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컷은 여느 나방처럼 훨훨 날아다니지만 암컷은 일생동안 도롱이 속에 갇혀 사는 왕도롱이 나방의 생태를 살펴보자.
나비목에 속하는 왕도롱이나방 또는 왕도롱이벌레(Clania formosicola, STRAND)라는 것이 있다. 성충에 해당하는 왕도롱이나방은 수컷이고 왕도롱이벌레(몸길이가 30mm내외)는 암컷이다.
이들은 실로 특이한 종으로 수컷의 성충은 다른 나방과 같이 훌륭하게 발달된 눈과 날개 그리고 세쌍의 다리가 있어 날아 다니지만, 암컷의 성충은 촉각도 다리도 눈도 날개도 없다. 다만 말랑말랑한 흰색의 구더기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을뿐이다.
이들은 어린 유충기부터 도롱이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1령기의 유충 때부터 나뭇잎이나 아주 가늘고 짧은 나뭇가지 등을 유충 자신이 토해낸 실로 엮어 방추형의 도롱이주머니를 만들어 낸다. 도롱이는 양단이 열려 있는데 한쪽은 왕도롱이벌레의 머리와 가슴이 드나드는 출입구이며 또 한쪽은 배의 일부를 밖으로 내 보내 배설을 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6월 하순에서 7월 초순 사이에 알에서 부화되는데, 부화된 유충은 길이가 2mm정도이고 세쌍의 흉각(胸脚)으로 몸을 지탱한다. 복부를 가슴 등쪽으로 높이 올려 물구나무를 서서 걸어다니다가, 1령 유충은 나뭇잎과 나무 줄기 위에서 도롱이를 만들기 시작한다.
왕도롱이벌레는 도롱이속에서 1령 2령 3령 4령 5령으로 성장하면서 탈피를 되풀이 한다. 5령쯤 되면 입이 커져 섭취량도 많아진다.
왕도롱이벌레는 한번 도롱이를 만들면 그 후에는 그 나무에서 딴 곳으로 이동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입에서 실을 토해내 나뭇가지에 꽉 매어 고정시킴), 나뭇잎이 딱딱하거나 즐겨 먹지 않는 식물이면 고정시킨 나뭇가지의 실을 끊고 적당한 먹이를 찾아 활발하게 이동한다.
성장한 왕도롱이벌레는 9월 중순에서 10월에 걸쳐 월동준비를 하는데, 연필만한 굵기의 나뭇가지에다 토사한 실을 몇번씩 되풀이해 감는다. 겨울에 눈보라가 쳐도 도롱이가 떨어지지 않게 튼튼한 띠를 만들기 위함이다.
중부 이북에는 살지 않는다
왕도롱이벌레는 열대성 곤충이므로 중부 이북에는 살지 않는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라북도 군산 이리, 경상북도 대구 포항 등에서 월동하는 왕도롱이를 발견할 수 있었으나 이 지역보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목격할 수 없었다. 만약 여름에 목격했다 해도 그 왕도롱이벌레는 온도가 낮아 체력이 떨어져서 죽게될 것이다.
남부지방의 왕도롱이벌레는 겨울동안 도롱이의 상단 쪽에 머리를 두고 동면한다. 5월이 되어 따뜻한 기온이 계속되면 도롱이의 하단 구멍쪽으로 머리를 둔다. 그 위치에서 번데기로 되기 전의 탈피가 전행된다. 유충에서 탈피된 번데기는 굵은 몸통에 몸마디가 눈에 띄기는하나, 머리 가슴 배의 경계가 불확실하다. 촉각 겹눈 날개 다리 등 성충의 준비단계로 볼 수 있는 기관들의 형성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번데기는 약 1개월이 소요되는데 5월 하순에서 6월 상순에 번데기로부터 우화(羽化)한다. 우화가 이루어 질 때는 도롱이의 하단 구멍에 번데기의 머리를 내밀고 번데기속에서 왕도롱이나방이 밖으로 나오게 되는데, 이 때는 온몸의 힘을 날개로 보내 날개의 주름을 편다.
