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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속에 뛰어들어 실제체험 느끼는 가상현실의 세계

아이폰을 쓴 사람이 가공의 집 안으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쏟아진다.

얼마 전 국내에서 상영됐던 '토탈 리콜'(Total recall)이란 공상과학영화에서는 주인공의 과거가 헛갈리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자신의 실제과거와 누군가가 주입시킨 '가상의 과거'가 겹치면서 큰 혼란에 빠져드는 것이다. 주인공의 과거를 지울 필요를 느낀 화성식민지집단이 실험적으로 그의 과거를 지우고 '환상의 과거'를 주입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의 과거는 주인공의 기억을 바탕으로 컴퓨터가 재구성한 의사과거(擬似過去)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훌쩍 떠날 수 있다면 이러한 복잡한 설정은 필요없겠지만 현재로선 이러한 시간여행은 불가능해 보인다. 물리학에서 말하는대로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非可逆的)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묘사한 인공적인 과거 재생방법이 보다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최근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각광을 받기 시작한 가상현실(virtual reality) 또는 인공현실(artificial reality)공학은 이러한 대안의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해주고 있다. 알쏭달쏭하게만 들리는 이 가상현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기술적 배경을 갖고 있는가.
 

현재 가상현실시스템을 가장 활발히 응용하는 사람은 오락분야 종사자들이다. 사진은 가상현실을 활용한 오락기(Virtuality 3D)
 

아이폰과 데이터장갑
 

가상현실을 느끼게 해주는 한 비디오게임의 화상. 컴퓨터 그래픽으로 창조한 이 화상은 입체적으로 변하는 3차원 화상이다.
 

먼저 가상현실 창조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 그래픽(computer graphic, CG)에 대해 알아보는 게 순서일 것 같다. 컴퓨터 그래픽은 컴퓨터를 사용해 도형이나 화상을 표현하는 것을 말하며 통계그래프 작성, 의복디자인에서부터 건축설계 자동차설계 제품설계 및 시뮬레이션(simulation) 등 CAD/CAM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응용 발전되고 있다. 이 컴퓨터 그래픽 분야에서 가상현실이란 개념이 어렴풋이 생겨나고 그 구체적인 연구가 시작된 시기는 1960년대이다.

1963년 그래픽 입출력장치인 스케치 패드를 개발, 컴퓨터 그래픽분야의 선구자가 된 미국 MIT의 아이 반 서덜랜드는 평면적인 화면(2차원 디스플레이)에서 진일보한 화면을 탄생시켰다. 그는 투영된 피사체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최종적인 디스플레이'에 대한 연구를 1965년부터 시작했는데, 1968년에는 HMD(Head Mounted Display)를 이용한 3차원 표시의 컴퓨터 그래픽을 개발했다. HMD는 헬멧처럼 머리로부터 뒤집어쓰는 타입의 디스플레이다. 눈 앞 좌우에 소형의 CRT(브라운관)가 고정돼 있어 피험자는 이를 통해 3차원의 화상을 보게 된다.

그의 연구에 자극받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의 프레드릭 브룩스는 매직 핸드(Magic hand)라는 센서가 깔린 장갑을 이용, 컴퓨터 그래픽이 표현한 가상의 물체를 손으로 만지는 '그룹'(GROUP)이라는 시스템을 1970년대 초에 고안해냈다. 그후 주춤했던 가상현실연구는 1985년에 설립된 미국의 모험기업(venture business)인 VPL사(社)가 앞서의 HMD와 매직 핸드를 보다 발전시킨 아이폰(Eyephone)과 데이터장갑(Data glove)을 개발하면서 다시 각광받기 시작했다. VPL사가 이 두 제품을 시장에 내놓자 순식간에 세계적인 붐이 일어났다.

아이폰을 쓴 사람은 머리를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입체적으로 변하는 화상을 볼 수 있어 마치 새로운 세상에 뛰어든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데이터 장갑을 낀 손을 움직이면 화상속의 물체를 손으로 집을 수도 있다.

그후 미 국립항공우주국(NASA)이 개발한 '비바'(VIVA)시스템에 이르러서는 보다 현실과 유사하게 된다. 아이폰을 쓴 사람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축된 가공의 집 안으로 들어가 앞으로 전진하기도 하고 좌우로 돌기도 한다. 그리고 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간 다음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쏟아진다.

