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 수영 사이클 등 기록종목에서 컴퓨터심판은 종횡무진 활약한다. 판정시비를 없애고 관전의 재미를 더해주는 전자장치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바르셀로나 올림픽 육상 1백m 결승. 예선과 준결승을 통과한 8명의 선수들이 출발점에 섰다. 스탠드에 운집한 수만명 관중 뿐 아니라 텔레비전 위성중계로 이 장면을 지켜보는 수십억 인류가 이 긴장된 10초 동안 숨죽이고 있다.
이윽고 심판이 전자장치에 연결된 권총을 높이 들어 출발신호를 한다. 3번 레인 선수가 조급한 나머지 먼저 일어섰다. 그 선수의 발밑에 부착된 부정출발감시장치가 작동, 경고음이 울린다. 심판이 재출발을 지시하고 선수들은 다시 출발선에 정렬한다.
두번째에는 부정출발이 없다. 시속 50km대로 질주하는 인간탄환들은 눈깜박할 사이에 결승점을 통과한다. 4번 레인 선수가 두손을 번쩍 드는 순간 관중들은 그 선수가 우승한 것을 확인한다. 그러나 골인 장면을 자세히 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슬로비디오를 여러번 돌려도 간발의 차이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이 때 등장하는 것이 비디오판정장치와 사진판정장치. 비디오판정장치는 고속비디오로 골인 순간을 초당 1백 화면으로 찍어 0.01초의 차이를 판정한다. 사진판정장치는 이보다 10배 정확한 0.001초까지 판별한다. 이들 장치에 의해 정확한 경기 결과가 전광판에 표시되자 또 한차례 함성이 터져나온다.
이처럼 경기결과가 아슬아슬하지 않을 때는 골인지점의 광전자감응장치가 작동, 선수들의 기록이 곧바로 전광판에 나타난다. 결승테이프나 스톱워치는 이제 '전자심판'에 밀려 역사의 장으로 사라질 운명에 놓인 것이다. 이제까지 언급한 전자장치들은 모두 서울올림픽 때 선보였다. 이 장비들이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할 것을 가상해 꾸며본 얘기다.
파울 여부도 판정
육상 트랙경기에서 전자심판은 단거리와 허들 그리고 4백m 8백m 등 일부 중거리 종목에까지 이용된다. 포환 원반 해머 창던지기 등 필드경기에서도 심판이 착지점에 광파측정기 핀을 꽂으면 자동으로 측정기록이 전광판에 나타난다. 멀리뛰기의 경우 도움닫기를 하는 순간 발바닥이 출발선을 침범했는지를 센서가 판정해 파울 여부를 정한다. 따라서 아무리 좋은 기록이 나오더라도 전자심판이 빨간불을 표시하면 실격이 되고 만다.
수영경기에도 전자심판은 종횡무진 활약한다. 출발을 알리는 권총과 출발대 밑에 부착된 일종의 압력센서인 노란색 판 그리고 전광판이 모두 컴퓨터에 연결되어 있다. 리턴 순간은 물위에 앉아 있는 심판들이 눈으로 확인한다.
수영선수들은 결승점에 골인할 때 반드시 노란색 판을 짚어야 한다. 압력센서에 일정정도 이상의 압력이 가해져야만 골인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센서에 가해진 압력은 전기적 저항으로 변환되고 이것이 컴퓨터에 입력돼 전광판에 곧바로 기록이 표시된다. 이 때문에 단거리 수영선수들은 골인 몇m 전부터 노란색 판을 짚기 위해 스트레치 폭을 조정하는 훈련을 하기도 한다.
육상 수영 뿐만 아니라 사이클이나 빙상의 쇼트트랙 등 0.1초를 다투는 기록경기에 전자심판은 그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가고 있다.
사격 양궁 등 표적을 맞추는 경기에는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이 관중들에게 관전의 기쁨을 선사한다. 선수들이 표적을 향해 사격하면 멀리 떨어진 표적이 카메라에 잡히고 관중들은 그것을 들여다봄으로써 경기결과를 알 수 있게 된다.
컴퓨터채점에 고전하는 한국복싱
복싱경기에서 판정시비는 고질적인 것이었다. 서울올림픽에서 딴 복싱 금메달 두개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주최국의 텃세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우리 선수들이 외국에 나가서 당하는 설움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흥행을 우선으로 하는 프로복싱은 예외로 하더라도 아마추어의 순수성을 지켜야 하는 아마복싱에서는 판정시비를 없애자는 주장이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우세해졌다. 이 결과 등장한 것이 컴퓨터채점기.
88년 3월 서울컵 복싱대회에서 소련 엔지니어들이 선보인 이 시스템은 89년 국제아마권투연맹(AIBA)이 모든 국제대회에 이를 도입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이제는 보편화 됐다. 컴퓨터채점기의 원리는 간단하다.
심판들이 펀치력과 정확도를 두루 보고 한회가 끝난 다음 매회 20점 만점으로 채점하는 저지페이퍼 방식과 달리 컴퓨터채점제는 경기중 유효타가 나올 때마다 심판들이 자기앞에 놓인 버튼을 눌러 판정한다. 이 때 5명의 심판 중 3명 이상이 버튼을 눌러야 점수로 인정된다. 경기가 끝나면 컴퓨터가 자동으로 점수를 계산, 승자를 결정한다.
컴퓨터채점제는 인파이터보다 아웃복서에게 유리하다. 펀치의 파괴력보다 정확도가 점수따기에 더 유리하므로 잽이나 스트레이트 같이 주먹을 많이 내는 선수가 이길 확률이 많다는 것. 팔길이가 짧고 유연성이 부족한 대신 큰 것 한방을 노리는 경향이 많은 우리나라 선수들은 컴퓨터채점제에 적응하지 못해 고전하고 있다.
프로야구에 「전자심판」이 나온다면
태권도에서도 컴퓨터판정이 도입되고 있다. 이전에는 매라운드가 끝난 후 판정을 전광판에 입력했으나, 컴퓨터채점기의 도입으로 감점 득점이 인정되는 순간 4명의 심판 가운데 2명 이상이 동의하면 곧바로 전광판에 표시된다.
펜싱에서는 1950년대부터 전자장치가 심판을 대신했다. 펜싱 선수의 뒤에 전기줄이 길게 늘어뜨려 있는데 칼끝이 상대방의 유효면을 찌르면 빨간불이 켜지고 무효부위에 적중하면 흰불이 켜진다. 플러레와 에페 종목에는 전자심판이 인정되지만 사브르 종목은 아직도 심판들이 육안으로 판정한다.
전자심판이 아직 발붙이지 못하는 종목도 많다. 체조경기에서 현란한 율동과 초인적인 묘기에 대한 평가는 역시 인간의 눈과 머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구기종목도 공이 둥근 만큼 심판의 실수가 가끔 나와야 경기를 관전하는 재미가 더해진다.
만약 프로야구에 컴퓨터심판이 등장한다면 어떨까. 우선 주심의 시원스런 '스트라이크' 판정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판정시비로 인해 경기가 중단되거나 진 게임을 심판탓으로 돌리기 어렵게 되지만 김응용 감독이 심판에게 점잖게 항의하는 코믹한 장면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