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에 노벨상을 받은 생화학자 「월터 길버트」는 수상 후 곧 하버드대학 교수직을 포기하고 실업계로 뛰어들었다. 오늘 날 제넨테크사와 함께 생명공학계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어지는 바이오젠사의 초대 회장이 된 것이다.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라는 말을 남기고 연구실을 떠났는데, 바이오젠사에서는 α인터페론과 간염백신 등을 개발해 냈다. 이런 저런 이유로 4년간의 실업계 생활을 청산하고 하버드대학에 복귀했지만, 그는 1987년에 다시 제놈사라는 유전공학기업을 차려 「외도」를 이어갔다. 우리나라에서도 「제2의 월터 길버트」가 속속 등장하고 있는 지금, 그들의 갈등과 애환을 들어본다.
높은 전문지식과 새 기술로 무장하고 창조적이고 모험적인 경영을 하는 기업을 가리켜 벤처 비즈니스(venture business)라고 부른다. 이런 회사는 대개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뛰쳐 나온 과학기술자들에 의해 경영되고 있다. 흔히 지식집약형 연구개발형 소수정예형의 성격을 띠는 이 모험기업들은 놀라운 속도로 급성장하기도 하지만 자금력이 약하고 도산위험도 크기 때문에 주로 벤처 캐피털(venture capital)로부터 '수혈'을 받는다.
모험기업이 성공을 거두려면 기술개발 자본확보 시장개척이라는 세 벽을 뛰어 넘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체로 기술은 미리 확보한 후에 창업하게 되므로 3년간은 순전히 기술력만으로도 버틴다. 그러나 그 후에는 관리능력의 비중이 커진다. 즉 기술과 경영을 조화시키지 못하면 어이없이 흑자도산하는 경우도 생긴다.
「당신이 직접 하시오」
국내 최초로 초음파진단기를 선보여 의료 기업계에 혜성과 같이 데뷔한 (주)메디슨도 전형적인 벤처기업의 하나다. 이 회사를 세운 이민화(李珉和)사장은 초음파에 관한한 국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초음파 전문가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제목(초음파 B-스캔시스템의 성능향상에 관한 연구)이 말해주고 있듯이.
아직 젊은 나이(36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력에는 흥미로 불러 일으킬 만한 대목이 많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그는 법관을 지망하는 문과계열 학생이었다. 그러나 고3이 되면서 그는 전자와 컴퓨터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결국 '무리'해서 이과로 옮겨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한다. 이때가 1972년.
그는 대학생 시절부터 기업인이 될 '싹'을 보여 왔다. 대학 4학년 때 청계천에 엔지니어링회사를 설립, 흔치 않은 대학생 사장을 경험한 것이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한 이씨는 한국과학원(KAIS)에 진학, 2년 후 전기 및 전자공학 석사학위를 받는다. 석사를 딴 직후에 다시 같은 전공의 KAIS 박사과정에 들어 가지만 이때부터는 '이중생활'에 돌입하게 된다. 대한전선의 연구원과 KAIS 박사과정 학생 신분을 동시에 갖게 된 것이다.
대한전선에 입사한 그는 컴퓨터 개발 관계 일을 주로 했다. 한글/영문 터미널을 포함한 5종의 터미널, CP/M컴퓨터 등 2종의 컴퓨터, 2종의 프린터가 이 시기에 그의 머리속으로부터 나온 작품목록이다.
박사과정 5년생이던 1982년에 그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초음파진단기 개발 프로젝트에 박송배교수팀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남북의료기(주)와 산학협동으로 진행된 국책연구과제였는데 이 분야에 평소 각별한 흥미를 느꼈던 그는 열의를 갖고 덤벼 들었다. 마침내 연구팀은 기술상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1985년에 국산 선형(linear) 초음파진단기를 탄생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산파역을 톡톡히 해냈다.
마침 그때 연구팀장이었던 박송배박사가 1년간 교환교수로 파견나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가 연구책임을 대행하고 있었다. 이 무렵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는데, 마땅히 상품화를 맡아줄 것으로 믿었던 남북의료기가 채산성과 자금부담을 이유로 발을 뺐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자신의 '작품'을 사줄 '임자'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가 접촉한 회사들은 한결같이 사업전망이 불투명하고, 특히 외제와의 경쟁력이 의심스러워 선뜻 뛰어들기가 꺼려진다는 거부 의사를 밝혀 왔다. 결국 설득이 어렵다는 결론에 이른 그는 스스로 창업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당신이 하라"는 주위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이다.
"애써 개발해 놓은 작품을 사장시키지 않기 위해 새로운 전문회사설립을 구상했어요. 과학자들은 누구나 자신보다 자신의 작품이 빛을 보기를 바라잖아요"라고 반문한 그는 창업과정에서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수없이 번민을 반복했다고 들려 준다.
