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생활양식이 복잡 다양해짐에 따라 과학의 세계도 더욱 미세하게 세분화되고 있다. 통상 '과학'이라 하면 자연과학, 즉 미지의 자연현상을 탐구하는 학문의 일분야를 가리키는데, '정밀화학'분야도 자연과학의 일분야라 할 수 있다.
10년간 1억달러 들여야
정밀화학은 화학의 일분야로 간주할 수 있으나 정밀화학공업을 이끄는 공학의 일종이기도 하다. 정밀화학공업이란 흔히 화학공업의 대표적 표본으로 연상되는 비료공업이나 석유화학공업 등 거대장치 위주의 대형 화학공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공업이다. 즉 고도기술이 요구되며, 제조시설 규모가 비교적 작고 생산품종이 많으면서도 소량 생산방식으로 기술질약형 에너지·자원절약형 고부가가치형 제품을 생산하는 공업을 말한다. 오늘날 흔히 첨단과학이라 말하는 전자공업 소재 공업 생명공학 등과 마찬가지로 정밀화학공업은 고도의 두뇌와 기술을 필요로 하는 높은 수준의 최신과학인 것이다.
또한 정밀화학공업은 다른 산업의 원자재를 생산하는 소재산업으로서 타산업 제품의 생산성 증대, 품질의 고급화를 도와 전체 산업의 구조를 한 단계 높이는 역할도 담당한다. 때문에 전체 산업 측면에서도 필수불가결한 분야로 꼽히고 있다.
정밀화학 제품이 타분야 및 타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면 별표와 같다.
정밀화학에 관여하는 학문분야도 매우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정밀화학에 관계되는 핵심 학문분야로는 유기화학 무기화학 약화학 생물화학 공업화학 고분자화학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분야에서 신규 화합물질을 합성·개발하면 그 후에는 생물학 약화학 물리화학 분야 등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이 실용화 연구를 담당하게 된다.
한 개의 정밀화학 제품을 개발키 위해서는 엄청난 연구인력과 시간 그리고 연구비가 요구된다. 실제로 한 개의 의약품을 개발, 인간의 질병치료에 응용하려면 적어도 수십명의 합성 화학자들이 수만 개의 신규 화합물을 합성해야 한다. 또 이를 수많은 약리학자와 생물학자들이 약효가 확실히 있는지, 인체에 해를 주는 독성은 없는지를 수년간 정밀한 연구와 실험을 거쳐 판별하게 된다. 통계적으로 한 개의 신약을 개발하는 데는 10여년간의 연구기간과 약 1억달러의 연구개발비가 소요된다. 의약품 이외의 다른 정밀화학 제품 개발에도 대동소이한 비용과 시간이 든다.
의약품개발 연구에서 보듯이 정밀화학은 부가가치가 매우 높은 분야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고가로 여기는 금과 중량당 값어치를 비교해 보자. 놀랍게도 금 1㎏당 값보다 수십배~수백배가 되는 정밀화학 제품이 수없이 많다.
예를 들어 미국의 '몬산토'라는 정밀화학회사가 약효가 좋은 농약 한 가지를 새로 개발, 시판했는데, 연간 매출액이 10억달러에 달했다. 이는 우리가 미국에 수출하는 수십만대 자동차의 총액과 맞먹는 액수다.
일반적으로 여러 화학공업 중 정밀화학의 비중이 크면 선진국형이라고 부른다. 선진국에서는 전체 화학공업에 대한 정밀화학 공업의 비중이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미국 일본은 50%, 서독은 70%, 스위스는 90%).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비중이 매우 낮은 상태다(약 25%). 그 이유는 국내시장이 협소하고 정밀화학분야에 종사하는 고도의 연구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밀화학공업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원료합성 부문이다. 원료합성 부문은 경제적 기술적인 측면에서 정밀화학의 핵심부문으로서 석탄화학공업 석유화학공업과 정밀화학공업을 연계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기술 수준이 선진국에 비해 많이 뒤떨어져 있어 대부분의 화학중간체나 완제품들이 해외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때 흥미를 잃기도
국내 정밀화학분야에 대한 국내의 연구현황을 살펴 보자. 1960년대 중반까지는 매우 미미한 실정이었으나 1960년대 후반에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설립돼 여러 제품을 개발하면서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만해도 해외에서 개발된 화합물들의 합성공정을 일부 개선, 국내 시장에서 판매하는 정도였다. 엄격히 말해 연구다운 연구를 했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해외에서 연구·개발된 정밀화학 제품을 단순복제하는 일은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 기간중 정밀화학자들이 모두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항암제 베타락탐항생제(페니실린계통) 소염진통제 위궤양치료제 구충제 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의약품이 그 기간 중에 개발되었다. 또 농약분야에서는 살균제 제초제 등을 선보였다. 그리고 염료의 일종인 반응성 염료 등을 개발, 국내 정밀화학공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이미 해외에서 개발된 제품이었다. 이처럼 국내에서는 단순복제 연구만을 하였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점차 흥미를 잃어 갔다. 게다가 1987년에는 외국의 거센 압력 때문에 '물질특허'가 도입되어 무단복제마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제는 관계당국도 정밀화학공업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과학자들도 새로운 의욕을 가지고 덤벼들고 있다. 실제로 1980년대 말부터는 과학기술처가 주관해 신규 정밀화학 분야에 대한 연구를 거국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 주역은 국책연구기관인 홍릉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 대전 대덕연구단지 내에 있는 한국화학연구소다.
앞으로 90년대에 국내에서 추진할 연구의 초점을 살펴 보자. 의약품 분야에서는 퀴놀론 경구용 베타락탐항생제 AIDS치료제 고혈압치료제 항암제 중추신경계 의약 등이 중점적으로 연구될 전망이다.
또 농약분야에서는 헤테로고리 신규 생리활성물질 효소저해제 키틴저해제 살균제 제초제 등의 연구가 활발할 것이다.
이밖에도 반응성염료 레이저 및 전자 감응색소 감열 감압지용 색소 등이 주요 타겟으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