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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대 로켓의 시조 V-2와 그 후예들

인류가 만든 로켓중에서 V-2로켓처럼 전세계의 우주개발로켓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도 없다.

로켓의 역사는 우리의 생각보다 무척 오래됐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1232년 중국에서 사용한 비화창(나는 불창)이 가장 오래된 로켓이다. 비화창은 징기스칸의 셋째 아들인 오가다이 왕자가 금나라의 수도인 변경을 쳐들어 갔을 때 변경의 수비군들이 사용한 신무기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비화창은 발사하면 2백m 정도 날아가 떨어져 사방 6~7m 정도를 불바다로 만든 위력적인 것이었다. 비화창 때문에 징기스칸 군대는 변경성을 공략하는데 무척 고생을 많이 했다. 그 이후 몽고군은 세계 각국을 침공할 때 이 로켓 신무기를 이용하여 큰 성과를 얻었고, 이것이 또한 중국의 로켓을 전세계에 전파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미국 우주로켓센터에 전시돼 있는 V2로켓 모형
 

우리나라 로켓 주화와 신기전

중국의 로켓은 징기스칸에 의해 아라비아 인도 유럽 등 세계 각국에 알려져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했으면 1377년경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최무선에 의해 주화(달리는 불)라는 이름의 한국 최초 로켓이 만들어져 노략질하는 왜구들에게 사용했다.

고려말에 처음 만들어진 '주화'는 이후 조선 세종 때인 1448년 개량된 후 귀신같은 기계화살이라는 듯인 '신기전'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 종류도 소·중·대신기전으로 많아졌다.

소·중·대신기전의 구조와 크기는 '국조오례서례' 병기도설에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은 아마도 현재까지 남아있는 옛 로켓 중에서, 복원할 수 있을 정도로 가장 자세하며 오래된 것이다.

이들 로켓 중에서 93 대전 EXPO를 맞이하여 복원된 소·중신기전은 문종 때인 1451년 문종왕에 의해 개발된 화차에서 동시에 1백발씩 발사된 아주 훌륭하고 과학적인 로켓으로 평가된다. 화차 또한 복원돼 소·중신기전 발사시험에 사용되었다.

소신기전의 크기는 전체 길이가 1.2m 정도로 화살의 앞부분에 흑색화약이 채워진 종이로 만든 로켓모터가 부착되어 있다. 로켓모터에 점화선을 통해 불을 붙여주면 화약이 타면서 연소가스를 뒤로 분출하며 앞으로 날아간다. 중신기전은 전체 길이가 1.4m 정도의 크기인데 그 구조는 소신기전과 마찬가지다. 비행거리는 소신기전이 1백50m 정도이며, 중신기전이 2백m 정도다.

길이가 6m이며 비행거리가 1km 이상인 대신기전의 복원은 아직도 완성되지 못했다. 지금부터 6백여년 전에 우리 할아버지들이 만든 옛 로켓이지만, 당시의 제조기술이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아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이 있기 때문에다. 또한 이는 우리의 옛 로켓이 얼마나 과학적으로 제조되었는가를 잘 증명해준다.

콩그레브를 탄생시킨 아리로켓

인도에 있는 마이소르국의 하이더 아리 왕은, 1750년대 후기에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중국의 로켓인 화전을 개량해 성능이 좀 더 나은 신무기를 개발했다. 1760년 영국군이 마이소르 국을 쳐들어 왔을 때, 마이소르 국의 로켓 부대는 물밀듯이 쳐들어 오는 영국군들의 기마병들에게 많은 로켓 폭탄을 선사하여 세링가파담 전투에서 이들을 격퇴시켰다.

인도군이 사용한 아리의 로켓은 지름5cm, 길이20cm, 무게 4.1kg의 원통형 철제 로켓인데, 이 로켓의 사정거리는 1천5백m로 당시에 존재했던 무기 중에서는 고성능이었다. 따라서 영국군이 공포에 질려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인도의 마이소르군은 로켓 무기를 이용해 분투함으로써 영국군의 기마대를 대혼란에 빠뜨렸으나, 장기전을 펼치는 영국군에게 결국은 손을 들었다. 당시에 영국군 포병 대령으로 이 전투에 참가했던 윌리엄 콩브레브는 전투중에 겪었던 쓰디쓴 경험 때문에 로켓 무기를 개발하기로 결심하고 곧 연구에 착수했다.

