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한국과 일본의 고대 유리기술이 연결돼 있느냐를 놓고 펼쳐진 한·일학자들의 논쟁이 뜨겁다.

나무와 돌, 청동과 철기가 일상생활용품의 거의 전부였던 고대인(古代人)에게는 그릇도 토기일 수밖에 없었다. 청동기의 황금빛과 금과 은의 현란함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 시기의 생활용품은 흑백사진과도 같은 단조로운 색깔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아름다운 색깔의 천연돌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런 돌들은 아주 드물었고 게다가 가공해서 빛을 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금과 은, 그리고 천연 돌이 장식품으로 얼마나 귀중하게 여겨졌는지, 현대인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흙과 불의 신비

여기에 등장한 것이 유리였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제품 중에서 가장 훌륭한 발명품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그 투명한 아름다움, 그것은 고대인의 단조로운 생활에 청량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흙과 불이 조화를 부려서 만들어낸 작품인 유리는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갖는 물건이다. 흙과 불은 청동과 토기와 쇠를 만들어 냈지만, 유리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기술이었다. 고대인에게 그 투명함이 주는 충격은 너무도 컸다. 실제로 유리제품은 오랫동안 금·은 보다 오히려 값이 비쌌다.

유리 제조기술의 기원은 도기문화(陶器文化)와 연결된다. 토기를 구울 때 때때로 그 표면에 나타나는 자연유(自然釉)가 일종의 유리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유(釉)는 염기성의 나트륨(Na) 칼륨(K) 산화칼슘 산화마그네슘 산화납 등과 중성의 산화알루미늄, 산성의 규산 붕산 등으로 된 유리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토기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녹유(綠釉)는 알카리 유(釉)의 염기가 태토(胎土)에 섞인 납 성분에 의해 치환된 연유(鉛釉)다. 다시 말해 가장 단순한 저화도(低火度)의 유리다. 그것은 약 30%의 규산에 70% 가량의 산화납, 그리고 2~3%의 녹청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알루미나는 거의 포함돼 있지 않다. 유(釉)라기 보다는 규산납 유리, 곧 납유리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자연유 아닌 납유리가 따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봐야 하는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일본 야요이(彌生)시대의 미구모(三雲)유적에서 찾아낸 유리벽(壁)이 납유리고, 중국에서 많이 발견되는 유리벽과 그 성분이 거의 비슷하다는 점은 인정되고 있다. 이 사실로 유추컨대 미구모의 유리벽은 한반도를 거쳐간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사이에 납유리가 처음 제조됐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고고화학자 야마자키(山崎一雄)의 분석에 따르면 한대(漢代)의 유리벽은 납(Pb) 24.5%, 바륨(Ba) 19.4%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중국의 경우 한때 성행했던 납유리의 제법이 그후 한동안 잊혀진 것 같다"고 주장했다.

또 '위지'(魏志) 서역전(西域傳)에는 대월지(大月氏)의 상인이 위 세조 때(5세기 전반) 산중에서 돌을 캐내서 유리를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유리는 서역계의 기술자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서방으로부터의 수입품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것들은 모두 이집트에서 시작된 소다유리 계통의 유리일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에서 끊어졌던 납유리의 전통은 수(隋)의 개황(開皇, 581~600년) 연간에 다시 일어났다.

중국보다 떨어져야 「정상」
 

유리구슬 목걸이와 귀고리^경주 출토, 신라(5~6세기), 경주박물관
 

지금까지의 조사에 따르면 4세기에서 6세기경의 우리나라 고분에서 출토된 유리그릇과 많은 유리구슬은 모두가 소다유리(알칼리 석회유리)다. 이 사실은 서봉총(瑞鳳塚) 금령총(金鈴塚) 금관총(金冠塚) 등에서 발견된 5개의 유리그릇에 대한 분석결과 밝혀졌다. 이들은 모두 비중이 2.4 가량이었고 정성적으로 납이 검출되지 않는 소다유리였다.

유리구슬은 금관총에서만 3만개가 출토됐다. 최근에 와서도 공주 무령왕릉과 경주의 고분(98고분 천마총 등), 그리고 상주(尙州)지역과 가양의 유적들에서 비슷비슷한 것들이 1만개 이상 발굴됐다.

