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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세포 몽땅 갈아끼워도 인격체에는 변동이 없을까?

(1) 알쏭달쏭한 몸과 마음의 관계

어떻게 비물질인 마음이 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또 물질인 뇌가 어떻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일까. 뇌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오늘도 여러 분야에서 지속되고 있다.

혹시 '유령의 팔'(Phantom limb)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것은 새로 개봉된 공포영화의 제목이 아니라 병원에서 특정 환자들이 간혹 경험하는 증상이다. 즉 교통사고나 전쟁에서의 부상으로 한쪽 팔을 잃은 사람들이 마치 팔이 다시 붙어있는 것과 같은 감각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이 환각 현상은 대단히 섬세하고 사실적이어서 어떤 때는 손가락들이 주먹을 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날은 손바닥을 펼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심지어는 손등에 벌레가 한마리 기어가는 것과 같은 간지러움까지도 경험한다.

이에 반하여 '편측무시'(hemineglect)라는 매우 생소하게 들리는 증상이 있는데, 이것은 흔히 뇌졸중으로 혈관이 막혀서 왼팔의 중추를 담당하는 오른쪽 뇌의 두정엽이라는 부위가 손상되었을 때, 왼팔이 멀쩡하게 붙어 있고 피도 잘 통하는데도 불구하고 환자 자신은 그 팔이 자기팔이 아니라고 하고, 왜 병원에 왔느냐고 물으면 아파서 오기는 왔는데 어디가 아픈지 잘 모르겠다는 식의 황당스런 대답으로 얼버무리려는 행동장애를 말한다.

이 두가지의 대조적인 신경증상은, 실제 팔이 없어지더라도 신경중추가 남아 있으면 보이지도 않는 팔의 존재가 유지되며, 반대로 신경의 중추가 없어지면 말초 조직의 존재에 대한 개념조차 소실된다는 생리학적 사실을 잘 나타내준다.

우리의 삶은 뇌안에서 전개된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몸밖에서 일어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머리 속 뇌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과 의부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무런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히 실감되는 까닭은, 지금 이 순간 나의 뇌가 살아있고, 나와 외부 세계의 모습과 관념들이 영화 스크린처럼 뇌속에 투영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내가 생생한 현실을 체험하는 것은, 나의 뇌속에 일어나는 현상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지 반드시 실제세계의 존재여부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요즈음 내가 우울한 것은 그동안 투자해 둔 주식값이 갑자기 폭락해서가 아니라 나의 뇌속에 카테콜라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감소하여 뇌가 작동하는 균형점이 바뀌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느끼는 모든 현실은 세계의 참된 모습이 아니며, 그래서 삶의 모든 언어와 표현들은 순간순간 뇌에서 벌어지는 생물학적 과정에 대한 과학적 서술로 환원 및 소거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심리철학에서는 소거적 유물론(Eilminative Materialism)이라 부른다.

전통적으로 인간의 정신은 육체와는 구분되는 독특한 속성과 존재양식을 갖는 실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는데, 이를 이원론(Dualism)이라 하고, 이에 반하여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이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뇌라는 물질적 과정의 한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일원론(Monism) 또는 유물론(Materialism)이라 한다. 소거적 유물론은 일원론의 세부 이론의 하나로서 점차 그 세력을 확보해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전문적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나름대로 이원론과 일원론 중 하나를 선택해 살고 있다.

사실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별로 상식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정신이나 성격이 뇌로부터 나온다는 점은 모두 다 인정하는 사실이며, 최근 사망의 기준도 '뇌사'의 개념으로 다시 정의되고 있다. 뇌가 완전히 파괴되면 우리는 사랑하는 이에게 나의 가장 소중한 것으로 바치겠다고 맹세하던 '하트(heart)'가 아무리 잘 뛰고 있다고 하여도,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뇌라는 두 근이 조금 넘는 무게의 물렁물렁한 회백색 덩어리에서 마음이 생겨나는 것일까? 사람에는 수많은 종류의 세포들이 있는데, 이들은 발생학적으로 하나의 세포가 분할 증식하여 생겨난 것으로 유전자의 지시를 받아 고유의 특성을 발휘하도록 분화되었으며, 이 세포들의 특성에 따라 모양과 기능이 다른 기관들이 형성된다.

위장관에서는 소화 흡수가 일어나며 간에서는 해독작용이 일어난다. 뇌 역시 신경세포들이 모여서 생긴 기관이므로, 마음이란 이 기관에 맞겨진 생리 기능이라고 설명하면 매우 그럴 듯하고 이해하기 쉬운 이론처럼 들린다. 즉 소화나 해독같은 현상은 어떤 독립적인 현상이 아니고 물리법칙하에서 진행되는 일련의 물질상호 변동을 추상화하여 명명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마음이나 정신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받아들여야하며, 무언가 독특하고 신비로운 어떤 것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마치 시냇물이 흘러가면 졸졸 소리가 나고 자동차 엔진이 돌다보면 열이 발생하는 것처럼 마음이란 신경세포들이 작동할 때 생겨나는 부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을 부수현상론(Epilphenomenalism)이라 하는데, 일원론의 테두리 안에서 마음의 형성 기전을 설명하려는 한 시도이다.

