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LSI' '5세대컴퓨터' '세마테크'등 국가차원의 컴퓨터 반도체연구개발에 힘을 쏟고 있는 선진국들의 하이테크 승부전략은?
지구상의 모든 국가들이 하이테크산업의 기술개발에 경제발전의 성패를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이테크분야에서도 가장 핵심부문으로 지목되는 컴퓨터 반도체연구에 쏟는 선진국들의 노력은 '세계제일'을 놓칠 수 없다는 그들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70년대 일본이 미국의 '첨단산업 절대우위'에 도전하면서 도입한 '컨소시엄(consotium)'방식의 연구개발전략. 이 방식은 이제 역으로 미국 유럽이 '하이테크선두주자'로 나선 일본을 추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채택됐다.
현대의 산업전쟁에서 '기술'이 없는 국가는 비참하다. 하이테크분야에 본격 뛰어들기 시작한지 10년이 채 못된 우리나라는 그동안 수많은 특허분쟁과 로열티지불 등으로 '기술없는 설움'을 톡톡히 치뤄야만 했다. 최근 정부와 민간기업들이 공동으로 컨소시엄방식을 모방한 대형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다.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들이 앞을 다투어 추진하고 있는 컴퓨터관련 대형프로젝트들과 이들의 배경을 살펴 본다.
미국에서 오히려 열기가
일본이 가전산업에 이어 반도체 메모리분야에서 미국을 제치고 단시일내에 첨단기술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컨소시엄을 통해 공동협력체제를 아주 효과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에 따라 최근 미국과 유럽지역에서도 컨소시엄을 통한 '공존공영체제'구축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내일의 컴퓨터산업의 성패가 컨소시엄의 성과에 달려 있다고 선진국들은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컴퓨터산업의 주도권은 미국이 쥐고 있다. 그러나 TV 오디오 등 가전산업 및 반도체메모리산업에서 경쟁주도권을 일본에 빼앗긴 채 제조력의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컴퓨터부문에서도 더이상 안심할 수 없는 처지다.
왜냐하면 컴퓨터의 핵심부품인 메모리칩의 대일의존도가 심각한 데다가 랩톱컴퓨터와 슈퍼컴퓨터에서의 일본의 추격이 만만치 않은 위력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최근 미국에서는 컴퓨터부문에 대한 경쟁력을 지속시켜나가면서 전자강국으로서의 실추된 이미지 만회를 위해 공동연구개발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행정부가 지난 84년 공동연구개발을 위해 컨소시엄을 결성한 업체들이 독점금지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관계법령을 완화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취해진 것이다. 그 결과 지금까지 미국내에 결성된 컨소시엄은 1백여개가 넘고 있고 앞으로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이 가운데 차세대컴퓨터개발촉진을 위해 설립된 대표적인 컨소시엄이 'MCC(Microelectronics Computer Corporation)'이다. 일본의 '5세대컴퓨터'개발 프로젝트에 대항할 목적으로 지난83년 발족된 MCC는 IBM의 참여거부 및 회원사간의 알력으로 인해 설립초기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또 개발기술의 상용화실적이 미흡, 각계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MCC에서 개발한 기술이 실질적으로 상용화된 사례는 지금까지 3건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MCC가 이처럼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은 미국의 개인주의적인 연구개발풍토가 컨소시엄의 집단적인 공동협조체제와 잘 어우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다시말해서 종래의 미국기업들의 연구개발풍토는 기업마다 자체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독점하는 독자노선정책에 의해 주도되어 왔기 때문에 기술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데 대해 익숙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MCC는 최근 각 회원사의 파견연구원을 상근연구원으로 대체 이들의 책임하에 연구개발이 수행되도록 하는 한편 'ACT(Advanced Computer Technology)'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마련, 연구개발촉진작업에 나섰다. ACT는 MCC의 차세대컴퓨터개발계획을 신경망(neural)컴퓨터 CAD(컴퓨터이용설계) 등의 10개분야로 연구항목을 세분, 참여업체를 늘려 기술이전의 폭을 확대해가고 이를 통해 상용화작업을 본격화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충분한 연구개발자금여력이 없는 중소업체라도 연간 2만5천달러의 회비를 내고 원하는 분야의 연구개발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즉 MCC는 중소업체들에까지 연구개발의 문호를 개방해 새로운 활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한번 실리콘밸리의 영화를-세마테크
이러한 공동협력체제의 구축열기는 미국의 반도체업계에서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독자노선정책의 대표격인 IBM과 연구개발지원에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미행정부가 최근 태도를 바꿔 반도체설계ㆍ제조기술개발을 위한 컨소시엄 결성작업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최근의 열기를 단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다.
