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학과에 들어가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지치고 시달리는 것보다는 훨씬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학문이나 다 인간생활에 필요한 것 아니예요?
●- 주로 선배에게 조언을 받는다
김용-수험생의 미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대학입시가 머지 않았습니다. 대다수의 학생은 어떤 대학 어떤 학과를 지원해야 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겠지요. 그 고충은 충분히 이해할만 합니다.
어쩌면 대사를 눈앞에 두고 허둥대고 있을지도 모르는 재수생과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을 위해 진로선택에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대화가 되었으면 해요. 먼저 현재 진로지도가 잘되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지요.
김창-지난 지난 3년간 문교부의 용역을 받아 과학교육 현황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대상은 고등학교 2,3학년인데, 전부 8천여명을 표본으로 삼았지요. 그런데 여기서 전혀 예측하지 못한 두가지 사실이 드러났어요.
첫째는 '누구에게 전공선택에 관한 충고를 받느냐'에 대한 응답으로 '선배에게 받는다'가 가장 많았다는 점입니다. 다음은 친구라고 대답했어요. 조사하기 전에는 '부모에게'가 제일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거예요.
또 고3학생을 대상으로 '문과 또는 이과를 택한 것을 후회하는냐'고 물었더니 17%만이 '그렇다'고 답했어요. 그런데 고교 교사들에게 '반학생중 몇 %나 문ㆍ이과 선택을 잘못했다고 보느냐'는 질문을 했더니 60%쯤이라고 대답, 두번째 충격을 던졌어요. 이쯤되면 처음부터 전면적으로 잘못돼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김용-저는 문과에 갈 학생이 이과로, 이과에 갈 학생이 문과로 가는 경우가 적어도 50%는 넘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문ㆍ이과를 나눌 때 단순하게 수학실력만을 가지고 따지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물론 수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이기는 하지만 수학=이과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아요. 예컨대 이과인 의학과에 진학하면 수학은 거의 다뤄지지 않으나, 문과인 경제학이나 경영학에서는 필수적이거든요. 이렇게 세부적인 사실도 고려하고 문ㆍ이과 선택이 이뤄져야 실수가 없습니다.
하-서울대에 들어온 학생들 중 학교를 도중에 그만두고, 새로 공부하는 학생이 적지 않아요. 대표적인 경우가 금년에 서울대에 수석입학한 학생일 겁니다. 이 학생은 작년에 서울대에 입학했으나 자신과 학과가 잘맞지 않음을 알고 재수를 한 것이지요. 아무튼 첫번 째 선택이 잘못돼 1년은 손해보게된 셈이지요. 이런 학생들을 보면 학과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김용-옛날에는 학문분야도 좁고, 경제력도 여의치 않아 전공을 바꾸고 싶어도 간단치가 않았어요. 그러나 요즘은 꽤 많은 학생들이 전과 또는 전교를 계획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사정이 전과나 전교를 자유로이 허용하지 않으므로, 결국 다시 입시를 거치는 방법을 택하게 되지요.
물론 억지로 4년을 마치는 학생이 더 많지만 그 학생 개인에게는 큰 불행입니다. 수학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도 학점은 따야 되고, 대학 4년이 고역이 될 수 밖에 없어요.
이렇게 4년을 허송하는 것보다는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요. 의대에 진학한 후 도중에 학교를 그만 둔 제가 아는 한 여교수의 체험은 도움이 될 거에요. 해부실에만 다녀오면 죽을 지경이었던 그 분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학교를 나왔어요. 그뒤 1년간 재수해 의상학과에 들어갔는데, 살맛이 나더래요. 그래서 줄곧 1등으로 학교를 마치게 되고, 실력을 인정받아 교수로 남게 된 것이지요.