그중에는 유리곡옥(曲玉)도 있었다. 유리곡옥은 한국과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장신구다. 일본에서는 한국의 영향을 받은 유물이 다수 발견된 규슈(九州) 스구(須玖)유적 (B.C. 2세기~A.D. 3세기)에서 나오고 있어 특히 주목된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한국과 중국중 어느 나라가 먼저 소다유리를 제조했느냐 하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소다유리가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를 5세기 전반으로 잡고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4세기~6세기 고분에서 발견된 소다유리 구슬을 어떻게 봐야 할까.

해방전 일본학자들에 비해 한반도에서 나오는 유리제품이 소다유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들은 그릇의 양식을 들어 서역에서 들여온 수입품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만일 그 유리들이 납유리였다면 일본학자들은 아마도 중국에서 수입된 유리라고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들은 그런 선진적인 기술의 소산이 한국에서 이루어졌다는 데 극히 회의적이었다. 한국의 기술은, 그들 생각으로는, 서역이나 중국보다 언제나 뒤떨어져 있어야만 정상이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나는 늘 오류가 있다고 여겨왔다. 철기시대 유적에서 나오는 유리구슬이 서역에서 수입한 것이라는 학설에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철기시대에 서역과 그러한 교류가 있었다는 흔적을 고고학적으로 찾기 어렵다는 데 근거한 생각이다.

고신라의 고분들에서는 10여만개의 유리구슬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그 시기에는 서역과의 교역이 있었다. 하지만 10여만개나 되는 많은 유리구슬을 모두 수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수입했다면 유리곡옥도 서역에서 들여왔을 것이다. 그러나 유리곡옥은 한국과 일본에서만 출토되는 독특한 장신구다. 일본의 곡옥도 한국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학설이 이미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여러 증거들을 통해 추론컨대 신라의 유리곡옥은 한국에서 만들어졌음이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유리구슬들이 서역에서 수입됐다는 견해는 잘못인 것 같다.

한국에서 유리를 만드는 기술이 자체적으로 생겨났다고 보면 안될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유리 제조기술에 다른 지역의 세련된 기술이 흘러들어와 더 훌륭한 기술로 발전했다고 보는 견해는 왜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삼국 및 통일신라의 공예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같은 시기에 이란과 페르시아지역에서 만들어진 것과 비슷한 유리제품을 한반도에서도 손색없이 만들 수 있었다.

신라의 고분들에서 나온 유리그릇 중에는 서역산(産)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아마도 서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그곳에서 만든 화려한 유리그릇들이 수입됐을 것이다. 왕릉이라고 믿어지는 고분들에서 출토된 유리그릇들은 그 왕대에 내왕한 사신들이 바친 것이라고 생각된다. 훌륭한 서역의 유리그릇을 보고 한국의 유리 공장(工匠)도 더 좋은 유리제품을 만드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백제의 유적에서 나온 유리제품이 더 한국적인데 비해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은 서역의 영향이 확실히 짙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두 나라의 서역과의 교류에서 나타난 기술사의 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유리제품의 원산지가 어디냐 하는 문제는 브릴(Brill)이 창안한 유리 속에 포함된 납의 동위체 비(比) 측정 등과 같은 실험고고학적 방법으로 풀어낼 수 있다.

유력한 증거물, 유리곡옥
 

유리구슬 목걸이와 곡옥^경주 금관총 출토, 신라(5~6세기), 목걸이 좌상의 길이는 20cm다.


우리나라 철기시대의 유적에서는 유리구슬이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이 유리구슬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2~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도 국내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진 유리제품은 유리구슬이었을 것이다.

유리구슬은 목걸이나 장식으로 쓰였다. 고분에서의 출토상태는 그 용도를 잘 말해준다. 목걸이는 한줄 두줄 또는 서너줄로 해서 걸고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한 가운데에는 유리곡옥이나 옥으로 만든 곡옥을 다는 경우가 많았다.

유리구슬은 아주 인기있고 귀중한 장식품이었다. 옥이 매우 드물게 산출됐을 뿐 아니라 굳어서 가공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동물의 뼈나 돌 조개껍질 등은 그 화려함에서 옥과 견줄 수 없었다.

