종이와 금속의 연소가 같은 현상이며 따라서 일관된 방식으로 설명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밀폐된 그릇 속에서 연소를 일으켰다. 그 결과 연소가 진행되기 전이나 후나 밀폐된 그릇속 물질의 질량은 변하지 않은 채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했다. 밀폐된 그릇 속에서 금속을 연소시켰을 경우 금속의 질량은 증가하지만 증가한 만큼 공기의 질량은 감소했다. 이 사실은 라부아지에를 고무시켰다. "공기 중의 한 성분이 물질의 연소에 관여하고 있음이 분명해!" 라부아지에는 연소에 관여하는 이 공기의 한 성분을 순수하게 모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에게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준 사람은 플로지스톤설 신봉자의 한 사람인 프리스틀리였다. 수은을 가열하면 붉은 색의 산화물(HgO)이 된다. 프리스틀리는 이 물질을 밀폐된 수은 수조에 넣고 바깥에서 햇빛을 렌즈로 모아서 가열했다. 그 결과 산화수은은 수은이 되고 공기의 부피는 증가했다(그림3).

라부아지에는 산화수은을 렌즈로 가열한 결과 발생한 물질이 자신이 찾고 있던 바로 그 물질이라고 생각했다. 라부아지에는 수은을 자신이 만든 장치에 넣고 가열해 붉은 색의 산화수은을 얻고, 다시 렌즈로 가열해 산화수은을 수은으로 환원시켰다. 라부아지에는 수은을 산화시키는데 사용한 기체의 질량과 이 산화수은으로부터 얻어낸 기체의 질량이 같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입증했다. 그는 이 기체를 '산소'라고 이름붙였다. 라부아지에의 발견에 의하면 연소 반응을 다음과 같은 식으로 쓸 수 있다.


반응식
 

(그림3) 프리스틀리의 수은가열장치
 

물질의 본성을 설명하는 강력한 무기

보일의 입자설은 돌턴에 이르러 원자설로 발전한다. 돌턴은 물질의 질량은 기본 단위의 정수배로 밖에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가령 X라고 하는 불가분의 순수한 원소에 대해 생각해 보자. 돌턴은 순수한 원소는 같은 질량을 갖는 한가지의 원자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X원소를 구성하는 원자의 질량이 1이라고 한다면 원소 X의 질량은 1, 2, 3, 4, 5 …, 10, 11 등의 정수로 표시될 것이다. 이 경우 원소(홑원소 물질)에 포함돼 있는 원자의 수는 1개, 2개, 3개, 4개, 5개, …, 10개, 11개 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X원소를 구성하는 원자의 질량이 0.13이라고 하면 원소 X의 질량은 원소를 구성하는 원자수에 따라서 0.13의 정수배로 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돌턴은 이러한 발상에 근거해 원자의 고유한 질량의 결정에 관심을 가지고 탐구해 나갔다. 물론 원자의 크기는 매우 작으므로 저울로 직접 달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돌턴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원자량을 결정해 나간다. 그의 탐구에는 몇가지의 가설이 있었다.

가설1 : 같은 원소의 원자는 질량이 같고, 다른 원소의 원자는 질량이 다르다.

가설2 : 수소 원자의 질량을 1로 하여 원자의 질량을 상대적인 수치로 결정한다.

가설3 : 대개 화합물의 기본 단위(분자)는 구성원자들이 1 : 1의 단순한 비율로 결합한다.

산소의 원자량 결정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산소의 원자량 결정에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인 물을 이용했다. 그 당시 베르셀리우스와 같은 실험과학자들의 실험값으로부터 물을 구성하는 수소 : 산소 원소의 질량비가 1 : 8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돌턴의 '가설3'에 따르면 물의 화학식은 HO다(H : 수소, O : 산소). 따라서 수소원자의 질량을 1이라고 보면 산소원자의 질량은 8이 된다.

물론 이 후에 돌턴의 가설이 잘못된 점이 발견되고 물의 화학식이 HO가 아닌 ${H}_{2}$O라는 것이 알려져서 산소의 원자량은 16으로 고쳐졌다. 그러나 돌턴의 원자 질량 측정은 이제가지의 원자의 존재에 대한 논의를 한 차원 높인 것이다. 그리고 돌턴의 원자설은 이 이후 물질의 본성과 물질의 변화를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됐다.

주사위를 던지면 어떤 숫자가 나올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따라서 '주사위를 던지면 반드시 1이 나온다'는 말은 거짓이다. 이말을 맞게 고치면 '주사위를 던져서 1이 나올 확률은 6분의 1이다'라고 말해야 될 것이다.

원자 내의 전자 위치를 결정하던 과학자들은 한때 '주사위 던지기'와 같은 문제에 빠졌다. 20세기가 시작되기 3년 전 톰슨은 원자 내부에 전자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이후 20세기 초반의 과학자들은 전자가 원자 내의 어느 위치에 있는 지를 밝혀내기 위한 문제에 매달렸다. 그들은 당연히 '전자는 핵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떨어진 공간에서 정확히 발견된다'는 식의 결론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최종적으로 "전자는 핵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있는 공간에서 발견될 확률이 ~이다"라는 결론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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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서인호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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