콩그레브는 우선 '모방이 창조'라는 옛말에 따라, 인도군이 사용했던 로켓들을 수집한 뒤 외피를 모방하고 추진제를 개량해 좀 더 성능이 좋은 로켓을 만들었는데, 로켓에 자기의 이름을 붙여 콩그레브 로켓이라 불렀다.

콩그레브 로켓은 인도의 아리 로켓과 마찬가지로 똑바르게 날아가게 하기 위해 안정 막대를 달았고, 로켓 앞부분에 폭발 위력을 크게 하기 위해 고성능의 폭탄을 장치했다. 이 로켓의 평균 길이는 1m, 평균 지름은 10cm, 무게는 1-2.8kg으로 우리 나라의 대신기전보다는 작은 규모였으며, 최대 사정거리는 2천-2천7백m에 달했다.

영국에서는 콩그레브 로켓을 발사할 수 있는 구조의 군함을 여러 척 만들었다. 이것이 아마도 본격적인 미사일함(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군함)의 시초일 것이다.

1805년과 1806년 영국 해군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가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던 부로뉴 항구에 먼저 쳐들어가 1천 2백발 이상의 콩그레브 로켓으로 공격을 가해 프랑스군에 막대한 손해를 입히고 돌아왔고, 다음 해인 1807년에 2만5천발의 콩그로브 로켓으로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 시를 폭격하여 온 시내를 불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1809년 영국 육군은 콩그레브 로켓을 이용해 프랑스 군대를 공격하기도 했다.

한편 1865년 페루의 기술자인 페드로 파울레트는 연료로 가솔린을 사용하고 산화제로 과산화질소(N${O}_{2}$)를 사용한 액체 추진제 로켓 엔진을 만들고 추력 실험을 하여 90kg의 추력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지상에서 추력의 크기를 알아 보기 위한 세계 최초의 연구용 액체 추진제 로켓 엔진이다.
 

옛소련의 대표적인 로켓 소유즈
 

우박 제거하는데 사용된 과학로켓

터키의 육군 포병학교 교관으로 있었던 독일인 R. 베아우르는 아주 일찍부터 과학관측 로켓을 제작했다. 그가 개발한 로켓은 앞부분에 폭발 화약을 싣고 높이 9백14m까지 상승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종류의 로켓은 1905년까지 여러 번에 걸쳐 실험되었다. 그는 응용 로켓을 발사해서 우박 구름을 분열시켜 비구름으로, 또는 보통 구름으로 바꾸려고 하였고, 그가 발사한 것 중 몇개는 성공한 것도 있었다.

그가 제작한 초기 로켓은 지름 3.8cm, 길이 35.5cm였는데, 구름이 있는 2백74m까지 상승해 그곳에서 로켓의 머리 부분에 있는 56.8g의 화약을 폭발시키게 하였다. 1907년 베아우르는 그가 연구한 것을 책으로 출판했고, 유럽의 여러 나라, 특히 스위스는 그의 실험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왜냐하면 우박 구름을 분열시키면 우박에 의한 농작물의 피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박 제거용 로켓을 생산하던 베른(스위스의 수도)에서는 꽃불 제작 공장이 가업화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우박 제거용 로켓을 생산했다. 우박 제거용 로켓은 우박 구름 내부로 들어가 그 속에서 폭발을 일으켜 우박을 눈으로 바꾸어 주었다. 물론 눈을 비로 바꾸어 주기도 하였다. 이런 종류의 로켓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유럽에서 계속 실험됐다.

같은 시대에 로켓을 이용해서 군대를 사진 정찰하는 방법을 개발한 사람이 있었다. 독일 중부 드레스덴에서 기술자로 있던 엘프레데 마우엘이다. 그는 1904년 카메라를 실은 고체 추진제 로켓을 발사해서 2백74m ~ 3백4m까지 상승시킨 후 그 지역의 사진을 찍는데 성공했다. 8년 동안 정성을 쏟아 연구 제작한 이 로켓의 구조는 로켓의 중앙에 기다란 안정용 나무를 단 것이었다. 그의 초기 로켓에는 가로 세로 1.1cm짜리의 작은 필름이 들어 있는 카메라를 달고 있었다.

1912년에 발사된 마우엘의 사진 촬영용 로켓은 9m짜리 안정막대를 달았고 총무게는 42kg이었다. 이 로켓은 6백10m를 상승하여 가로 세로 1.6cm짜리 필름이 든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낙하산을 이용, 사뿐히 땅에 내려왔다.

