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정연한 도시계획을 통해 세워진 인더스 문명의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는 대부분의 건물이 구워 만든 벽돌로 만들어지고…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인더스문명의 요람 모헨조다로는 광활한 평원이다. 물론 이 평원이 옥토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인도사막이 여기까지 먹어 들어와 사막화된 평원도 꽤 많다. 그러나 인더스강 유역은 역시 비옥한 옥토여서 농산물이 풍부하다. 모헨조다로 근처도 사막화현상이 제법 눈에 띄지만 아직도 비옥한 농경지임은 분명하다.
허허벌판 위에 덩그렇게 닦여진 비행장은 유적때문에 생긴 간이비행장이다. 이 비행장과 유적지는 지척사이고 묘하게 생긴 파키스탄 마차 한대가 수시로 왕복한다.
모헨조다로로 향하는 비행기는 이틀에 한번씩 운항한다. 그래서 이 비행기를 놓치거나 결항일 때면 꼼짝없이 4~5일은 붙잡히게 된다. 바로 이런 교통불편 때문에 세계적인 유적임에도 불구하고 관광객은 의외로 적다.
혜초가 방문한 곳
인더스문명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진 이 곳에는 1천3백년전 신라의 고승 혜초(慧超)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비록 이 유적지를 방문했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그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따르면 혜초는 분명히 이 일대를 다녀갔을 것으로 믿어진다.
모헨조다로 도시유적은 북위 27°19' 동경 68°8'인 인더스강의 지류가 합류하는 지역과 강하구의 중간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이 곳은 '죽음의 산'으로 불리는 황폐한 구릉이었다 이런 무명의 언덕이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지금부터 68년 전의 일이다. 먼저 발굴되기는 하라파유적이었다.1920년 카라치와 라호르 사이의 철도를 놓던중 우연히 하라파유적이 빛을 보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후인 1922년에 모헨조다로 발굴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최초의 발견자는 고고학자 바네르지박사였다. 그의 조사팀이 카니시카왕이 만들었다고 전하는 쿠샨왕조 때의 대불탑을 조사하던 중 탑 밑에서 보다 오래된 유적을 찾아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발굴의 주역은 영국의 존 마샬이었다. 마샬은 발굴결과를 3권의 책(모헨조다로와 인더스문명, 런던, 1931)으로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모헨조다로와 하라파(6백80㎞ 떨어져 있다)가 같은 시기의 유적임을 주장했다.
현재 모헨조다로에서 발굴된 유적은 편의상 크게 4군(중심성곽지 DK지역 VS지역 Hr지역)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원래는 하나의 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도시중심으로 여겨지는 곳은 대불탑의 서쪽에 있는데, 커다란 목욕탕과 창고 등이 남아 있다.
길이 12m, 너비 7m, 높이 6m의 벽돌로 만든 대목욕탕은 종교적인 행사에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정교한 배수로, 거대한 우물시설과 함께 당시의 물숭배 관습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잘 닦여진 길도 경탄을 자아낸다. 동서와 남북의 직각으로 교차되는 길이 바둑판처럼 정연하다. 길이는 대개 1천5백m 이상이고 길 너비는 평균 10m 정도다. 작은 골목길이라 하더라도 너비가 3~4m는 충분하다. 모헨조다로의 길을 보면 누구나 상당히 치밀한 도시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임을 인정하게 된다.
건축물들은 모두 벽돌로 만들어져 있다. 2층 이상의 가옥들이나 우물 상수도 하수도 쓰레기시설 성(城) 등이 전부 벽돌제인데 문화수준 또한 놀랍다. 특히 DK지역을 둘러보면 당시의 모습이 잘 보존돼 있어 그들의 높은 문화수준을 실감할 수 있다.
성곽이 있는 탑언덕 유적지 위에는 쿠샨왕조시대의 거대한 탑이 약간 허물어진 채로 남아 있다. 멀리서 보면 크고 둥근 산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벽돌로 둥글게 쌓은 탑이다.
박물관에는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출토된 갖가지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신(神)상으로 보이는 남자 반선상, 노예나 선주민으로 생각되는 청동소녀상이 눈길을 끈다. 특히 풍부하게 발견된 인장(印章)과 토우는 모헨조다로의 특징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이곳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세가지는 비행기 전기 수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소문대로 수도나 전기는 저녁 때만 되면 두 세시간은 어김없이 끊겼다.
