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세의 나이로 망원경 하나하나에 혼을 불어넣고 있는 김한철씨는 아마추어천문가들의 대부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분이 아직도 망원경의 반사경을 갈고 있다. 기자가 찾은 날(5월13일) 1천9백1번째의 반사망원경을 막 끝내고서 장부에 기록하고 있었다.
김한철씨(65). 남들 같으면 집안에 앉아 손자손녀들 재롱이나 보면서 여생을 편안히 보낼만 하건만, 집(부평)에서 두시간씩 걸리는 작업장(성동구 구의동)에 나와 매일같이 망원경의 반사경을 갈고 있는 것이다. 작업장이라지만 선반 드릴링 용접기 등이 빽빽이 들어찬 10여평의 공장과 너댓평의 사랑방이 고작이다. 주변에는 고층빌딩이 들어서고 있지만 김씨의 작업장은 말 그대로 하꼬방에 불과하다. 이속에는 10여대의 망원경이 전시돼 있고 '서울천문동호회''대학생 아마추어 천문 연합회''한국 아마추어 천문학회'등 각종 아마추어 천문단체들의 간판과 조그만 플래카드들이 걸려있다.
김한철씨의 공식적인 직함은 망원경을 제작해 판매하는 선두과학사 사장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나라 '아마추어천문가들의 대부'로서 잘 알려져 있다. '대부'라는 말에는 여러가지 뜻이 담겨져 있다. 본인은 "대부는 무슨 대부, 장사치일뿐이지"라고 자기 비하를 하지만 주위의 평가는 그렇지 않다.
우선 김한철씨가 직접 제작하고 그의 고유 넘버가 새겨진 1천9백여개의 망원경은 전국에 퍼져 아마추어 천문가들의 손과 발이 되고 있다. 아마추어천문가치고 김씨가 손수 갈아 만든 망원경을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또하나 김씨의 작업장에 마련된 너댓평의 공간은 아미추어 천문가들의 '사랑방'이다. 지방에서 올라온 아미추어들이 묵고가는 숙소이며 스스로 망원경을 제작하려는 학생들이 밤을 새면서 반사경을 가는 작업장이다. 이 사랑방에는 20여명이 동시에 끓여먹을 수 있는 취사도구가 마련돼 있다. 김씨는 이들에게 돈 한푼 받지 않고 숙식을 제공할뿐더러 때에 따라서는 재료비도 대준다. 밤을 새울 때는 같이 동고동락하며 자신이 그동안 터득한 기술적 노하우도 전수한다.
김씨는 망원경을 판매해서 남은 이익을 한 푼도 집생활비에 쓰지 않는다고 한다. 3남1녀 자식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워 세칭 1류대학 1류회사에 보냈더니 노인네 둘이 쓸만큼 충분히 용돈을 보내준다는 것. 선두과학사의 직원은 김씨말고 한명뿐이다. 모든 작업은 김씨 혼자서 하고 판매일을 맡은 여직원이 하나있을 뿐이다. 이 여직원도 '별보는 일에 미쳐' 시집가는 일도 마다하고 무료봉사하는 노처녀(35살)다. 이외에는 방학때 학생들을 아르바이트로 쓰는 것이 유일하다.
자연히 망원경 팔아서 남는 조그만 이익은 아미추어 천문가들의 뒷바라지에 쓰인다. 어차피 이 분야가 '밑빠진 독'이지만 돈버는 일에는 무능한 아마추어 천문가에겐 '사막의 오아시스' 이상이다. 현재 김한철씨는 새로 이 통합단체로 탄생한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KAAS)의 고문으로서 학회 운영에 물심 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깨진 안경알로 달 분화구를
"요즘 누가 달을 보며 계수나무 아래 떡방아 찧는 토끼를 상상이나 합니까. 은하수니 반달이니 하는 말도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만 별보는 이들에겐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 있습니다. 이를 지켜나가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망원경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김한철씨가 망원경과 인연을 맺게된 것은 오래 전 일이다. 중학교 1학년 때 할아버지의 깨진 안경알 하나를 몰래 훔쳐다(당시 안경 값은 벼 두섬 값이었다고 함) 죽대(대나무통)를 이용해 원시적인 망원경을 만들었다 한다. 이를 통해 달분화구를 보고 아름다움에 도취됐던 것이 첫경험. 그 이후 라디오에 잠시 빠졌다가 파일럿의 꿈을 키워나갔다(일제시대 때 2등활공사 자격증도 획득). 만주 여순공대 입학과 동시에 해방을 맞아 엔지니어로서 대성의 꿈은 접어두고 장사를 시작했으나 하는 족족 실패만 했다.