●- 도중하차하는 학생 많다
김창-혼란은 이미 입시창구에서 시작된다고 봐요. 불과 수시간 때로는 수분 만에 지원학과가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잖아요. 특히 예체능계열이 애매해요. 도저히 실력은 안되고, 대학은 가고 싶고, 엉뚱하게 '만만해 보이는' 예체능계로 돌리는 경우가 많아요. 이경우 합격도 용이하지 않겠지만, 설령 합격한다 할지라도 제대로 다닐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박-결국 입시제도가 문제군요. 적성 인성을 고려해 선택하는 게 아니라 점수를 가지고 대학도 고르고 학과도 고르게 하는 입시제도가 개선되지 않는 한 학생들의 혼선은 계속될 거예요. 물론 누구나 처음에는 적성 인성을 따져가며 장래를 설계하겠지요. 그런데 이를 지원일까지 초지일관하는 학생은 드물어요. 막상 지원할 때는 부모님 체면, 자기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이름 좋은' 대학에 끌려버리고 말아요. 대학중심으로 지원하다보니 과를 양보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대학이냐, 학과냐로 고민하는 학생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입시가 목전에 다가오면 그런 갈등은 더욱 증폭되곘지요.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해요. 두말할 나위없이 먼저 학과를 보고 지원해야죠. 그래야 후회가 없어요. 그저 간판만 보고 지원했다가 뒤늦게 자신과 잘맞지 않는다고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박-동감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대학을 '낮추는' 대신 학과를 '낮춰가는' 학생들이 많아요. 이들은 중도에 포기하기 십상이죠. 특히 우리 대학에서는 심각해요. 몇몇 학과에 들어오는 학생중에는 순전히 외대라는 간판을 따기 위해 지원한 경우도 있어요. 이 학생들은 입학 후 엉뚱한 방향에서 길을 찾아요. 예를 들면 어학계 학생이 1학년때부터 고시를 준비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고시에 합격한 학생도 있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대학교육의 잘못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예요.
또 1, 2, 3지망이 가능한 대학에 지원하는 학생들은 1지망은 물론이고 2, 3지망에도 신경을 써야 할 거예요. 2, 3지망에 붙은 학생들의 중도 포기율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무심코 넘겨서는 안됩니다.
김용-반면 2, 3지망에 붙은 것이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학생도 많습니다. 점차 자신과 잘 어울리는 학문임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어찌 보면 진로지도가 잘못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자신과 일치되는 학과를 찾기가 어렵다는 얘기가 되지요. 아무튼 1지망보다 더 잘 맞을 수도 있으므로 2, 3지망학과 선정에 관심을 기울여야 해요.
김창-적성 적성하는데 학과선정에는 반드시 적성만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적성과 지능(IQ) 그리고 학력을 모두 고려해야 올바른 선정을 할 수 있어요. 예컨대 학력이나 지능이 떨어지는 학생이 적성이 물리학에 맞는다고 해서 물리학과에 지원하면 입학한 후 곧 흥미를 잃게 되요.
흔히 자연과학의 언어는 수학이고, 자연과학의 기초는 물리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렇다고 물리 수학 잘하는 학생이면 이과계통의 모든 학과에 적성이 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 두 과목을 잘 못한다고 해서 지나치게 위축될 필요도 없어요.
물리 화학 생물학과는 각각에 알맞는 인재들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물리천재가 동시에 화학천재인 경우는 드물잖아요. 따라서 물리 수학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전공을 잘 선택한다면 자연과학도로서 성장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김용-대다수의 학생들은 전공과 직업이 직결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물론 의대나 약대생처럼 자격증을 받는 학생들에게는 맞는 얘기겠지요. 그러나 자연대 공대 농대 가정대 학생들 중에는 '외도'를 하는 학생도 많아요. 우리 수학과 졸업생도 상당수가 기획실이나 경영관련 부서에서 일하고 있을 정도지요.
박-대학교육=직업교육이던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대학수와 대학생수가 모두 팽창, 대학에서 일반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대학의 직업교육 측면이 많이 약화된 셈이지요.
이제는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 전공학과를 선정해야 하는 부담을 덜어 주었으면 해요. 선진국의 대학에서는 학부 과정에서 전공을 결정하도록 강요하지 않아요. 여러 학문을 접해 보다가 대학원에 진학할 때 전공을 정하게 하는, 여유를 주고 있어요. 게다가 전교나 전과가 자유로워요.
우리도 전과 정도는 인정해 주었으면 해요. 학과를 옮기고 싶은, 그리고 꼭 옮겨야 할 학생들을 내쫓지 말고 포용해야지요. 그러자면 문교부가 대학의 전체정원만 정해 주고, 과별 정원은 대학이 자체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선행돼야겠지요.
김창-현재의 대학이 과거처럼 엘리트 교육의 장소가 아니라는 점은 명백합니다. 이제는 보편교육의 장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어요. 이런 대학의 위상변화는 기업체의 신입사원모집광고에서 여실히 느껴져요. 아예 전공시험을 치르지 않을 정도로, 대학에서의 전공이 무시되는 실정입니다. 기업체에서는 전공실력과 무관하게 사람을 뽑고, 직업교육을 다시 시켜 활용하고 있어요.
실제로 우리 과 출신들 중 물리학을 계속 연구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어요. 50% 이상이 물리학과 무관한 일에 종사하고 있어요. 저는 이런 현상을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습니다. 전공을 '살리지'못한 사람들에게도 물리학은 뭔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죠.