그런데 요즈음 의학기술의 발달로 신장 심장 췌장 간 등의 장기이식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뇌의 특정 부위에 질병이 있을 때 건강한 뇌조직을 옮겨 심어서 병을 치료하려는 신경이식술이 시도되어 그 가능성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미래의 어느날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뇌가 심하게 손상되어 스스로 회복될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 있다고 하자. 나를 살리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신경세포를 추출하여 시험관에서 급속도로 배양 증식시켜서 손상된 뇌의 구조를 똑같이 재구성한 다음 나의 머리를 열고 이식시켰다고 하자. 아마 나는 드디어 눈을 뜨고 의식을 되찾아 말도 하고 걸어다니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교통사고 이전의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처럼 한 사람의 정신작용은 그 사람에게만 발현되는 일회적인 현상이 아니고, 마치 고장난 컴퓨터의 보드를 갈아끼우면 다시 정상작동이 가능한 것처럼, 뇌의 구성요소의 적절한 물리적 조합에 의하여 얼마든지 재현 복제 될 수 있다는 일원론의 한 주장을 기능주의(Functionalism)라 한다.

그러나 이 뇌이식 수술의 성공여부는 내 주위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고 오로지 나 혼자만이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수술이 성공하였다면 나는 자신의 정신적 실체가 완벽히 회복되어 예전의 속마음 모두를 그대로 느끼고 있을 것이고, 혹시 반쯤 성공하였다면 그것은 다리가 절단된 후 의족을 낀 것처럼 내가 겉으로는 기능은 발휘하지만 속마음은 반밖에 회복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는 아직도 남아 있다. 즉 뇌이식과 함께 나에게 신경세포를 기증한 사람의 인격이 스며 들어와 내 마음 속에는 두 사람의 인격체가 서로 육체를 움직이려고 싸우게 되지는 않을 것인가. 기능주의자들의 이론을 빌린다면, 신장이나 간장이 아무리 여러번 갈아 끼워도 의식에는 별다른 변동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머리속의 모든 뇌세포를 다른 사람의 신경세포로 몽땅 갈아 끼운다 해도 그 회로구성만 다치지 않는다면 인격체의 변동은 없어야 할텐데, 과연 그렇게 될까?
 

두근이 조금 넘는 물렁물렁한 이 회백색 덩어리에서 '마음'이 생겨난다.
 

컴퓨터 발달이 뇌연구에 큰 도움

이처럼 알쏭달쏭한 마음과 육체의 상호관계 즉 심신이론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쓸데없이 논증하기를 즐겨하는 철학자들이나 성직자들의 소관 분야였고,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자료의 수집이나 실험적 방법이 불가능한 문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 형식주의 논리학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그 후속주자로 정보처리 이론이 탄생했다. 아울러 심리학과 언어학 분야 등의 진전과 함께, 종래에는 불가해하고 신비스럽게만 느껴졌던 정신기능에 대한 이론적 접근이 가능해졌다.

금세기 후반부에 들어서는 전자공학의 발달로 컴퓨터의 하드웨어가 실현되어 정보처리과정이 확인되기 시작하였고 신경과학의 폭발적인 발전으로 뇌를 구성하는 신경세포의 구조, 해부학적 연결, 전기화학적 작동 등이 규명되면서 마음의 문제는 본격적으로 실증과학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심리학을 중심으로 한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이라는 학문 분야를 탄생시켰다. 신경과학이 뇌의 구조와 전기화학적 특성 즉 인간의 마음을 창출하는 기관의 하드웨어쪽에 중점을 두어 연구하는 분야라고 할 때, 인지과학은 인간의 마음을 구성하는 기능적 요소들의 서술과 분류, 그리고 마음의 현상의 진행 과정같은 소프트웨어쪽 연구를 주제로 삼는 중간급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인지과학의 중요한 출발은 인간의 마음을 합목적적인 정보처리 과정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매일같이 보고 듣고 느끼고 결심하고 움직이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뇌가 외부로부터 신경세포 특유의 방식으로 데이터를 수집 정보화하여 중추로 전달하고, 중추에서는 이들을 신경회로망 속에 표상(representation)을 형성하고 조작변형하여 그 최종 결과를 운동계로 출력하는 단계적 처리과정으로 파악한다. 심지어 비인지적인 요소로 생각되는 기쁘고 슬픈 감정이나 정서까지도 그것들이 독립적인 경험이 아니라 하급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정보처리 결과에 대한 가치 판단이라는 기능적 역할을 설명하여 논리적으로 불가해한 현상이 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지과학의 성과는 곧 컴퓨터로 모델링되고 시뮬레이션 된다. 그래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 등장하게 되고 어떤 기능은 인간을 상회하는 능력을 보이기도 한다. 기계와 인간을 구분하는 속성들로 받아들여지던 감정이나 정서, 그리고 자기 마음속을 스스로 읽 을 수 있는 자성(self-reflection)의 능력까지도 컴퓨테이션 과정으로 표현이 가능하게끔 되었다.