10여년 전 단국대 박물관팀이 경상도 사천(泗川)의 철기시대 고분에서 발굴한 유리구슬도 그 한 보기다. 당시 한 고분에서는 지름이 5~8mm인 진한 푸른색 유리구슬 10여개가 나왔다. 또 청록색 관옥(管玉) 3개, 금동귀걸이 2개도 함께 출토됐다.

다른 하나의 고분에서는 5mm와 10mm의 녹청색(綠靑色) 유리구슬 3백여개가 3개의 목걸이 장식상태로 발굴됐다. 또 옷(衣)섶의 장식으로 달린 것도 나왔다. 그런 장식에는 호리병 모양으로 생긴 것과 꼬인 모양의 것이 있었다.

한국동란 직후 영남지방의 신라고분군에서 유리구슬의 하나 가득 들어있는 토기항아리가 출토된 일이 있다. 해방전 일본사람들이 경주지역에서 발굴한 신라고분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수십개에서 수백개에 이르는 유리구슬이 나왔다.

신라고분에서 나온 유리구슬들 중에는 지름 1.5mm 가량의 작은 것도 있다. 이 미니구슬은 색깔도 다양해 청 녹 황 적 갈색 등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 특히 유리곡옥은 한국 고대기술의 영향권 안에 있었던 일본지역에서만 출토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서역과의 교류를 통해

일본에서는 유리구슬이 야요이시대 중기 (B.C.1세기~A.D.1세기) 유적에서 많이 나온다. 그 발굴지는 북부 규슈와 세도내해(瀨戸內海)연안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같은 지역의 제한성은 그 구슬들이 한반도의 기술과 연결됨을 시사하고 있다.

일본산 유리구슬의 색깔은 푸른색 계통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뿐더러 알칼리 석회유리다. 이런 분석결과를 통해 일본의 유리구슬이 같은 시기의 한반도 고분에서 나오는 것과 동일한 계통의 유리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부 규슈의 야요이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유리제품에 대한 일본학자들의 해석은 색다르다. 고고학자 고바야시(小林行雄)는 이렇게 말했다.

"유리벽과 같이 분명히 중국제라고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하지만 유리제품을 전부 수입품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곡옥과 같이 그 시대에 일본 이외의 땅에서는 발견된 일이 없는 유물도 역시 유리로 만들어지고 있다.

야요이시대의 유리제품의 일부가 일본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추론(推論)이 갈라질 여지가 남아 있다. 선배 고고학자인 나카야마(中山平次郞)는 스구유적의 유물에 대한 논문(1928년)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는 곡옥은 일본제품이라 할지라도 그 원료인 유리에 대해서는 양론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테면 일본제품으로 보는 설과 중국제품으로 보는 설이 있다는 것이다."(속(續) 고대의 기술, 도쿄, 1964)
일본에서 한국고고학의 대가로 유명한 우메하라(梅原末治)도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유리제품이나 유리원료가 한국과 기술적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최근까지도 일본학자들은 한반도의 거의 전역에서 나오는 유리제품들에 대해 인색한 점수를 주고 있다. 그들은 한국의 고대 유리를 중국 또는 로만 글래스 계통이라고 보았고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을 무조건 평가절하했다. 잘 만들어진 유리제품은 중국이나 로마령(領) 오리엔트에서 수입된 것이고 질이 좀 떨어지는 유리제품은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사실 신라의 고분에서 나온 유리그릇, 술잔, 손잡이 달린 물병 중에는 시리아나 이란에서 출토된 것과 그 모양이 거의 같은 것이 있다. 어떤 것은 완전히 똑같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닮아있다. 그러나 유리전문가들은 그 만듦새가 같지 않다고 말한다. 곧 다른 계통의 기술과 솜씨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로만 글래스의 영향을 전혀 안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서역과의 교류로 좋은 제품들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것을 신라의 유리 공장(工匠)이 본따서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일본 고대의 보물들이 보존되어 있는 쇼소인(正倉院)에는 신라고분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유리그릇이 있고, 유리곡옥이 중국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또 일본의 유리구슬이 한반도의 청동기·철기기술과 연결되는 지역에서만 출토된다는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두 질문은 고대 유리기술에서 한국과 일본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확실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90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전상운 교수

🎓️ 진로 추천

  • 역사·고고학
  • 문화인류학
  • 미술사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