일본 쓰쿠바대학의 이와타는 부엌과 같이 제한된 공간이 아니라 광역공간에서의 가상현실을 연구하고 있다. '보행 통로'(WaIkthrough)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폰과 특수한 신발을 신은 사람이 고안된 캡슐에 들어가 걷는 동작을 한다. 그러면 신발의 움직임에 따라 나아가는 방향과 이동된 거리가 계산돼 마치 산책을 할 때 지나가는 풍경처럼 주위의 화상은 동적인 파노라마를 보여주게 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사실은 피험자의 신발에 끈을 매단 뒤 이것을 모터로 끌어 발에 반력(反力)을 느끼게 함으로써 실제로 피험자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걷는 동작만 되풀이해도 보행하는 느낌을 주는 인공적인 체성감각이 실현됐다는 점이다.

또 미국의 애플컴퓨터사(社)와 한 모험기업이 공동으로 개발한 '마아즈 내비게이터'(Mars navigator)시스템은 1976년에 발사된 화성탐사선 '바이킹'(Viking)이 수집하고 미국 제트추진연구소가 편집한 화성표면의 3차원 화상데이터를 기본으로 해 피험자가 마치 그 우주선을 조종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도록 설계돼 있다. 예를 들면 피험자는 그 우주선에 자기가 실제로 탑승한 느낌을 받게 되며 조종을 시작하면 3차원의 우주와 화성의 모습이 나타난다. 제트엔진의 발진음이나 진동도 재현돼 한층 현장감을 북돋우며 화성 각지의 지질데이터도 문자나 음성으로 출력되기 때문에 즐기면서 공부할 수 있는 최상의 학습시스템이다.

현재 이러한 가상현실시스템이 가장 선풍적인 인기와 함께 응용되고 있는 분야는 오락이다. 날로 치열해가는 가상현실 시장에 혜성처럼 나타나 대중적인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영국의 W 인더스트리사(社)는 제트전투기의 공중전 게임 (Virtuality 1000 SD)을 선보였다. 액정표시창(液晶表示窓)이 장착된 아이폰과 광섬유가 깔려있는 손장갑을 낀 사람은 게임에서 3백60°의 3차원 시야에 나타난 적기를 조준경의 십자선(十宇線)에 맞추고 오른손에 쥔 단추를 누르면 미사일이 발사돼 적기를 추락시킬 수 있게 돼 있다.

얼마 전 걸프전에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상황을 TV를 통해 생생히 보았다. 앞서 말한 게임은 그야말로 게임에 불과하지만 가상현실 공학이 이대로 발전해간다면 전쟁이 게임과 비슷한 양상으로 바뀔 소지가 충분히 있다.
 

아이폰과 데이터장갑을 낀 한 가상현실 체험자. 오른쪽 화면에 그의 체험장면이 나타난다.
 

되살아난 모차르트

지금까지 소개한 가상현실 연구의 획기적인 발상과 진전은 놀랄만한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인간의 오감,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완전히 속여 그야말로 현실과 구분이 불가능한 가짜 현실이 우리에게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이미 고인이 된 모차르트가 다시 살아나 피아노를 치게 될지도 모르고 극성맞은 팬들이 죽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되살려 놓을지도 모른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가상현실 프로그램을 만드는 기업에게 요금만 지불하면 죽은 애인 친구 부모를 가상 공간에서나마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려면 고인은 생전에 자신과 관련된 모든 데이터를 가상현실용으로 남겨둬야 할 것이다. 또 가상현실분야는 우리에게 몽상적이고 낯선 세계를 창조해 보일지도 모른다. 엄지손가락만한 태양이 수백개나 떠 있는 세상, 하늘을 나는 물고기, 광속으로 달리는 입자의 세계 등 상상의 파노라마가 꿈결처럼 펼쳐질 것이다.

사람들은 눈 앞에 보이는 현상에 대하여는 일단 믿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쉽게 이런 현상에 스스로를 몰입시킨다. 영화를 보면서 왜 눈물을 흘리는가. 이 역시 가상의 현실에 지나지 않지만 일단 관객이 자신을 잊고 영화 속에 빠져드는 순간에는 영화가 현실이 돼 버린다. 우린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리얼(real)에 대해 어떤 정의를 내려야만 될까.

