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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수어표본 50만점 기증한 생물학의 큰 스승 최기철 박사

지금까지 모아둔 자료를 잘만 활용하면 생물의 '친화도에 관한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예요.

"75년까지 서울대 생물교육과에서 동물생리학 강의를 하다가 정년을 맞았으니 현직을 떠난지 벌써 15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정년퇴직후에 더 많은 일을 한 것 같아요. 사실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에는 연구에 전념할 시간이 부족했어요. 강의해야지, 제자들 신경 써야지…"

우리 나라 동물생리·생태학계의 큰 스승 최기철(崔基哲, 80)박사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새로운 연구계획표를 짜고 있다. 그것도 한두달 만에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10년쯤 해야 완성할 수 있는 수고스러운 작업에 자신을 철저히 바칠 각오다.

'그까짓' 10년짜리 연구는 이미 해본 경험이 있고 건강에도 별 문제가 없어 시작한 일을 '미완성'으로 남겨 놓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해 하는 최박사의 모습에서 진정한 학자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요즘 그가 주로 연구하고 있는 대상은 담수어, 즉 민물고기인데 이 민물고기와의 인연은 참으로 우연한 기회에 맺어졌다.

"1962년의 일입니다. 강릉에 급히 볼일이 있어 모처럼 비행기를 탔는데 기내에서 본 태백산맥은 한마디로 충격적이었습니다. 미국의 로키산맥을 내려다 보면서 느꼈던 감동을 다시 맛보게 된 것이지요. 산맥이라고 하면 그저 뾰족한 것으로만 생각해 왔는데 능선을 중심으로 양쪽에 엄청나게 넓은 땅덩어리가 펼쳐져 있었어요. 순간적으로 태백산맥 동·서쪽의 생물상이 큰 차이를 나타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어요."


최기철 박사
 

●- 민물고기의 미세구조를 밝히고

그 길로 그는 설악산으로 향했다. 강릉에 간 본래 목적은 아예 취소한 채로. 그런데 고향인 대전에서 흔히 보았던 피라미 모래무지 등이 이곳에는 없는게 아닌가. 여기서 최박사는 생물학상의 '신천지'를 본 것이다.

"일을 하다 보니 어떤 물고기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또 왜 존재하는지 알고 싶어졌어요. 다시 말해 각 종(種)의 미세분포(micro distribution)지도를 작성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때 그는 벌써 칠순을 넘기고 있었다. 팔도의 1천5백개면을 10년 동안에 돌기로 마음 먹은 최박사는 조교 2명과 함께 이를 어김없이 실천에 옮겼다. 1주일에 보통 나흘은 낯선 외지에서 물고기를 채집하고 밤늦도록 그 결과를 기록해 두었다. 대개는 하루에 3~4개면을 찾았지만 어떤 날은 종일 1개면에서 보낼 때도 있었다.

"한 곳에서 30번 정도 그물을 던져 채집한 2백50마리의 물고기를 모두 통에 담아 가지고 왔어요. 물론 통에는 채집장소와 날짜를 적어 두었구요. 그날 밤에 숙소에 와서는 이들 채집물을 종별로 나누고 그 결과를 노트에 기록했습니다. 나중에 이것을 다시 카드화 했죠."

이렇게 해서 작성된 카드가 모두 4천9백73장. 이는 전국의 크고 작은 하천 4천9백73개소를 돌았다는 얘기와 마찬가지다. 채집과 분류로만 끝난다면 이 일은 간단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을 요하는 작업을 남아 있다. 정리해서 책으로 펴내는 일이다.

"각 도별로 책 한권씩을 내기로 하고, 원고를 작성했어요. 총 8권중 현재 7권이 나와 있습니다. 아직 출판되지 않은 '경북'편도 원고가 이미 완성된 상태예요. 4.6배판으로 제작한 이 책은 권당 3백50~3백90페이지고, 비매품입니다."

최박사는 자신의 응접실 가까이 있는 어항 하나를 가리켰다. 그 어항 속에는 물고기 7~8마리가 한가로이 유영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부 다른 종입니다. 하지만 모두 사이좋게 지내지요. 그러나 그 속에 어떤 고약한 물고기가 들어가면 금방 분란이 일어납니다. 물고기들 중에도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놈이 있고, 같이 못사는 놈이 있어요. 이것이 생물의 공존도인데, 아직 그 방면의 체계적인 연구가 거의 없습니다."

바로 이 일이 그가 앞으로 10년을 투자해야 할 과제다.

