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프라이터를 이용, 최초로 소설을 쓴 사람은 마크 트웨인이었고 그 작품은 「톰 소여의 모험」이었다.
타자기로 시를 쓰는 시인을 상상해보면 어쩐지 이상하다. 흔히 TV에서 고뇌하는 문학가를 묘사하는 장면에 등장시키는 것은 구겨진 원고지 뭉치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도 시대가 바뀜에 따라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해 소설을 쓰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시인들은 어떤가. 놀 지는 해변에서 좋은 시상이 떠올랐다. 그 떠오른 시상을 적기 위해 적지 않은 덩치의 컴퓨터를 들고 다니기는 어렵다. 간단하게 담배갑 속표지 뒷면에 적으면 될 것이다. 시는 소설에 비해 길지 않기 때문에 아직까지 기계의 힘을 크게 빌리진 않는다. 그러나 팜톱(palm top)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사태는 약간 달라졌다. 달빛과 소주잔으로 살아온 김삿갓의 후예들도, 새로운 시대에는 죽장이나 삿갓 대신, 팜톱이나 디스켓 몇장을 휴대하고 주유천하를 하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21세기의 시인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다소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타이프라이터를 이용해 소설을 쓴 최초의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미국 소설가인 사무엘 클레멘스였다. 사무엘 클레멘스는 그의 본명이고, 예명(필명)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마크 트웨인이다. '톰소여의 모험'은 타이프라이터로 쓰여진 세계 최초의 소설이다.
자동필기 도구
글쓰는 노동에서 도망가려는 시도는 3백여년 전부터 있었다. 1714년 앤여왕시절에 밀이라는 손재주 좋은 기술자가 여왕에게 자신이 그러한 기계식 필기기구를 만들어보겠노라고 말했다.
기계가 글씨를 한자씩 찍어내는 원리가 최초로 나타났다. 그러나 밀은 그 완성을 보지 못했다. 실패의 원인은 찰스 베비지가 세계 최초의 기계식 컴퓨터를 만들지 못한 이유와 같다. 즉 실제 제작을 뒷받침할 정밀기계기술의 수준이 너무 뒤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론적 원리를 기계가 제대로 구현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시대의 기술정도가 자동필기기구 정도의 고도의 기계장치적 발전을 간절히 바라지 않았다. 멋있게 편지쓸 일이 있으면 필체좋은 하인에게 대필을 시키면 되는 일이었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기대한 앤여왕의 기대는 무산됐다. 그로부터 1백50여년이 지났다.
세상은 변해 신문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글을 써 살아가는 글쟁이들이 많이 탄생했다. 이제 글쓰는 일을 하인에게 맡기고 느긋하게 낮잠을 잘 수만은 없게 됐다.
드디어 밀의 후계자가 나타났다. 위스콘신의 한 신문 편집부에 근무하면서 인쇄소 사장이던 크리스토퍼 숄즈의 등장으로 자동필기기구는 또다시 세상에 나타났다. 세관으로 자리를 옮긴 숄즈는 본격적으로 자동필기기구를 개발했다.
그는 신문편집일을 볼 때 깃털 펜이나 거친 철필로 원고를 쓰기 위해 밤새워 고생한 지난 날을 떠올려보았다. 여기저기로 번지는 잉크, 굵게 나왔다 가늘게 나왔다 하는 깃털펜, 팔이 뻐근해지도록 힘든 철필작업, 모두가 악몽같이 떠올랐다.
1872년 숄즈와 그의 조수인 글라이든이 만든 세계 최초의 자동 필기기계가 탄생했다. 숄즈는 자금문제로 당시 총포류와 재봉틀 제조로 유명한 레밍턴랜드와 제휴했다. 그 덕택인지 최초의 기계는 마치 화려한 꽃무늬가 장식된 재봉틀과 비슷했다. 그리고 행을 바꾸기 위해 캐리지(carriage)를 돌리려면(return) 재봉틀 발판을 밟아야만 했다. 숄즈가 용기있게 그 기계에 '타이프라이터'(Type-Writer)라는 이름을 붙였다.
최초의 물건들이란 항상 그렇지만 숄즈의 타이프라이터도 여러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깃털펜 하나가 몇센트하던 시절에 조악스런 대문자만 찍혀 나오는 재봉틀 덩치의 기계를 1백25달러나 주고 덜렁 살만한 고객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그렇다치고 숄즈의 타이프라이터는 현재의 기계식 타이프라이터와 달리 자신이 어떤 글자를 치고 있는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타자기의 윗부분을 번쩍 들어 올려야만했다. 왜냐하면 롤러(roller)가 밑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에게는 호평를 받았다. 마크 트웨인은 그 기계에 매혹돼 그것을 이용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숄즈의 기계가 마음에 든 마크 트웨인은 사업욕심까지 생겼다. 마크 트웨인은 타이프라이터 제조를 위해 30만 달러를 부어넣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욕이었다. 30만 달러를 고스란히 털린 마크 트웨인은 파산하고 말았다.