아무튼 대학의 교양교육은 앞으로 더욱 강화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부전공제와 복수전공제를 적극 활용, 2천년대의 다양화시대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어야지요.
박-제가 바로 전공과는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중의 한 사람입니다. 물리학과를 나와 신문기자로, 다시 과학사 교수로, 꽤 '복잡한' 편이지요.
하-서울대 동물학과 졸업생들은 거의 1백% 전공을 살리고 있어요. 그러나 전국적으로 보면 생물학과 출신의 10분의 1 미만만이 전공에 맞는 직업을 갖고 있을 뿐이에요. 결국 일류대학 인기학과 학생들만 전공을 찾는 셈인데, 이는 문교부의 그릇된 교육정책 탓이지요.
생물관련학과 학생들이 전공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특히 많아요. 다른 학과들과는 달리 '만만하게' 보고 덤벼드는 학생들이 적지 않거든요. 이것이 함정입니다.
김용-요즘은 새로운 이름의 학과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 수험생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어요. 따지고 보면 크게 다른 것도 아닌데, 자꾸만 세분해 전국의 학과 이름이 6백여개나 된다고 해요. 그렇지 않아도 학과들의 소개가 제대로 안된 나라에서 알쏭달쏭한 명칭의 학과들 때문에 머리가 복잡할 정도예요.
●- 지나치게 세분된 학과는 위험
박-실제로 대학의 과이름을 특이하게 붙이면 '손님'을 끌 수 있어요. 그래서인지 새 학과의 작명을 위해, 교수들에게 아이디어를 모집할 정도예요. 이는 학문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포장만 보는 수험생의 단순함을 십분 이용하는 수(手)이지요.
때로는 기존의 학과명을 바꾸기도 하는데, 성공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로 요업공학과를 무기재료공학과로 변경했더니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몰렸다는 얘기는 유명합니다. 물론 무기재료공학과가 더 적절한 표현이지요.
김창-지나치게 세분화된 전공을 택하는 건 다소 위험합니다. 예컨대 물리학과와 냉동물리학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물리학과 쪽을 택하겠어요.
박-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반도체재료공학과 보다는 재료공학과가 나을 것 같아요. 최근에 생긴 학과명을 보면 전문분야가 과이름에 반영된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보다 전문적인 교육이 이뤄질수 있겠지요. 그러나 부작용도 있을 수 있어요. 응용범위가 좁기 때문에 그 방면으로 풀리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거예요. 또 시대의 첨단과학이라고 해서 들떠서 지원하는 것도 현명한 자세는 아니예요. 유전공학과를 예로들어 보지요. 물론 이 학과가 처음 배출한 학생들은 무조건 팔릴 거예요. 그러나 수요를 채우고 나면 금방 시들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요.
김창-활동영역이 넓은 학과, 오래 전부터 있었던 학과에 지원하는 것이 안전해요. 폭넓게 배우는 학과 졸업생들은 여러 학문에 쉽게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죠. 연전에 일본의 마쓰시다연구소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태양전지 관련 연구원을 선발하고 있더군요. 당연히 그 분야를 전공한 사람이 채용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물리학과 출신이 합격했어요.
김용-소위 인기학과에 연연하는 학생들이 아직도 많아요. 그런데 인기학과라는 것이 시대적으로 부침이 심하잖아요.
박-의학과 약학과 등 요사이 인기있는 학과가 앞으로도 계속 인기를 누릴 것 같지는 않아요. 의료보험제도가 확대되면 사양길에들 가능성도 큽니다.
하-과거에는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직장을 보장받을 수 있는 학과가 선호되었어요. 앞으로도 취직이 용이한 학과는 계속 많은 지원자가 몰리겠지요. 그러나 돈을 잘 버는 학과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선호도는 낮아질 전망입니다. 사회 전체가 일정 수준의 경제력을 갖추게 되면 돈 보다 더 중요한 가치에 도전할 사람들이 많아지게 마련이지요.
김용-사실 종전에는 기초과학을 하면 '밥을 굶는다'는 말도 있었어요. 그래서 기초과학을 지원하는 데 불안함을 느끼는 학생도 적지 않았죠.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어요. 물론 기초과학을 해서 큰 돈을 벌지는 못하겠지만, 큰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은 학부과정에서 기초과학을 전공할 것을 권하고 싶어요.
김창-어떤 분야에 종사하든, 잘못하면 배고픈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과학자 특히 기초과학자를 꿈 꾸면서 동시에 큰 부자가 되려고 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지요. 기초과학을 전공하려면 노벨상에 도전하겠다, 세계적인 발명을 하겠다 등과 같은 보다 원대한 포부를 가져야 해요.