잠재됐던 엔지니어의 꿈이 되살아났던 것은 국민학교 4학년에 다니는 큰아들의 방학 숙제를 해주면서였다. 안경점에 가서 볼록렌즈 하나 구하고 종이 원통을 이용한 망원경을 만들어주었더니 특상을 받아가지고 왔다. 이를 계기로 71년에는 방직공장에서 나오는 원단심(경통)에다 볼록렌즈를 조립해 본격적으로 망원경을 제작했다. 신문사에 다니는 친구 하나가 광고까지 해줘 전국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재료비라고 해봐야 얼마 들지 않았으나 판매가격은 재료비의 10배까지 받았다. 2,30개를 파니 갑자기 창고에는 쌀가마가 쌓이고 부엌에는 연탄이 그득하게 쟁여졌다.
이를 밑천으로 과학완구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교재장사에 나섰다. 한때는 미도파 신세계 새로나 동인천지하상가 등 유명백화점에 지점까지 설치할 정도로 사업은 번창했다. 망원경도 60mm 굴절식을 수입해 들여와 판매했다.
그러나 욕심이 지나치면 화가 미치는 법.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과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아마추어천문가라야 몇명 안되는데 망원경을 그렇게 비싸게 팔았으니 저변 인구가 확대될리 있겠습니까. 싸게 팔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해 새로운 수요를 불러야 장단이 맞는건데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셈이었지요." 79년 김씨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일본에 있는 친구들을 보러 갔다. 돌아오면서 책을 한보따리 사왔는데, 대부분 내용은 아마추어들의 망원경 자작법. 밤을 세워가면서 책을 숙독하고 망원경을 제작하는 기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선반과 용접기를 들여오고 연마기를 만들어 직접 제작에 나섰다. 3인치에서 부터 12인치 반사망원경까지 온갖 정성을 다해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만들었다.
혼을 불어 넣는다
이때부터 김씨는 본격적으로 천체 관측도 시작했다. 이전에는 단순히 망원경을 판매하는 장사치였지만, 이때부터는 아마추어천문가로서 본격 입문을 한 셈. 4, 5년전부터는 고객이자 제자들인 아마추어 천문가들을 따라 도시락을 싸들고 별이 잘보이는 시골로 원정도 다녔다. 최근에는 눈이 나빠져 목성의 줄무늬조차 분별하기 어려워졌지만 별을 헤는 기쁨은 더욱 깊어만 간다고 한다.
김씨가 제작하고 있는 4인치 반사망원경은 일본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다. 그만큼 정성을 다해 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17만원 밖에 받지 않지만 어떤 때는 한개를 만드는 데 4, 5일 넘게 씨름하는 경우도 있다. "망원경 렌즈를 단순한 물체로만 생각하지 않아요. 렌즈를 갈다보면 렌즈가 짜증을 내는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계속하면 불량품이 나오기 십상이지요. 제가 만든 망원경을 막내 아들이나 손자뻘 되는 애들이 쓰는데 어떻게 불량품을 내놓습니까. 짜증을 내면 달래기 위해 쉬어가면서 합니다."
김씨는 자기의 고유번호가 붙은 하나하나의 망원경에 혼을 불어넣고 있는 셈이다.
나이가 들어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느냐는 질문에 "단순한 공업제품이 아니라 예술품이기 때문에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정신집중이 잘돼 좋은 제품이 나오는 것 같다"고 대답한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 망원경을 사러 대전에서 올라왔다는 아가씨가 어렵게 집을 찾았다며 투덜거리면서 들어서기도 했다. 선두 과학에서는, 아니 김씨의 사랑방에서는 세계에서 발간되는 모든 천문잡지도 볼 수 있을 뿐더러 천문정보를 위해서라면 국제전화와 팩시도 무료다. 일반인을 위해 매주 천문정보 안내전화도 가설해 놓았다(02)455-1772. 때문에 전화요금만 해도 1년에 3백만 원씩 나온다고 한다.
지금까지 김씨의 사랑방에서 먹고 자며 망원경을 갈았던 인원은 1백20여명. 이들 중에는 이미 사회의 각분야에 진출해 자리를 잡은 사람도 많다. 김씨는 이들이 오며 가며 여름에는 음료수, 겨울에는 군고구마를 사들고 들를 때가 가장 기쁘다고 한다. 하루빨리 이 일을 이어갈 후계자가 생겼으면 하는게 김씨의 속마음이다. 하지만 선뜻 권할 수 없는 것이 자신이 워낙 고생을 했고 미래가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물욕을 버릴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