근본적으로 인간이 느끼는 '존재함'은 뇌에 의해 인지된다고 볼 수 있다. 외부자극을 오감을 통해 전달받고 이에 반응하는 명령을 내리는 중추기관이 바로 뇌이기 때문이다. 존재함이란 오감을 통해서만 인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가상현실의 궁극적인 도달점은 뇌를 마음대로 제어하는 신경공학으로 귀착될 공산이 크다.

물론 뇌연구의 현실적인 수준이 그야말로 걸음마 단계도 되지 않으므로 이러한 얘기는 먼 미래를 두고 한 가정에 불과하다. 어쩌면 가상현실이 인류생활의 일부분이 될지도 모를 그 때에는 '현실'에 대한 정의가 새롭게 내려질지도 모를 일이다.

환경변화에 민첩한 기업들은 이 가상현실을 상품개발이나 선전에 연결시켜 보려고 궁리하고 있다. 이미 인공현실이란 선전문구를 붙여 시장에 상품을 내놓은 기업도 있다. 요새 '인공지능'이나 '퍼지'는 상품광고에서 이미 식상한 표현이 돼 버렸는데 반해 정작 이를 연구하는 과학자나 기술자들은 이 기술의 초보단계에서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하고 있고 연구목표의 절반도 달성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이미 붐을 타기 시작한 가상현실도 이러한 유행의 첨단에 설 기미가 보이고 있다. 아직 스타로서 각광을 받을만한 수준이 아닌데 집중조명을 받다가 '인공지능'처럼 무대의 뒷전으로 서서히 밀려가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가상현실의 개발은 지금까지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뒀지만 아직 '조악한 현실'을 보여주는 데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아이폰이 보여주는 '현실'의 해상도는 가정용 TV의 수준이며 무게도 보통 2, 3kg 정도로 현실감을 충족시키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형편이다.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려면 경박단소(輕薄短小)하면서도 해상도가 탁월한 아이폰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대략 콘택트렌즈 정도의 크기와 무게를 지니면서도 현실을 그대로 재생한 듯이 고도의 화상을 보여주는 HDTV의 개발이 선행돼야 할 과제다.

또한 '보행통로시스템'에서 소개한 인공적인 체성감각의 실현은 상당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 문제는 마치 사람을 닮은 로봇을 설계하는 것 만큼 접근하기가 어렵다. 사람의 손동작 등 복잡하고 섬세한 육체의 움직임을 기계적이고 디지털적인 요소로 바꾸려면 보다 진보된 고도의 공학적 기술이 수반돼야 한다.

또 피사체를 손으로 집거나 들 때 무게를 느끼게 하기 위해선 손가락마다 반력(反力)을 주는 액츄에이터(actuator)가 설치돼야 하는데 이 장치의 핵심인 모터가 너무나 거추장스럽고 거대해 손가락을 자유롭게 움직이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 따라서 극소형의 고출력 모터 등 새로운 장치가 개발되지 않는 한 실질적인 인공촉감의 실현은 지금으로선 어려운 형편이다. 더 나아가 물체의 질감까지 표현하려면 획기적인 공학적 진보가 이뤄져야 한다.

운전면허시험도 가상현실 속에서 치르고

이러한 현실적인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상현실 기술은 꾸준히 발전해갈 것이며 다른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TV 자동차 컴퓨터가 인류가 보다 편리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듯이 가상현실이란 명칭이 붙은 이 새로운 기술분야도 우리의 생활을 보다 윤택하게 해줄 것이란 기대를 가져본다.

작년 8월 일본에서 개발된 이륜차의 안전운전교육용 가상현실시스템은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노상을 달리는 느낌을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이 시스템은 조만간 운전교습이나 시험이 이러한 가상현실 속에서 이뤄질 때가 올지 모른다는 예측을 낳게하고 있다. 이와 유형이 비슷한 비행기나 우주선의 모의운항연습현장에는 이미 가상현실 기술이 도입돼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

또한 전화나 TV회의에서 한 걸음 나아간 '현장감 통신회의'는 회의자의 시선을 적외선으로 검출, 자연스럽게 상대방과 시선을 맞추며 대화할 수 있도록 개발될 것이라고 한다. 또 조만간 장애자들의 활동영역을 넓혀주기 위한 가상현실 프로그램이 개발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무튼 앞으로 우리가 들어서게 될 가상현실의 시공간은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과는 다른 경이로운 세계일 것이다. 거기에서 어쩌면 우리는 진보된 과학기술과 인간의 상상력이 창조해낸 또 하나의 엘리스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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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김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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