●- 적성검사는 참고자료로만
박-종래엔 과학자가 상대적으로 돈을 덜 벌었던 게 사실이에요. 요즘이라고 해서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지만요. 한마디로 기초과학은 돈벌이 길로는 부적당하나 더 큰 가치를 가져다 줄 수 있어요.
하-돈 버는 것 걱정하면서 학과선택을 한다면 그 학생은 이미 청년이 아니지요.
아무튼 이번 입시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기초과학 분야에 자신감과 비전을 가지고 지원해 주었으면 해요. 학부에서 기초를 하고 대학원에서 응용을 하는 것은 가능하나 그 역은 불가능 하거든요.
김용-저도 하교수님 생각과 같아요. 기초를 해두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융통성이 커지거든요. 공부를 해 갈수록 이 융통성이 대단한 무기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뿌리가 생기거든요.
김창-저는 기초과학 관련학과나 기초기술관련학과(공대계통의 기초학과)가 앞으로 유망할 것으로 생각해요. 정부의 과학정책이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잖아요. 계획대로 기초과학에 2조원이 투자되면 획기적인 발전이 있을 게 분명해요. 특히 올해 입시를 치르는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박-학문을 계속 하고 싶은 사람은 대학원까지 생각해 둬야 해요. 특히 대학교육이 대중교육이 된 작금에는 대학원을 진학해야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거든요.
김용-대학원에 진학할 때 한번 더 진로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요. 대학원 입학시험에서 대학 전공은 그리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거든요. 예컨대 수학과 졸업생이 물리학과나 경제학과 등 수학을 도구로 하는 대학원에 진학, 성공을 거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번에는 수험생들의 진학지도에서 '전가의 보도'가 되어 있는 적성검사를 해부해 보지요.
박-적성검사는 문과형 이과형으로 대별하는, 즉 방향성만 알려줄 뿐입니다. 그런데 이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 과신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런 태도는 큰 실수를 부를 수 있으므로 적성검사 결과는 참고하는 정도로만 그쳐야 해요.
만약 특별히 미치는 학문이 있다면 그 학문을 해야지요. 그러나 학과선정이 까다롭게 느껴지는 학생이 대부분일 거예요. 이런 학생들에게는 우선 싫지 않은 학문을 골라내라고 조언해주고 싶어요. 도저히 자신없고 적성에도 맞지 않아 보이는 학과들을 지워가다 보면 자신에 적합한 학과가 떠오를 것입니다.
김창-곧 대학입시에 적성검사가 등장할 예정이에요. 미국의 SAT를 본뜬 제도라고 보여지는데, 불합리한 점이 많다고 느껴져요.
지능이 선천적인 것이고, 학력이 후천적인 것이라면 적성은 그 중간 쯤에 위치하고 있거든요. 다시 말해 적성은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오는 게 아니예요. 오히려 어떤 우연한 동기에 의해 발견되는 경우가 많아요.
하-실제로 적성검사는 학과를 구체적으로 지정해 주지 않아요. 대략적인 구분만 해 줄뿐이죠. 이런 점에서 저는 대학입시에 적성검사 결과를 반영하는 일은 신중히 추진돼야 한다고 봅니다. 또 특정직업에 대한 적성은 있을 수 있으나 특정 학문에 대한 적성은 따로 없다고 생각해요.
학문을 하겠다는 자세만 갖추고 있으면 어떤 학문에도 미칠 수 있어요. 물론 되도록 빨리 학문을 할 것인지, 실무에 종사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게 유리하겠지요. 만일 학문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학생들이 있다면 기초과학에 도전할 것을 권합니다.
●- 신소재 관련학과가 유망할 듯
김용-이번에 대학입시를 치르는 학생들이 졸업할 무렵에는 어떤 학과가 각광을 받을 것으로 보십니까?
김창-그 문제는 미래사회가 어떻게 될 것이냐와 관계가 있습니다. 예상한대로 정보화사회가 펼쳐지면 정보산업과 서비스산업이 제 철을 만나겠지요. 그러면 컴퓨터관련학과와 인문사회계열에 메리트가 주어질 거예요.
2천년대가 되면 우리의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보입니다. 이같은 고소득시대가 되면 관심이 방향이 돈을 벌려는 쪽보다는 삶을 즐기려는 쪽으로 쏠리게 될거예요. 따라서 레저산업 등이 각광을 받겠지요.
