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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전처리」가 완벽한 것으로 인식돼 있는 일본의 첨단 연구분야. 그러나 가끔 엉뚱한 실수를 하곤 한다.

오늘날 일본이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배경에는 일본의 뛰어난 기술개발력의 뒷받침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방부 조사에 따르면 일본은 반도체재료와 마이크로전자회로, 기계의 지능화와 로봇 공학, 광학, 초전도재료 그리고 생물공학분야의 기술에 관한한 서유럽과 소련은 물론이고 미국보다도 앞서거나 같은 수준에 있다. 그런데 이런 막강한 기술능력을 가진 일본도 실패의 쓴 잔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던 연구 개발사업이 여러 건 있었다.

최대의 실수
 

세이칸터널^24년간 84억달러를 투자해 완성한 총연장 1백30km의 해저터널이다. 일본의 토목기술을 대본하고 있으나 그 실용성은 아직 미지수다.


일본통산성은 70년대 초 원거리 조종이 가능한 해저석유채굴장치 개발에 3천6백만달러의 연구비를 투자했으나 5년간의 이 연구개발사업은 마침내 실패로 끝났다. 그 이유는 제작된 장치가 재래식의 해상석유채굴장치보다 다루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운용비도 싸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 일본정부는 에너지와 공해문제의 해결책의 하나로 1970년부터 전기자동차 개발에 나섰다. 그러나 7년간 4천6백만달러의 연구비를 투입한 이 사업도 실패하고 말았다. 일본 연구계가 장기간 시용할 수 있는 배터리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73년부터 일본정부는 원자력으로 가동하는 제철용 용광로개발사업에 착수했다. 이 사업에는 1억1천만달러의 연구개발비가 투입됐으나 1980년 완성을 앞두고 사업을 전면 취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초 이 사업을 추진했던 일본통산성이 반핵(反核)운동자들의 저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일본정부는 1980년부터 6년간 8천4백만달러를 투입, 이산화탄소에서 석유화학물을 생산하는 연구개발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기름값이 떨어지면서 그렇게 비싼 비용을 들여 대체생산을 할 필요가 없게 되자 이 사업은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정부는 1981년부터 85년까지 1천1백만달러의 연구비를 투입, 추운 기후에도 잘 견딜 수 있는 집적회로(IC)개발을 추진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회로를 사겠다고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이 사업을 중단해 버렸다.

1989년 초 일본 본토와 홋카이도를 잇는 해저터널이 개통됐다. 24년간 84억달러의 돈을 퍼부어 완성된 총연장 1백30km의 이 세이칸(靑函)터널은 일본의 토목기술을 과시하는데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그 경제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많다.

제2차세계대전 이전부터 계획돼 온 일본 4대섬의 연결계획의 하나로 추진된 세이칸터널사업이 완성됨으로써 여행객들은 도쿄-삿포로 간 여행시간을 종전의 14시간에서 12시간 10분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급한 여행객들은 1시간 25분 걸리는 비행기를 이용한다. 실제로 홋카이도로 여행하는 사람은 거의 모두가 터널은 제쳐두고 항공편을 이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상 세이칸터널은 전후 일본의 꿈이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인들은 비행기가 오늘날처럼 발전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또 50년대만 해도 일본 본토의 북단인 아오모리(靑森)와 홋카이도 남단인 하코다테 간을 운행하는 연락선의 잦은 사고로 많은 인명을 앗아갔기 때문에 터널이 보다 안전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이 사업을 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터널이 완성됐어도 이용률이 신통치 않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보수와 운용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터널을 폐쇄해야 한다는 비평이 일고 있다.