이렇게 정부와 주요반도체업체 14개사를 주축으로 지난 87년 설립한 컨소시엄이 바로 '세마테크'. 이 프로젝트에는 6년간 총15억달러의 연구비가 투여될 예정이다. 회원사 각사로부터 모아진 자료와 지식을 최대한으로 활용, 반도체설계기술 및 제조기술 그리고 제조장비들을 공동개발한다. 이곳에서 공동개발된 기술은 회원사에 우선 제공되지만 일본이나 유럽 등지의 외국업체들에게는 상당기간 판매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다.
컨소시엄이 전무하다시피했던 시절에 탄생한 MCC에 비해 비교적 안정된 출발을 한 탓인지 세마테크는 현재 인텔사의 '로버트노이스' 회장체제하에서 차세대 반도체개발연구에 정진하고 있다. 텍사스주 오스틴시에 건립된 초현대식 연구소에서는 이미 4MD램 제조기술이 개발됐다.
또한 회원사인 모토롤러사는 이곳으로부터 제공받은 새로운 반도체제조기술을 통해 시간과 경비를 대폭 절감시켰다고 한다.
이처럼 1백여개의 회원기업에 향상된 반도체제조기술 및 제조장비를 공급하고 있는 세마테크는 벌써 미국 컨소시엄의 본보기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컴퓨터ㆍ반도체업계는 위의 컨소시엄에 만족치 않고 최근 메모리칩의 안정공급을 위해 'U.S. 메모리즈'를 결성했다. 이 또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미국의 주요 컨소시엄 가운데 하나이다.
IBM 디지틀이큅먼트(DEC) 휴렛팩커드(HP) 등의 3대 컴퓨터업체와 인텔 어드밴스트마이크로 디바이시스사 LSI로직사 내셔널세미컨덕터 등의 4개 반도체업체가 총10억달러를 출자, 자동차에서 컴퓨터 통신기기에 이르는 온갖 전자기기의 핵심부품이 되고 있는 D램의 공동개발 및 생산을 위해 연합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현재 80억달러에 달하는 세계반도체D램시장의 80% 이상을 일본이 석권하고 있는데 미국은 그나마 우위를 점하고 있는 컴퓨터부문에서 경쟁우위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마법의 돌'이라고 불리우는 반도체칩의 생산능력을 보강 대일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절대명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세마테크와 양축을 이뤄갈 U.S. 메모리즈는 미국이 90년대 중반에 세계반도체시장에서 지난날의 영광을 되살리는 데 커다란 버팀돌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컨소시엄을 뒷받침하는 후원요소들은 무수히 많다. 재정 기술회원사간의 협력관계 등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한가지 들라면 정부의 역할을 꼽을 수 있다. 세금감면혜택 재정지원 등의 법적 제도적 장치들이 컨소시엄의 추진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세마테크의 노이스회장은 "정부가 컨소시엄추진의 주도권을 쥐고 있을 경우 자칫 경쟁추진력이 무력화될 공산이 크다"고 강조하면서 세마테크에 지원되는 정부의 보조금을 오는 93년까지 전면 폐지해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정부의 지원에 관한 노이스회장의 견해에 반대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들은 "컨소시엄들이 경쟁주도력강화라는 미명하에 정부의 지원내지는 관여를 무조건적으로 배제한다면 이들 역시 기업의 독점적인 이익을 대변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반박하면서 이같은 우려를 불식시키려면 최소한의 정부개입은 필요악이라고 설명한다.