목가적인 하라파
물탄에서 하라파로 가는 길가에는 푸른 들판이 끝없이 전개돼 있다. 이 들녘에는 유채꽃밭과 귤밭이 펼쳐져 있고 한 폭의 그림같은 마을들이 한가로이 누워 있다. 이 곳의 기후는 12월에서 2월 중순까지의 겨울철이 지나면 금세 혹서의 계절이 된다. 보통 45℃를 오르내리는 지독한 더위가 시작되는 것이다.
물탄에서 차로 3시간 40분을 달려 하라파에 닿았다. 물탄~라흐르 간의 대로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하라파유적지에서는 인더스강의 지류를 볼 수 있다. 우거진 숲사이로 흐르는 강물은 모헨조다로의 황량한 경관과 자못 대조적이다. 하라파박물관은 진열실이 30평 남짓한 아담한 단층건물이다. 주로 하라파유적에서 나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 형태나 내용에 있어서 모헨조다로의 것과 대동소이하다.
특히 눈에 띈 유물은 토기(채색토기 무문토기 유약토기)들이다. 채색된 토기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굽이 높은 고배나 구멍이 숭숭 뚫린 그릇도 보였다. 구멍 뚫린 그릇은 화로나 시루(맥주나 치즈를 거르던 것)로 쓰이던 것으로 하라파문명의 특징적 토기이기도 하다.
청동제품은 칼 도끼 창날 화살촉 등이 있는데 뛰어난 수법은 아니지만 B.C.3000년 경에 이런 것들을 만들었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석 마노 홍옥수 조개 등으로 만든 장식구들도 발길을 멈추게 했다. 특히 인더스문명을 상징하는 인장은 단연 압권이다. 사각형의 동석(潼石)에 외뿔소 소 코끼리 악어 그리고 얼굴이 셋 달린 신인(神人) 등을 정교하게 새기고 거기다 그림문자를 새긴 것이다.
그런데 여기 새겨진 문자는 아직도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수메르 문자보다는 낫지만 완전한 표음문자로는 발전하지 못한 이 그림문자는 많은 언어해독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비밀을 털어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단지 글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고 그 다음줄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식을 택하고 있는 것 등 몇가지 점만 밝혀지고 있을 뿐이다.
상공업의 중심지로
이 박물관의 뒤뜰을 지나면 바로 하라파유적이 시작된다. 비스듬한 능선을 오르면 유적들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건물지들이 꽤 잘 남아 있으며 배수로도 금방 찾을 수 있다.
이 일대가 바로 하라파의 성터유적이다. 성의 외형은 평행사변형인데 동서 2백15m, 남북 4백60m 크기이고, 높이는 현재 약 15m다. 여기에 성벽을 높이 쌓았으며 문은 적어도 둘(북문 서문)은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터의 동북쪽에는 시가지가 전개되며, 북쪽으로 가면 주물공장 정미소 곡물창고 등이 있다.
옛날에는 인더스강 지류인 라비강이 이 유적에 면해 있었기 때문에 현재도 강바닥이 보인다. 아마도 이 강안에 선착장이 있었을 것이고, 각 지역에서 곡물을 싣고 와서 제분한 후 다시 각 지방으로 분산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하라파유적은 1921년에 영국의 고고학자 버트, 월러 등에 의해 발굴된 후 모헨조다로 도시유적과 함께 하루 아침에 유명해진 인더스문명의 중심지다.
인더스문명은 모헨조다로 하라파 두 도시외에도 찬후다로 등 1백여개의 도시유적을 인더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남기고 있다. 그 당시 인더스강 상류인 펀잡지방의 수도는 하라파였고, 하류지역의 수도는 모헨조다로가 아니었나 생각되고 있다.
이 지역은 인더스문명이 발달했을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비가 많이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는 건조지방 동물인 낙타 등이 짐 운반용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전혀 없었다는 기록이 그 증거다. 실제로 그 당시의 인장에는 호랑이 물소 코뿔소 코끼리 악어 등 산림지역과 늪지대 동물들만이 그려져 있다. 인더스문명은 B.C.3000년 경부터 B.C.2000년대 중엽까지 번영을 누렸지만 홍수와 외침 등 여러 이유로 멸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실상은 좀더 완전한 발굴과 문자의 해독에 의해 분명히 밝혀질 때까지 상당부분 신비에 싸여 있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