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은 인류만의 것은 아니다. 동물과 식물에도 혈액형이나 혈액형 유사물질이 있어 항체반응을 나타낸다.
ABO식 혈액형은 우리에게 친근한 것이지만 인류만의 전매특허는 아닌 듯하다. 인류에 가까운 침팬지나 고릴라 원숭이 등 영장류에도 혈액형이 있고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도 A형, B형, O형(H형 물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
포유류만이 아니다. 뱀이나 거북 등의 파충류, 개구리나 도롱뇽 등의 양서류, 어류, 조개류 등 연체동물도 혈액형을 가지고 있다. 대합에도 O형과 B형이 있는데, 이 혈액형의 차이에 따라 맛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대장균이나 티푸스균 등의 세균에도 혈액형과 유사한 물질이 있다는 것이 이미 1930년대에 밝혀진 바 있다.
"국내에서는 아직 동물의 혈액형에 대한 연구는 그리 활발하지 않지만 외국의 경우 이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진척된 것으로 압니다. 가령 소에는 A B C F J L M S Z T라는 혈액군 안에 수십개의 혈액형 항원이 존재하며 말에는 A C D K P Q U 혈액군 안에 20여개의 혈액형 항원이, 돼지에는 15개의 혈액군 안에 수십개의 항원이, 양에는 7개의 혈액군 안에 20여개의 항원이 존재한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서울대 의대 임상병리과 한규섭 교수의 말이다.
미국의 경우 가장 활발히 수혈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물은 개인데, 개에도 A B C D F Tr J K L M N등 11개의 혈액군이 있으며, 그 안에 12개의 혈액형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중 Tr 항원은 사람의 ABO혈액형과 마찬가지로 그 항원을 가지지 않은 개에서는 항 Tr 항체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Tr항원이 음성인 개에게 Tr항원 양성 혈액을 주사하면 용혈성 수혈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개의 A항원은 사람의 Rh(D) 항원처럼 면역원성이 강하여 A항원이 음성인 개에게 A항원 양성 혈액을 수혈하면 항-A의 형성을 유발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개에게 수혈을 하기 전에 Tr항원과 A 항원 검사를 실시하려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 혈액형 검사를 위한 시약이나 기술이 덜 개발된 실정이라 보편화되지는 못한 형편이라고 한다. 개를 제외한 다른 동물의 경우도 혈액형의 연구는 수혈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사람에게 이용되는 각종 시약 및 치료제의 개발과 수반하여 부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대장균에도 혈액형 유사물질이 있다
세균에도 혈액형 유사물질이 있다면 식물의 경우는 어떨까. 이와 관련, 일본에서는 과학수사의 최전선에 오랜 기간 혈액형 감정을 해온 야마모토 시게루(山本 茂) 전 과학경찰연구소부장이 독자적인 연구를 한 바 있다.
그가 검사한 식물은 모두 6백종을 헤아린다. 인간의 타액에서 혈액형을 알아내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식물의 종자나 열매에 항 A항체, 항 B항체, 항 H항체(O형 판정용)를 반응시켰다. 인간의 타액에서 혈액형을 알 수 있듯, 사실 혈액형을 결정하는 물질은 온몸에 퍼져 있다. 비록 식물에는 혈액이 없지만, 혈액 유사물질이 있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 결과, 검사대상이 된 식물 중 약 10% 이상에서 혈액형 유사물질이 발견됐다고 한다. 인간의 O형에 대응하는 H형 유사물질을 가진 것이 대부분으로, 다음으로는 AB형이 많았다는 게 야마모토씨의 주장이다. 동양인에게 가장 많이 나타나는 A형은 상록수 등에서 보이는 정도로, 식물의 세계에서는 많지않은 듯했다고. 재미있는 것은 단풍나무종에서 발견된 사례다. 단풍나무에는 H형 유사물질(O형)과 AB형 유사물질을 갖는 그룹이 있는데, 가을이 되면 O형 단풍나무는 붉은색, AB형은 누런색으로 물이 든다.
이같이 동·식물에 혈액형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혈액형 유사물질의 기원이 세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보자면 생명이 탄생한 시기부터 혈액형이 있었을지도 모르며, 그렇다고 했을 때 혈액형은 생명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물질임에는 분명하다는 것이 이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야마모토씨의 견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