일본, 컨소시엄의 근원지
한편, 컨소시엄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려 선진기술강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에서는 오히려 컨소시엄에 대한 열기가 다소 주춤하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컨소시엄하면 일본을 떠올리는 까닭은 초대규모 집적회로의 개발생산을 위해 지난 76년에 설립된 'VLSI'(Very Large Scale IC) 계획 때문이다. 바로 이 VLSI 가 일본을 선진기술국의 첨병으로 부상하게 한 도약의 발판이 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다.
VLSI계획에는 일본 통산성이 1억2천5백만달러, 민간기업이 12억달러의 자본을 투여, D램의 개발과 생산에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국영기업이었던 NTT(일본전신전화)가 기초개발연구를 맡아 D램에 사용되는 소형전자회로개발에 성공한 뒤 그 노하우를 자국의 반도체업체에 이전시키는 등 정부와 기업이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결과 일본 반도체기술은 일약 '세계 1위'로 부상했던 것이다.
일본이 D램분야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 85년 세계적인 반도체불황이 닥쳤을 때 미국 반도체업체들이 현실적인 이익에 급급한 나머지 D램생산을 포기한 반면 일본 업체들은 정부의 통제하에 똘똘뭉쳐 침체를 딛고 제조기반을 강화한 덕분이다. 그 결과 모든 전자기기의 핵심부품인 D램분야에서 90%가까운 경이적인 세계시장점유율을 기록하게 됐다.
이처럼 정부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착관계를 유지해온 일본에서 컨소시엄의 열기가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최근 컨소시엄운영에 있어 정부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축소됐기 때문이다. 연구개발비에 대한 예산규제는 정부의 역할수행에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다. 지난해 국가규모의 대형R&D(연구개발)을 위해 일본정부가 지출한 비용은 일본의 한대형업체 수준에도 훨씬 못미치는 것으로 나타났고 국가규모연구개발의 80% 이상을 대기업들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지만 '생각하는 컴퓨터'를 겨냥, 지난 82년 발족된 '5세대컴퓨터'개발 프로젝트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초기3년 중기4년 후기 3년의 10년계획으로 추진되고 있는데 지난해 추론 지식에 관한 보완작업을 끝내고 현재 후기 3년의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었다.
이 프로젝트의 추진기관인 ICOT(신세대컴퓨터기술개발기구)에 따르면 추론기능과 기억장치에 관한 지식데이터베이스의 연구개발작업은 이미 완료된 상태이고 지금은 64대의 연산처리장치를 움직이는 소규모의 실험기개발에 돌입했다는 것. 이에 따라 5세대컴퓨터 시제품은 빠르면 91년경에 출현하리라는 전망이다. 이 컴퓨터는 최고 1천대의 연산처리장치를 연결시킨 것과 맞먹는 양의 데이터를 병렬처리하고 기존의 대형컴퓨터에 비해 5백배의 처리능력을 발휘하여 인간의 언어를 이해, 추론작용도 겸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와 같은 차세대컴퓨터는 문자뿐만 아니라 그래픽(도형) 영상 음성까지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복합적이 시스템으로 발전해갈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차세대컴퓨터산업의 경쟁관건은 '창조력'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이제까지 굳건한 제조기술을 바탕으로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기술을 모방, 기술적 완성도를 기함으로써 시장점유율을 늘려온 일본 특유의 '카피캣'(Copycat: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남의 것을 훔쳐 모방한다는 뜻) 방식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가 왔다. 미국은 일본의 시장잠식을 막기 위해 기술특허보호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일본이 직면한 또 한가지 문제점은 인력수급상의 차질이다. 얼만전까지만 해도 우수인력이 각종 기술연구소와 제조업체기술진으로 몰리던 것이 '재테크'라는 신조류와 더불어 이제는 증권 금융 서비스산업 등 3차산업으로 몰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발명왕 '요시오 나까마쓰'는 "남의 기술에 편승, 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어리숙한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따라서 미국이나 유럽과의 미래의 첨단산업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창의성을 바탕으로 우리의 독특한 기술을 자체적으로 배양해 가야할 것"이라며 기술입국의지를 강력히 표명했다.