인원구성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인간적 신뢰감을 바탕으로 KAIST 동료인 이승우박사(33)를 비롯해 김시우(35) 김종황(32)씨 등 8명이 손을 맞잡은 것이다. 박사과정 학생 신분으로 창업에 동참했던 김영모박사(31)는 "같이 해 보자고 해서 10초만에 승낙했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해주었다. 창업멤버 중 특히 흥미로운 인물은 김종황씨. 그는 벤처기업의 창업전문가인데, 회사가 정상궤도에 오르면 곧 새 회사로 옮기는 '진짜' 벤처맨이다.
'창의 책임조화'를 사훈으로 걸고 1985년에 출발한 '메디슨'사의 최초 자본금은 5천만원(현재는 11억원)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최소한 4억원의 자금조달능력이 요구됐다. 금융기관에 제공할 담보가 없었던 그는 벤처 캐피털사의 문을 두드렸다.
"인간적인 신뢰감과 능력 그리고 기술타당성을 높게 평가한 한국기술개발(주)로부터 자원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아찔한' 순간을 되돌아 본 그는 "그러나 벤처 캐피털은 분명히 이익을 위해 투자하는 회사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후에는 모든 일이 비교적 순조롭게 풀려 회사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현재는 종업원 수만도 1백7명에 이르고 월 1백50대의 초음파진단기를 만들어낸다. 대당 가격이 5백만~2천5백만원을 호가하는 고가품을 국내외 시장에 공급하고 있는 것.
작년에는 장사를 재작년보다 2배반이나 더 잘 했다. 80억원어치를 판매해 국내 로컬시장 점유율을 50%까지 올려놓은 것이다.
"2백50%의 신장률이라면 일반기업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성과이지요. 그러나 벤처기업에서 연간 2백% 수준의 성장은 흔한 일입니다" 91년에 주식시장에 정식으로 공개될 예정이지만 '메디슨'의 주식은 현재도 장외거래가 되고 있다. 전망있는 회사임을 반영하듯 액면가 5천원짜리 주식이 2만1천원 정도에 팔리고 있는 것이다.
메디슨의 주생산품인 초음파진단기는 움직이는 조직, 즉 심장 내장 태아 등의 상태를 그 자리에서 화면으로 정확히 볼 수 있는 영상화 진단장치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가청한계인 주파수 2만헤르츠(Hz)가 넘는 초음파를 사람의 몸 속에 보낸 후, 이 신호를 되받아 TV화면에 생생하게 연출하는 기계다. 이 진단기에는 인쇄회로기판(PCB)만 해도 20여장이 들어가며 집적회로(IC) 등 4천여개의 부품이 내장돼 있다. 16비트 미니컴퓨터보다 더 높은 정밀도를 요구하는 '눈으로 보는 청진기'인 것이다.
"의학적 진단을 위한 단층촬영기술로는 X선 NMR(핵자기 공명장치) 초음파 이 세가지가 꼽히는데, 초음파진단기는 다른 두 기계에 비해 가격이 싸고 인체에 부담이 없어 앞으로 영상진단기기의 주종을 이룰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그는 다른 장비로는 즉각적인 정보를 얻을 수 없지만 초음파진단기는 실시간(real time) 작동이 가능해 현대의 속성과도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연구비로 매출액의 10%를
병원이 주고객인 초음파기기업계는 최근 몇 년 동안 매년 15~20%의 높은 신장률을 보이고 있다. 국내의 시장규모는 1백50억원 정도이나 세계시장은 약 20억달러로 추산돼 단일품목으로는 꽤 짭짤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세계시장은 주로 일본과 미국이 양분하고 있는데, '메디슨' 이전인 1985년까지 국내에서는 전량 수입에만 의존해 왔다.
그는 최근 해외출장이 잦아지고 있다. 작년만 해도 유럽 아시아 남미지역을 차례로 다녀 왔다. 물론 장사를 좀 더 잘 해보기 위해서다. 이처럼 해외시장개척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는 그는 벌써 35곳에 해외진출의 교두보를 터 놓았다. 그 결과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져 작년에는 수량면으로는 55~60%, 금액에서는 40% 가량을 점유했다.
그는 '메디슨'의 진면목은 부설연구소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전직원의 1/3, 즉 35명이 연구소 소속인데 그중 박사는 3명 석사는 10명입니다. 연구비는 매년 매출액의 10%를 쓸 계획이에요. 작년에는 금액으로 7억원을 썼는데 올해에는 10억원을 투자할 생각입니다. 또 원활한 기술교류를 위해 KAIST를 비롯해 서울대 의공학과, 서울대 전자공학과, 아주공대 등 국내의 관련연구기관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해 갈 겁니다."
이씨가 늘 직원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창업이념은 국부창출과 인간존중. 즉 일에 대한 확고한 목적의식과 인격체의 완성을 뜻하는 이 두 슬로건을 '메디슨정신'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강남구 역삼동 하성빌딩에 본사를 두고, 공장은 강원도 홍천군 남면에 있는 메디슨의 목표는 전세계 의료기사장을 석권하고 있는 일본 도시바사와 미국 휴렛팩커드사에 필적하는 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사장은 직원을 뽑을 때 신문광고보다는 각 학교를 직접 방문해 선발한다.
"IBM은 최상의 사람보다 최적의 사람을 인재로 본다는데, 제 생각도 같습니다. 전체속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고 스스로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인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