일본기업을 파헤친 '가이샤'(會社)라는 책의 저자 제임스 아베글렌은 일본의 역시상 가장 큰 전략적인 실수는 일본의 알루미늄 정련(精鍊)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통산성은 "전기가 싸고 원료를 쉽게 수입할 수만 있다면 이 사업이 우리에게 알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못이 있었다면 전기료가 유류파동 이후 그렇게 뛰어오를 줄 미리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1977년 일본의 알루미늄 정련산업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는 연간 1백64만t의 생산용량을 보였고 14개사에 1만1천명의 종업원이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단 하나의 기업과 1백40명의 종업원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업계는 11억달러의 빚더미에 묻혀 운신을 못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놓고 아베글렌은 일본인들은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미래를 내다 보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토 오하시 대교^일본의 본섬인 혼슈와 시코쿠를 연결시켜 주고 있다.


HDTV도 도전에 직면하고

40여년의 텔레비전사(史)에 새로운 기술혁신을 이룰 것으로 예상되는 고화질 텔레비전(HDTV)은 이미 일본에서 시판에 들어갔다. 종래의 텔레비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화상과 깨끗한 소리를 제공할 뿐 아니라 극장에서 35mm 시네마스코프를 통해 느낄 수 있는 넘치는 박진감을 제공하는 HDTV는 멀지않아 연간 1천억달러의 큰 시장을 창출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서 현재 세계의 주요국가들이 HDTV개발에 막대한 인원과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HDTV가 세계의 가전제품시장은 물론 전자공업전반에 걸쳐 너무나 큰 파급효과 를 미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여년간 HDTV 개발에 9억달러를 투입한 일본은 HDTV 기술에서 단연 앞섰다고 자부하면서 느긋한 자세로 자기들이 개발한 기술을 국제표준규격으로 채택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뜻밖의 복병을 만나 세계시장 제패의 꿈은 어이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HDTV 시스템은 두개 분야의 기술을 확립해야 완성된다. 그 하나는 많은 정보를 하나의 작은 공간속에 다져넣기 위한 신호의 압축기술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을 방송국에서 가정으로 전송하는 기술이다. 모든 또 HDTV 시스템은 디지털식의 압축방법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때 신호속에 있는 꼭 필요하지 않는 정보는 선택적으로 버릴 수 있다. 따라서 일단 신호를 압축하고 나면 이 정보를 정확하게 송신할 수 있는 시스템의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HDTV 기술의 선구자로 자처하고 있는 일본방송협회(NHK)를 비롯해 여러 가전제품메이커들은 오늘날의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신호와 같이 이 신호를 아날로그 형태로 전송하고 있거나 전송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난 해 뉴욕의 위성 및 케이블장비회사인 제너럴 인스트루먼트사(GI)가 아날로그 전송시스템은 위성방송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 큰 파문을 일으켰다. GI사의 주장은 인공위성을 통해 텔레비전신호를 받고 있는 미국의 3백만 가정은 아날로그 HDTV 신호를 받자면 현재 가로 1.5m, 길이 3m인 수신용 접시의 직경을 두배로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GI사는 위성통신을 위한 디지털 전송실험을 한 결과 디지털신호가 아날로그신호보다 실수없이 보내기가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디지털신호는 또 먼 거리에서 탐지하기 쉽기 때문에 방송국에서는 규모가 작고 출력이 적은 송신기를 사용할 수 있어 돈을 절약할 뿐 아니라 다른 채널로부터의 간섭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신호의 전송에는 커다란 걸림돌이 가로놓여 있다. 지금까지 디지털신호는 높은 출력을 가진 인공위성과 초단파 마이크로웨이브 송신기 외의 다른 방법으로 전송하는데 성공한 일이 없다. 위성과 마이크로웨이브탑은 강력한 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신용 접시나 다른 마이크로웨이브탑에 신호를 보낼 때 가로막는 것이 없어 전혀 방해를 받지 않지만 다른 방법은 작은 것에도 방해를 받는다. 심지어는 젖은 나무잎과 같이 지상에서 발생하는 미미한 간섭에도 영향을 받기 십상이다.

특히 빌딩과 움직이는 물체로부터의 반사는 기장 큰 골칫거리다. 아날로그신호가 빌딩에 반사할 때는 스크린에 '고스트'(多重像)로 비치는데 이것이 실상과 근사하면 그런대로 봐줄만하다. 그러나 디지털신호의 경우에는 단 한번의 반사도 그림을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는 것이다.