유럽, 국가간 장벽을 헐고
다른 한편 유럽에서도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한 첨단전자산업의 경쟁력강화를 위해 컨소시엄결성이 붐을 이루고 있다. 유럽지역의 대표적인 컨소시엄으로는 '에스프리' '유레카' 'JESSI(Joint European Submicron Silicon)'등을 꼽을 수 있다.
에스프리는 정보산업의 중요성은 날로 고조돼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럽의 국제경쟁력은 현저하게 뒤처져 있기 때문에 이를 복원하고자 하는 현실적인 요청에서 시작됐다.
오는 93년까지 총50달러의 예산을 들여 총4백50건의 개발프로젝트를 수행할 에스프리는 △고도의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소프트웨어 △고도정보처리 △사무자동화 △CIM(컴퓨터이용 통합생산) 등 5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유레카는 유럽 19개국에서 30여개의 업체가 설립주축멤버로 활약, 정보통신기술에서부터 고화질TV(HDTV) 및 우주항공산업에 이르는 다양한 혁신기술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예산규모도 1백3억달러에 이르고 회원기업은 1천6백여개사, 프로젝트 건수도 3백2건으로 방대하다.
또한 JESSI는 첨단반도체칩의 경쟁력강화를 목표로 네덜란드의 필립스 서독의 지멘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합작회사인 톰슨 등 3개사가 50억달러의 자본을 들여 최근 결성한 것이다.
유럽의 컨소시엄구축열기가 그 어느 다른 지역보다 뜨겁게 달아 오르고 또한 방대한 규모로 짜여지고 있는 이유는 유럽이 미국과 일본에 대해 경쟁력을 가지려면 필요한 기초기술 및 인력 자금 등을 한곳에 집중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프로젝트 자체의 규모가 커지면서 기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혼자 감당해내기 벅찬 경우가 많아 국가라는 장벽을 넘어 지역공동체의 차원에서 협력하려는 경향이 유럽공동체(EC)로의 통합무드와 결부되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유럽은 오는 92년 EC시장통합에 대비, 자체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이제까지의 대미ㆍ대일의존도를 벗어나 자생적인 경쟁력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다.
첨단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공동프로젝트에 참여,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는 연구원들은 컨소시엄은 개방적인 태도를 함양시키는 한편 자신의 연구분야에 대한 시야를 넓혀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필립스의 공동프로젝트 추진책임연구원인 '니코 하제빈더스'는 "유럽의 직장인들은 대부분 한직장에 평생 몸담고 있기 때문에 협동문화가 발달되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같은 문화적 토양을 바탕으로 하여 연구개발을 위한 정보교류가 이루어지므로 유사한 기술의 개발로 인한 자원낭비가 원천적으로 봉쇄될 뿐만 아니라 기술향상속도는 한층 가속화된다"고 자신감을 표현한다.
과연 누가 미래의 하이테크산업 '세계 제일'이라는 지위를 차지할지는 속단을 내리기 어렵다.
그렇지만 컨소시엄을 통해 개발된 첨단전자기술을 기업내부의 상용화요구와 어떻게 접목시켜나가는지에 컨소시엄의 성패가 달려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구프로젝트들이 완료되는 오는 90년대중반 이후 그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