누군가는 시도했음직한 생물의 공존도에 대한 연구는 놀랍게도 전세계적으로 실적이 거의 없다. 따라서 그는 관련 어느 외국논문의 참고도 없이 그야말로 백지상태에서 첫 획을 그어야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비밀병기가 있어 마음 든든하다. 10년 넘게 발로 뛰어다니면서 작성해 둔 카드가 바로 비장의 무기다.

"카드의 내용을 전부 컴퓨터에 입력시켜 두었어요. 이 평생의 자료를 잘만 활용하면 생물의 친화도에 관한 원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울러 다음 세가지를 연구해 볼 생각입니다. 어떻게 하면 물고기를 편히 살게 할 수 있을까, 인간의 간섭으로 물고기의 생활환경이 어떻게 변하는가, 또 어류는 어떤 과정을 거쳐 흥하고 망하는가를 밝혀보고 싶어요."

이미 그의 안목은 딱딱한 동물생리학이나 동물생태학의 차원을 벗어나 물고기와 대화하는 동물심리학 동물철학에 이른 듯 싶었다.

경술국치의 해에 태어난 탓인지 최박사의 극일(克日)의지는 남달랐다. 물고기와 씨름해 가면서 전국을 헤맨 뒷 배경에는 내분야에서만이라도 일본을 앞서야겠다는 그의 집념이 숨어 있다.

대화가 자연보호로 옮아 가면서 그의 목소리는 한 옥타브 올라갔다. 현재 자연보호중앙협의회 위원이기도 한 최옹은 자연보호를 학자와 관료들만 하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국민들이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정보의 은폐도 문제지만 각종 환경오염도를 나타내는 용어가 무척 어렵다는 점이 더 심각해요. ppm이니 BOD니 하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거든요. 국민들이 실상을 바로 알고 자발적으로 보호해야겠다고 느껴야 그에 대비한 행동을 할 수 있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행동에 옮길 수는 없는 일이지요."

자연보호와 관련된 강의를 매년 50회이상 하고 있는 송박사지만 녹색당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평생 정치활동은 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국내의 담수어 총 1백45종 중 30종이 멸종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외국에라도 있는 종이라면 별 문제될 바 없지만 우리나라에 밖에 없는 종이 위기를 맞고 있다면 당연히 서둘러 보호에 나서야지요."

최근 그는 20년 넘게 보관해 두었던 담수어 액침표본 50여만점을 대전 과학관에 선뜻 기증했다.

"서울대에 줄까, 과학관에 줄까 망설이다가 과학관이 보다 대중적이라는 판단에 과학관에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자연사박물관이 있다면 주저없이 그곳에 주었을 거예요."

최박사는 표본기증 직후 정근모과기처장관으로부터 감사전화를 받았다. 이때 표본을 싣고 방방곡곡을 찾아가는 '이동 과학관' 계획을 듣고 무척 기뻤다고 한다. 70여평의 이층집을 가득 채웠던 액침표본들이 7t트럭 3대에 실려 대전으로 내려갈 때 최박사보다는 그의 손녀들이 더 많이 울었다고.

유형재산이라고는 집 한채 뿐인 최박사는 이것도 마지막 연구를 위해 '내던질' 작정이다. 4년전에 부인 이복순여사와 사별하고, 3남5녀의 자녀들도 모두 출가시켜 이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연구에만 몰두할 생각이라고 한다.

아침 5시에 일어나 7시까지 그는 머리쓰는 일을 주로 한다. 연구계획구상이나 원고작성도 이때 이루어진다. 그후에도 그는 강의준비로 쉴 틈이 없다. 실제로 그는 서울대(명예교수)와 단국대에서 일주일에 강의 3시간, 실험 4시간을 맡고 있다. 강의과목은 동물생태학과 동물생리학.

책도 참 많이 남겼다. 정년후에 집필한 서적만도 23권. 최근에는 자신의 일생을 돌이켜 본 수상록을 탈고, 곧 출판될 예정이다. 원고지 1천7백매 분량인 이 책의 서명은 '푸른꿈 하얀꿈'이다.

두시간여에 걸친 대화가 끝날 즈음 그는 자신의 집을 안내해 주었다. 최박사의 방에는 수많은 책들이 빼곡이 차 있었는데, 그중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은 분신과 다름없는 13권의 관찰기록 노트였다. 2층에는 대학원생들과 세미나를 할 수 있는 방이 따로 마련돼 있었는데, 요즘은 동네 국민학생들이 더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신기한 어류의 표본을 직접 보고 또 생물박사 할아버지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 위해서다.

율곡 이이를 존경해 그의 삶을 추종해 왔다고 말하는 최박사는 지금도 지치고 힘들 때면 율곡이 즐겨 찾던 임진강을 돌아 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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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박태균 기자
  • 사진

    전민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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