GI사는 이런 문제를 컴퓨터 시뮬레이션(computer simulation)으로 슬기롭게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시스템은 주기적으로 시험펄스(pulse)를 발사해 그림이 망가지는 것을 막는다. 수신장치는 펄스를 인식하고 반사로 인해 펄스가 어떻게 바뀌었다는 것을 계산한 다음 들어오는 모든 신호를 바로 잡을 수 있다.

한편 NHK는 아날로그전송이 가전제품용으로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NHK는 이 기술이 이미 실증되었고 수신장치가 덜 복잡하기 때문에 값도 싸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시스템의 기본방식으로 이미 아날로그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설령 외국의 기술이 우수하다고 해서 쉽게 그 방식을 바꿀 수 없는 입장이다.

한편 일본은 60년대에 HDTV연구를 시작할 때 지상에 바탕을 둔 방송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위성방송방법에 주력해 왔다. 그러나 미국은 지상방송방법을 선호하고 있는 입장이다. 미국이 HDTV 도입에서 일본보다 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동안 미국은 GI사의 경우와 같이 기술상의 중요한 돌파구를 마련했다.

일본이 국내시장용으로 개발한 좀 오래된 기술에 이미 발이 묶여 있는 상태에서 당초의 계획대로 미국의 HDTV시장으로 뚫고 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미연방통신위원회(FCC)는 1993년에 새로운 텔레비전전송표준을 결정하기에 앞서 현재 여섯개의 모델을 신청받고 있으나 그중 아날로그방식의 시스템을 신청한 곳은 NHK밖에 없다. 나머지 제너럴 인스트루먼트/MIT, 필립 톰슨 사노프/NBC와 제니스/AT&T 등이 신청한 전송 시스템은 한결같이 디지털방식을 택하고 있다.

모토롤라의 역습

한때 일본기업의 탁월한 기술과 덤핑공세에 몰려 존폐위기까지 몰렸던 미국의 대표적인 반도체메이커 모터롤라사(Motorola)는 오늘날 일본의 이동전화시장의 20%를 차지하게 되었는가 하면 외국기업으로서는 일본전신전화사(NTT)의 유일한 납품기업이 되었다. 모토롤라는 최근 두개의 신제품을 가지고 일본의 전기통신 경쟁사들의 거센 바람을 잠재웠다. 그중에서 이동용전화 '마이크로테크'는 양복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데 일본 마쓰시타전기사의 제품보다 3분의 1이나 가볍다.

1980년대 초와 중반에 모토롤라는 그동안 지배하고 있던 미국의 '포켓 벨'과 이동용전화시장에서 일본기업에게 밀려난데 이어 피닉스 소재 반도체사업부는 더 큰 타격을 받았다. 세계 제2의 반도체메이커였던 모토롤라사는 일본 반도체의 덤핑공세에 못견디고 불과 몇해 만에 일본의 도시바 히다치사를 먼 발치에서 쳐다보는 위치로 처졌고 가장 많이 팔리는 D램(RAM) 기억용 칩시장에서도 밀려나는 처지가 돼 버렸다. 그리하여 1986년에는 일본의 도시바사 반도체사업부에 병합되면 어떻겠는가 하는 굴욕적인 제의까지 받았다.