이 파산은 여러 실업가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여러 회사들은 숄즈의 기계를 분석해 그 실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내고 곧 개선에 들어갔다. 대소문자가 모두 마련되었고, 타이핑하고 있는 글자가 눈으로 보이게끔 만들어졌다. 타이프라이터의 등장으로 사무작업에도 작은 혁명이 일어났다. 누구나 글씨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라인프린터와 볼타자기
2차대전의 우울한 선물인 전자식 계산기의 등장은 다시 한번 타이프라이터로 관심을 돌리게 했다. 컴퓨터의 입출력장치에 관한 연구개발 열기는 컴퓨터 자체에 관한 연구만큼이나 오래됐다. 중앙처리장치(CPU)를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그 결과를 우리가 제대로 받아볼 수 없다면 CPU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컴퓨터에 사용된 최초의 매체는 천공카드였다. 천공카드는 일찍이 영국의 수학자인 베비지에 의해 도입됐지만 그 시초는 프랑스의 직조공인 자카르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다. 천공카드는 이후 홀러리스의 응용으로 인해 성공적인 매체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보다 앞서 1939년 2차대전중 독일의 기술자인 콘라드 추제는 자신이 만든 ${Z}_{2}$라는 기계에 35㎜짜리 필름을 이용했다. 추제는 펀치카드 대신에 쓰고 남은 필름에 구멍을 뚫어 사용했다. 펀치필름이었다.
1951년 유니백(Univac)사는 종이테이프의 전통을 이어 받은 금속릴테이프를 선보였다. 또 1년 뒤 IBM701에는 날카로운 금속테이프 대신 부드러운 플라스틱 테이프가 채택돼 속도가 향상됐다. 게다가 플라스틱 테이프는 부품자체의 마모율을 감소시킴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매체는 여러가지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천공카드에 찍힌 내용을 사용자가 쉽게 알아볼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천공 카드에 찍힌 '125+63='이라는 표현을 구멍이 뚫린 모양을 보고 쉽게 알기가 힘들다. 따라서 대부분 천공카드 위에 희미하게나마 수식을 찍어준다. 그렇다고 해도 천공카드로 출력을 받을 때면 그 덩치가 어미어마하게 커져 당황스럽다. 가령 ${A}_{4}$용지 10장에 빽빽히 들어갈 정도의 자료를 천공카드로 받는다면 제법 무겁다. 게다가 카드박스를 놓쳐 카드가 땅에 흩어진다면 정말 황당한 사태가 벌어진다. 수천장의 카드 순서를 다시 맞춘다고 생각해보라.
보다 그럴싸한 출력장치를 찾기 위한 노력은 자연히 타이프라이터의 개선에 집중됐다. 전동타자기 사업에 뛰어든 IBM이 그 선두주자였다.
IBM은 일렉트로메틱사를 인수해 전혀 새로운 형태의 타자기를 준비했다. IBM의 이러한 분발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IBM보다 먼저 컴퓨터를 완성한 유니백의 입출력장치는 당시 기술을 한단계 진보시킨 것이었다.
매스터슨이 책임자로 있는 유니백의 고속프린터개발부에서는 라인프린트라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다. 19세기의 기계식 타자기가 한 글자씩 오른쪽으로 인쇄해나가는 것과는 달리 1백20자로 이루어진 한 행을 단 한번의 동작으로 인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각행의 글자 위치마다 한벌씩의 자판이 준비돼 1백20개의 글씨를 단번에 프린트하게 된다. 이 기술은 인쇄속도를 획기적으로 증가시켜 당시 최고 속도를 자랑한 IBM의 프린터보다 무려 4배 이상 빨랐다. 46대의 유니백 모델-Ⅰ이 정부관청이나 기업에 팔려나갔는데 모두다 이 고속의 라인프린터 때문이었다.
일격을 당한 IBM은 이후 셀렉트릭(Selectric)이란 볼(ball)타자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종래의 타자기 글쇄가 한개씩 분리되어 있는데 비해, 모든 문자와 기호를 골프공처럼 생긴 뭉치에 양각시켜 놓은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글자의 수정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타이핑 속도도 2배 정도 향상시켰다. 셀렉트릭은 IBM의 회심의 역작인 '스트레치'컴퓨터에 붙여졌는데 불행히도 스트레치는 2천만 달러만 고스란히 날리고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 부속장치인 셀렉트릭은 살아남아서 1970년대 초까지 프린터 시장을 석권했다. 이렇게 뛰어난 기능을 IBM 사람들은 파워타이핑(power-typing)이라고 불렀으나, 힐퍼라는 독일인의 제안으로 워드프로세서라고 부르게 됐다. 이로 인해 컴퓨터와 타자기의 본격적인 결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셀렉트릭시스템의 왕좌도 그다지 오래가지는 못했다.