즉 컴퓨터의 주정보처리과정에 병렬방식(pararell processing)으로 되먹이 체계(feedback system)를 첨가하여 현재 진행되는 과정을 한단계 위에서 검토하고 가치판단케 하므로 감정이나 자성능력같은 인간고유의 기능까지 수행하는 인공지능의 실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학은 컴퓨터를 이용한 3차원 영상으로 환자의 뇌속을 들여다볼 술 있다. 사진은 수술실에 누운 환자의 뇌에서 종양부위를 찾아낸 모습.
 

마음의 메커니즘 연구하는 인지과학

그렇다면 인간의 뇌는 일종의 컴퓨터인가? 말초신경은 외부감각을 활동전위라는 2진법의 정보단위로 변환하는 아날로그-디지털 변환기이며, 중추신경은 반도체 대신 단백질이나 인지질같은 생물소자(bio-chip)로 구성된 거대한 병렬회로의 중앙처리장치이며 우리의 행동은 이 복잡한 기계 속에서 계산되는 최종값들의 출력인가? 우리의 자유(freedom), 우리의 의지(will), 우리의 각성(awareness)은 어느 회로 속에 숨어 있는 것일까? 나는 배가 고플 때 음식을 찾아 먹게 마련이지만, 내가 원하면 반항하여 먹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의 의지란 내 전두엽 신경세포들이 방전할 때 방출되는 잡음일까? 또는 깨어진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의미없는 출력이 계속 찍혀나오는 것처럼 회로에 예상치 못한 고장이 생긴 것일까? 'I have a brain'과 'I am a brain'의 명제 중 어느 것이 참인가?

이러한 질문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사고의 논리적 체계가 얼마나 튼튼한 것인지 되돌아 보지 않을 수 없다.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에클레스(Eccles)나 슈페리(Sperry)같은 이 시대 최고의 신경생리학자들은 말년에 접어들어 뇌와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물질적인 실체로서의 정신을 인정하는 이원론을 선택하는 일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비장한 선언을 하고 있다. 어떤 철학자는 마음이 뇌라는 물질에서 기원하는 것이지만, 마음과 물질 사이의 인과관계를 확립해주는 물리적 법칙은 없다는 잘 납득이 안가는 무법칙성 일원론(Anomalous Monism)을 주장한다. 즉 물질적이면서도 물질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과정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지과학의 성과와 인공지능의 실현은 대단한 설득력과 실증의 증거들로 다가오고 있어서 부정할 수 없는 일이지만, 뇌의 작동방식이 단순히 계산과정(computation)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달리는 호랑이의 털을 한 줌 뽑았다고 해서 단숨에 호랑이를 사로잡는 것은 아니며, 목숨을 건 격투가 지금 시작되어야 한다.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어떠한 형태로든지 뇌와 마음에 대한 설명은 명맥을 유지해 왔으며, 이러한 이론과 가설들은 진리이기 이전에 시간에 따라 계속 탈바꿈하는 일련의 비유(metaphor)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분명한 것은 뇌와 마음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좀 더 포괄적인 비유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뇌의 기전을 복잡성의 과학(Science of Complexity)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뇌기능의 어떤 부분, 즉 뇌파현상은 여러가지 끌개(attractors)들이 위상공간에서 역동적으로 변이해가면서 생성되는 혼돈의 이론(Chaos Theory)들로 파악될 수 있다는 신선한 연구들이 보고되고 있다.

어떤 학자는 우리의 직관에 모순되는 현상들이 인정되어야 하는 양자역학의 세계처럼, 인간의 마음은 알고리즘적인 인간의 사고방식을 넘어선 또다른 법칙에 따라 진행될지도 모른다는 파격적인 학설을 제시하기도 한다.

뇌와 마음의 관계, 그것은 우리의 이해가 깊어갈수록 점점 더 우리를 바닥이 없는 심연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지금부터 70여년전 영국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비록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다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의 문제들은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고 설파하였다. 참으로 오늘 이 순간 우리가 처한 상황을 한마디로 나타내주는 예지력 엿보이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컴퓨터 기술의 발달과 함께 M.R.I사진을 사용, 뇌가 정신적 활동을 할 때의 변화를 포착할 수 있게 됐다. A는 한 단어를 들은 뒤 동사를 말하는 경우, 가령 '케익'을 들으면 '먹는다'를 말할 때의 뇌외 모습이다. 반면 B는 들은 말을 그대로 반복할 때의 뇌의 움직임이다. 이 실험 결과는 말을 반복하는 경우보다 새 말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뇌가 더 활동적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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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동아일보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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