로켓의 아버지 고다드

고다드 박사에게 '로켓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생긴 것은 그가 액체 추진제 로켓을 연구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또 그의 연구가 미국의 우주 개발에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고다드박사는 1920년부터 액체 추진제 로켓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고체 추진제 로켓은 짧은 거리를 비행하는데는 훌륭한 것이지만, 대형로켓을 만들기에는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1925년 12월 어느날 고다드가 만든 5.5kg 로켓이 시험대로부터 2.7초 동안 올라갔다. 이것이 자체의 무게를 하늘로 올려보낸 최초의 액체 추진제 로켓이었지만 공식적인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몇달 뒤인 1926년 3월16일 미국 남부의 사막 지대인 뉴멕시코주의 노즈웰에 있는 에덴계곡에 실험실과 로켓발사장이 세워졌다. 1930년 12월 30일 뉴멕시코에서의 첫번째 발사 실험에서는 무게 2.3kg, 지름 14.7cm의 엔진을 단 길이 3.35m의 로켓이 사용됐는데 실험 기구까지 실은 후의 무게는 15kg이었다. 이 로켓은 8m의 발사대를 떠나 총 20초간 비행으로 6백9m까지 상승했으며, 최고 속도는 시속 8백km였다.

고다드 박사의 액체 추진제 로켓은 혼자서 개발하는데도 불구하고 완벽한 로켓이 되어 갔다. 1935년 10월 14일에 발사된 '완벽한' 로켓은 길이 4.6m, 무게 39kg이었다. 이 로켓은 최고 2천2백86m까지 상승하였으며,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비행하는 기록을 세웠다. 1937년 3월 26일에는 같은 로켓을 이용하여 2천5백90m까지 상승시키는데 성공했다.

1940년 8월 9일 고다드박사는 그가 지금까지 만든 로켓 중 제일 큰 것을 제작해서 성공리에 발사했는데, 로켓의 길이는 6.7m이고, 전체의 무게는 3백34kg이었다. 연료의 무게만도 전체 무게의 68%를 차지하는 2백27kg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5년 3월 그는 독일의 V-2 로켓을 볼 기회를 가졌는데, "이 로켓은 내 로켓보다 조금 더 클 뿐 모든 원리는 같다"고 말했다.

현대로켓의 시조 V-2

V-2 로켓.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로켓 중 V-2 로켓만큼 유명하고, 전세계의 우주로켓개발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도 없을 것이다.

V-2 로켓은 1932년 11월 1일 발족된 독일 육군 로켓 연구소에서 10여년의 개발 끝에 완성시킨 현대 로켓의 시조인 것이다. 독일 육군 로켓 연구소에서는 폰브라운 박사와 리델 등 10여명의 기술자와 공학자들이 1933년부터 로켓의 연구개발을 시작했다. A-1 A-2 A-3 A-5 로켓에 이어 1940년부터 A-4, 즉 V-2 로켓의 개발에 착수, 1942년 10월 3일 개발을 완료하고 첫 발사에 성공했다. 3년여의 개발 기간 중에 6만5천번이나 설계도를 수정할 정도로 많은 시험을 하였으며, 개발도중 폭발사고로 많은 과학자들이 죽기도 했다.

V-2 로켓은 전체 길이 14m, 몸통의 최대 지름 1.65m, 발사대의 최대무게 13t, 추력은 25t, 최대 비행거리는 3백20km, 최대 상승고도 80~90km이다. 구조는 크게 4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위에서부터 탄두(폭탄) 유도부분 추진제통 그리고 로켓엔진으로 구성된다.

탄두에는 1t 무게의 고성능 폭탄을 실을 수 있으며, 유도부분에는 유도장치가 들어있는데, 자이로스코프와 자동조종장치 및 무선 송수신 장치로 구성돼 있다. 가장 큰 부분인 추진제통은 윗부분이 에틸알코올을 4t 정도 채울 수 있는 연료통이고 그 아래에는 액체산소 5t을 넣을 수 있는 산화제통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엔진은 연소실 위에 터보펌프가 부착된 형태로 65초 동안 25t의 추력을 발생할 수 있는 강력한 것이다.

지금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스커드 로켓의 추력이 13t 정도인 것과 비교하여 보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의 V-2 로켓과 그 기술은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중국 등에 전파돼 각국의 미사일 개발과 우주개발용 로켓개발의 모체가 됐다.