중국인 왕안의 성공
최초로 공격의 선봉에 나선 사람은 중국인 유학생 왕안(Wang An)이었다. 왕은 전파상의 방 한 칸을 빌려 '왕연구소'(Wang Institute)라는 회사를 차렸다. 왕은 범용컴퓨터 개발에 매달리는 대신 워드프로세서 시장에 뛰어들었다. 왕의 아이디어는 스크린상에서 먼저 문서를 편집해 사용자로 하여금 완성된 문서를 미리 보게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기능을 위해서는 컴퓨터와의 결합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사용자에게 편리한 기능을 많이 제공했다. 타이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편리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영어권 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권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언어체계를 준비했다.
왕의 아이디어는 대성공이었다. 초라한 다락방에서 시작한 왕연구소는 일약 컴퓨터계의 강자로 부상하면서 1980년대 초에는 세계 워드프로세서 시장의 30%를 장악하기도 했다. 기존의 타자기는 서서히 값싸고 다양한 기능의 워드프로세서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워드프로세서는 찰가닥거리는 쇳소리를 없앴으며, 손가락마디로 몰려오는 통증을 덜어주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문서의 삽입과 삭제가 편리해졌다. 지우개 부스러기는 워드프로세서 주위에서 볼 수 없게 됐다. 기계식 타자기에서 들리던 맑고도 경쾌한 벨소리는 다소 메마르고 팽팽히 긴장된 전자음으로 대치되었다.
마이크로 프로세서 가격의 하락으로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이 늘어났고 가정에서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를 따로 구입하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러자 워드프로세서의 기능을 위해 워드프로세싱 전문 소프트웨어가 속속 개발되기 시작했다. 즉 기존의 개인용 컴퓨터에 프로그램만 구입하면 워드프로세서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중 '워드스타'(Word Star)는 말 그대로 워드프로세싱 소프트웨어중에서 최고의 스타 자리를 지키며 현재까지 꾸준히 사용되고 있다. 많은 소설가들이 워드 프로세서의 편리함을 알고 난 뒤 속도감을 더해주는 워드프로세서의 구입을 서둘렀다. 물론 아직도 심리적인 거부감 때문에 몽블랑 만년필이나 향나무 연필을 선호하는 작가들도 만만찮게 버티고 있다. 더 나아가 현대의 워드프로세서는 철자검색뿐만 아니라 문장스타일까지 적절히 교정해 주는 놀라운 기능을 가지고 있다.
도트매트릭스의 등장
IBM 셀렉트릭의 쇠퇴는 새로운 출력기계의 출현을 예고했다. 그 중에서 데이지휠 프린터는 단연 돋보였다. 데이지휠 프린터는 데이지꽃(국화와 비슷) 모양의 바퀴살에 달린 활자들을 작은 망치가 전기충격으로 가격하여 그 활자와 종이사이에 끼인 먹끈으로 하여금 종이에 인쇄되도록 한 장치다. 그 속도는 셀렉트릭보다 두 배나 빨랐으며 글자가 찍힌 모양도 고르고 예뻤다.
데이지휠 방식이 전성기를 누릴 무렵, 또 다른 혁신적인 방식의 프린팅기계가 센트로닉스라는 회사에 의해서 1971년에 발표되었다. 보통 도트매트릭스(dot-matrix)라 불리는 이 방식은 고정된 활자가 없다. 단지 몇개의 핀들이 핀뭉치에서 전기 신호를 받아서 필요한 모양의 글꼴을 찍어낸다. 결국은 이 점들이 조합되어 여러가지 글자나 도형을 만들어낸다. 이것의 실용화는 1970년대 초부터 맹렬히 불기 시작한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열풍에 힘입은 바 크다. 데이지휠에 비해서 비록 글자모양은 예쁘지 않지만, 다양한 글씨체와 수많은 기호를 찍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데이지휠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특히 사진이나 도형과 같은 그래픽 영상도 거칠기는 하지만 인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었다.
도트매트릭스 프린터시장은 세이코 계열의 일본 엡슨(Epson)사에 의해 주도됐다. 세이코의 비약적인 발전은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부터 시작됐다. 탁상용 계산기와 금전등록기에 EP-101이란 도트프린터가 사용되었다. 욕심이 생긴 세이코는 프린터 전문업체를 하나 세우기로 했다. 그 회사의 이름은 엡슨이었다. 'EP-101의 아들'이란 뜻이다. 도트프린터도 몇개의 핀이 있는가에 따라서 인쇄문자의 품질이 다르게 된다. 그렇지만 아무리 핀이 많아도 깨끗한 데이지휠의 글자 모양새를 따를 수가 없어 데이지휠도 사라지지 않았다.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발달로 프린터도 이제 최고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레이저 빔을 이용해 1인치당 6백여개의 점을 찍을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 글자체는 보통의 활판인쇄 글씨의 품질만큼이나 뛰어났다. 게다가 여러가지 변형꼴의 글자를 마음대로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레이저 프린터는 복사기와 컴퓨터의 합작품이다. 레이저 프린터의 핵심부품인 엔진은 대부분 일제 캐논엔진이다. 기본원리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 상업적인 성공은 일본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