오전중에 우화한 왕도롱이나방은 해가 지고 어두울 무렵에도 도롱이 위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다. 다갈색으로 된 날개는 도롱이에 붙은 마른잎과 비슷한 훌륭한 보호색을 갖고 있다. 가늘고 긴 앞날개, 그리고 복부의 모양은 비상력(飛翔力)이 강함을 보여준다.
한편 왕도롱이벌레의 암컷은 수컷보다 며칠 늦게 번데기로 탈바꿈하는데 번데기의 기간은 수컷보다 짧아서 비교적 일찍 성충으로 돼 수컷을 기다린다. 몸의 외부형태는 아주 퇴화돼 있어 곤충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다. 다만 복부의 연동운동(蠕動運動)으로 번데기의 탈각(脫殼)속에서 아래 위로 이동할 따름이다.
페로몬으로 수컷을 유인
그럼 이들은 배우(配偶)행동을 어떻게 할까. 배우행동이라는 것은 같은 종류의 수컷과 암컷이 생식을 하기 위해 자연상태에서 교배하는 행동을 말한다. 배우행동은 그 절차에 따라서 우선 교배하는 상대를 찾아 내기까지의 행동과 암수가 서로 만나서 반응이 일어나 교배가 이루어지기 까지의 행동, 그리고 교미중의 행동을 들 수 있다.
왕도롱이의 수컷은 암컷보다 일찍 성충으로 돼, 우화(羽化)한 곳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수목의 줄기라든가 굵은 가지 같은데서 죽은듯이 쉬고 있는데, 저녁 7시경이 되면 쉬고 있던 왕도롱이나방은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암컷의 근처를 배회한다. 이처럼 수컷이 암컷을 찾을 수 있는 이유는 암컷이 페로몬(pheromone)이라는 유인물질을 분비하기 때문이다.
페로몬은 수생동물들의 경우에는 물에 용해돼 물속에서 확산되며 육생동물에서는 공기속에서 확산되는데, 그 확산 범위는 반경 2~3m에 지나지 않는다.
왕도롱이벌레(암컷)는 저녁 7시에서 8시경이 되면 도롱이의 하단부분 구멍에 머리와 가슴 부분을 내놓고 성페로몬을 분비해 밖으로 확산시킨다.
한편 수컷의 성충은 하루종일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저녁이 되면 빙글 빙글 춤을 추듯이 중심을 잃은 것처럼 날아 다니며 암컷을 찾아 나선다. 눈으로 암컷을 찾는 것이 아니고 바람을 타고 확산되는 페로몬을 촉각으로 감지하면서 배우자를 찾는다. 암컷에 접근하면 암컷이 들어있는 도롱이 하단에 앉아 도롱이의 표면을 핥으면서 걸어 다니다가, 도롱이 하단 구멍에 도달하면 수컷은 복부를 조심스럽게 꾸부리면서 도롱이 속으로 넣는다.
이 때 암컷은 도롱이 속에서 몸을 움추리고 있다가 도롱이 하단 구멍에 수컷의 복부 미단(尾端)이 들어오는 것을 맞는다.
아주 짧은 시간에 수컷 흉부의 후반부와 뒷다리까지 암컷의 도롱이속으로 들어간다. 이 때는 수컷 복부의 절간막(節間膜)이 늘어나기 때문에 복부는 약2배 이상으로 길어진다. 이 때 수컷 복부의 교미기는 암컷의 교미구(交尾口)를 파악해 교미가 개시되는데, 교미 시간은 약 20분간 지속된다. 어떤 것은 약 6시간 까지도 교미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교미가 끝난 암컷은 하루가 지나면 1천~2천개의 알을 암컷이 들어있던 번데기 탈각속에 산란하는데, 그 알은 솜털과 같은 것으로 이중 삼중 둘러 싸여져 있다. 부화된 알은 2~3주일 후 유충으로 부화돼 도롱이의 하단구멍으로 탈출한다. 실을 토해내 그 실을 타고 아래로 내려오거나 바람에 날려서 다른 나무로 옮겨진다. 유충들은 즉시 도롱이를 형성시켜 그 속에 들어가서 생활하면서 1령기에서 부터 5령기까지 나뭇잎을 섭식하는 것이다. 감나무 자두나무 모과나무 은행나무 등 많은 나뭇잎이 식수(食樹)로 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