V-2 로켓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세계 어느 나라의 로켓보다도 월등히 발전된 것이기 때문에 전쟁 이후 선진국들은 이 분야의 기술 입수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독일의 로켓 과학자들과 관련된 자료와 로켓부품을 획득하기 위한 '페이퍼 클립' 작전을 세웠다. 이 작전을 통해 V-2 로켓의 많은 부품과 자료 그리고 1백20여명의 관련 과학자를 얻었고 이들은 후에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을 발사한 레드스톤(Redstone)이라는 로켓과 인간을 달에 보낼 때 사용한 길이 1백11m의 새턴5형 로켓을 개발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러시아는 미국보다 조금 늦게 독일 로켓 연구소 및 공장에 도착해 미국 다음으로 V-2 로켓에 관련된 자료와 부품 및 기술자들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로켓을 개발, 1957년 10월 4일 발사했다.

한편 V-2 로켓의 공격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영국은 V-2 로켓을 입수해 블랙 나이트(Black Knight) 로켓을 개발, 오스트레일리아의 우메라 로켓시험장에서 발사시험을 했다. 전체 길이는 10.66m, 몸통의 지름은 0.9m였다. 블랙나이트는 4개의 감마 엔진을 사용하였는데, 추력은 모두 9.4t 이었다. 발사 시험에서 4백80km 정도를 비행했다.

영국에서 블랙나이트의 뒤를 이어 개발한 로켓이 블루스트리크(Blue Streak)이다. 길이는 18.7m, 최대지름은 3m인 이 2단 로켓은 1960년 4월 13일의 발사시험에서 4천4백80km를 비행했다. 그리고 블루스트리크 로켓을 기초로 해 1971년 10월 28일 영국의 첫 인공위성인 프로스페로(Prospero)를 발사한 블랙 애로우(Black Arrow)로켓을 개발했다.

프랑스에서는 영국보다 먼저 V-2를 이용한 로켓개발에 나섰다. 1949년 봄부터 베로니크(Veronique) 로켓을 개발하기 시작, 1950년 8월 2일에 발사에 성공했다. 첫발사 시험에서는 개발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실망할 정도인 3m를 상승하는데 그치고 말았지만, 개량을 거듭한 후에는 3백km이상까지 상승했다. 베로니크 로켓은 길이 5.8m, 지름 55cm, 발사시 무게 1천20kg, 추력 4t이었다.

베로니크 로켓 개발에 성공한 프랑스는 이 기술을 이용해 인공위성 발사 로켓인 디아망(Diamant)을 개발했다. 디아망 로켓은 높이 23m, 최대지름 1.4의 3단 로켓이었다. 1단과 2단 로켓은 액체 추진제 로켓이고 3단 로켓은 고체 추진제 로켓. 발사할 때의 로켓 무게는 18.4t이고 추력은 30t이였다. 프랑스는 디아망 로켓을 이용, 1965년 11월 26일 A-1 인공위성의 발사에 성공하였다.

중국은 러시아와 미국으로부터 로켓에 관련된 기술 및 자료를 모아 로켓의 개발을 시작했다. 러시아는 독일의 V-2 로켓을 조금 개량한 R-2 로켓을 중국에 제공했고, 미국은 로켓개발인력을 제공했다. 미국에서 초창기 로켓 개발에 참여했고 후에 독일에서 미국으로 V-2 로켓기술을 가져올 때 책임자로 있었던 전학삼박사가 중국 로켓개발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전학삼 박사가 주축이 된 중국은 1960년경에 V-2 로켓과 비슷한 형태의 로켓 발사에 성공하고 1970년 4월에는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인 동방홍 1호를 발사한 장정 1호 로켓을 개발하는데 성공하였다.

지금까지 자국의 인공위성을 자국의 로켓으로 발사한 나라 중 일본과 인도, 그리고 이스라엘을 제외한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중국 등은 모두 독일의 V-2 로켓 기술을 바탕으로 개발한 로켓으로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현재 북한이 갖고 있는 노동 1호 역시 독일의 V-2 로켓을 할아버지로 한 같은 족보에 속해 있는 것만 보아도 V-2 로켓이 전세계의 로켓개발에 미친 영향을 잘 알 수 있다.
 

프랑스의 베로니크로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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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채연석 연구그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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