그러나 모토롤라사는 과감하게 일본의 수법을 익혀 그것으로 일본의 공세를 되받아치기로 했다. 쉴 새 없이 시장점유율을 파고 들면서 품질을 크게 올리고 제작공정을 갈고 닦는 한편 계속해서 수십억달러를 연구개발 훈련 및 자본재 개선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모토롤라는 일본전술을 단순히 모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미국의 독특한 장점을 첨가했다. 예컨대 일본이 소문날 정도로 허약한 마케팅이나 소프트웨어개발과 같은 분야에서 양키의 노하우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모토롤라사가 1982년 강력한 보호를 받고 있던 일본의 전기통신시장을 뚫고 들어 가게 된 것은 일본전신전화사의 요구를 정확하게 충족시키는 '포켓용 벨'을 개발한 것이 계기가 됐다. 모토를라의 손목용 '삐삐'는 이 기업의 엔지니어들이 3년간에 걸쳐 타이멕스사와 제휴, 부품의 수와 크기를 줄여 결국 손목시계 속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모토롤라사는 먼저 설계 제작 및 마케팅부와 같이 여러 부(部)로 갈라 놓은 데서 비롯된 전통적인 벽을 무너뜨렸다. 특히 새로운 프로젝트를 착수할 때는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처음부터 공동참여함으로써 제품은 시작부터 고객이 바라는 특성을 제공하도록 설계된다.

예컨대 쌍방향 라디오생산라인에서는 주문을 받고 출하하는데 종전에는 30일이나 소요됐으나 이제는 3일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동용 전화의 경우에는 설계단계부터 제품이 나올 때까지 이제 15개월 걸리지만 1985년에는 3년의 세월이 소요됐다. 또한 전품목을 통해 불량품률은 1983년의 1백만개 제품당 3천건에서 현재는 2백건 이하로 격감됐다. 이러한 강력한 품질향상 노력으로 모토롤라는 연간 2억5천만달러의 절감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리하여 90년 6월에는 여섯개의 일본 기업과 한개의 유럽기업을 물리치고 모토롤라의 기술은 일본정부로부터 차세대 이동전화의 표준기술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미국기업들이 일본의 품질과 고객서비스 수준과는 경쟁할 수 없다고 흔히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세계적인 카메라메이커인 캐논의 가장 잘 팔리는 EOS 35mm 카메라의 심장부에는 모토롤라사의 마이크로프로 세서가 들어 있다. 캐논사는 모토롤라사가 품질은 물론이고 뛰어난 설계의 전문성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캐논사가 1983년 EOS 싱글렌즈 레플렉스 개발에 착수했을 때 처음에는 일본의 3개 메이커와 접촉을 했으나 모토롤라만큼 열의가 없었다. 모토롤라사는 당시 자동차시장용의 특성화된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설계하고 있었는데 이 반도체칩을 카메라용으로 만들어 달라는 청을 받았다. 모토롤라의 엔지니어들은 열성적으로 카메라용 칩을 다듬었을 뿐 아니라 두개의 다른 중요한 부품까지 고안해 캐논에 제공했다.

그중의 하나는 카메라와 렌즈간의 전력을 전달하는 미니 스위치였고 다른 하나는 캐논의 자동초점맞추기 시스템을 움직이는 소형 모터용 제어기였다.
 

카메라의 종주국이었던 독일을 제치고 세계정상에 올라선 일본산 카메라. 최근에는 미국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내부에 장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실패한 승강기

1982년 오사카에 본사를 둔 일본의 승강기 메이커 후지테크사의 우치야마사장은 뉴욕타임스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곧 본사를 뉴욕으로 옮기고 자기도 1백만달러짜리 아파트에서 살면서 오하이오주에 수천만달러의 공장을 짓고 1985년에는 연간 5억달러의 매출고를 올리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시장 개척에 실패, 4천3백만달러의 적자를 내고 말았다.

미국전문가들은 후지테크의 실패원인을 판매목표를 하나의 지역에 집중시키지 않고 미국 전역에 걸쳐 펼쳐 놓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비평가들은 또 이 기업이 미국시장의 분위기도 채 파악하기 전에 미국공장을 추진했으며 강력한 보수서비스망을 구축하는 일을 등한시했다고 말하고 있다. 오하이오공장은 계획보다 2년 늦게 완공됐으나 미국시장의 점유율은 2%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물론 본사는 아직도 오사카에 자리하고 있다. 일본기업들의 문제는 일본에서 잘 됐으니 미국에서도 잘 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다고 비평가들은 꼬집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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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현원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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