또 물리 화학 등 기초과학 관련학과, 재료 공학등 신소재 관련학과도 유망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2천년대까지 모방만 계속할 수는 없잖아요. 뭔가 새로운 것을 우리 과학기술로 만들어 내려면 그 방면의 전문가를 많이 양성해둬야 겠지요.
이번에 시험보는 학생들은 적어도 10년 후를 내다보고 지원서를 써야 할 거예요. 2천년대가 되면 새로운 직업이 많아질 겁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직업수가 약 1만직종, 선진국은 3만직종 정도인데, 21세기에 들어서면 우리의 직업수가 현재의 선진국 수준은 될것으로 예상돼요. 따라서 고도의 직업중심의 학과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박-김교수님 말씀대로 미래에는 삶의 목표가 크게 바뀔 게 분명해요. 돈벌이를 위한 경쟁도 줄 것이구요. 한국 사회도 요즘같이 역동적인 상태를 탈피, 여유있고 무기력한 사회로 바뀔 것이에요. 학생들은 그때 어떤 직업과 학문이 전성기를 맞을지 지원에 앞서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해요. 즉 단기적인 시각으로 학과선정을 하지 말고, 장기적인 안목을 통해 여유있게 바라보라는 얘기입니다.
하-미래의 인기학과를 점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죠. 또 굳이 인기학과를 선망할 필요도 없어요. 인기판도는 항상 변하기 마련이니까요. 예컨대 요즘 인기학과로 꼽는 전자공학과는 불과 10여년전에 전기공학과에서 갈라져 나온 학과입니다. 또 치의예과는 10여년 전에는 비인기학과였으나, 요즘에는 인기학과로 부상하고 있어요. 사실 우리 생물학관련학과의 주가가 이처럼 빨리 오를줄은 그 학문을 하는 교수인 저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저는 학생들에게 '비인기학과에 도전하라'고 들려주고 싶어요. 인기학과에 들어가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지치고 시달리는 것 보다는 비인기학과에 입학, 공부를 여유입게 즐기는 게 훨씬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학문이라도 인간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이므로 비인기학과에 가서 그 방면의 1인자가 되는 것이 현명하지요. 이는 경쟁을 피해 가라는 식의 비겁한 조언은 아닙니다. 또 5~6년 후에는 현재의 비인기학과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을 수도 있잖아요.
김용-인기학과의 꼴지보다 비인기학과의 수석 합격자보다 점수가 낮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졸업할 때는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요. 인기학과의 꼴찌는 미래가 불투명해지지만, 비인기학과의 수석에게는 탄탄대로가 열리지요. 이는 제가 교수생활을 하면서 실제로 많이 목격한 사실인데, 수험생들에게 '만원버스를 타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어요.
박-소꼬리 보다는 닭머리가 좋다는 데, 의견을 달리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3류대학일지라도 수석졸업하면 인생이 꽃피고, 1류대학 출신이라도 학점이 나쁘면 결코 대접을 받지 못해요.
그런데 닭머리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괴물이 있어요. 점수대에 맞춰 대학이나 학과를 결정하게 하는 세태가 바로 괴물이지요.
각종 모의고사를 통해 대개의 학생들은 자신의 점수대가 몇점대인지 알고 있어요. 예를 들어 박아무개군이 2백80점대의 점수를 받는 학생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아마도 박군은 지원에 앞서 입시기관에서 임의로 정해놓은 자료를 검토할 거예요. 그런데 박군의 눈길은 2백80점대 대학과 학과에만 고정돼버려요. 설령 2백60점대에서 매력적인 학과를 발견하더라도 무시해버리기 일쑤지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2백60점대 학과에 지원하는 것을 큰 컴플렉스로 느끼는 거예요. 이런생각이 대학이나 학과를 주도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게 합니다
●- 여학생은 여학생선호학과를 피해야
김용-대학을 조금 낮춰서 가면 유리한 점이 많아요. 장학금주지, 상대적으로 좋은 학점 딸 수 있지, 교수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지, 졸업하면 외국유학의 기회도 주어지지, 오히려 발전할 소지가 훨씬 커요.
또 조금 전에 박교수님이 입시기관이 정한 입시사정표 말씀을 하셨는데, 수험생들은 이 표를 과신하지 말아야 해요. 무슨 책임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적중률도 신뢰하기 어려워요. 단순한 참고자료로만 활용해야지요.
하-대학에 대한 허영심이 너무 커요. 어릴때부터 일류병을 앓아 왔으니 이해할 만도 해요. 그러나 큰 인물은 1류대학에서 나오는 법이 거의 없어요. 서울대 졸업생은 참모형이지 보스형은 아니라는 말은 시사하는 바 크잖아요.
김용-많은 자연과학 전공학생들이 대학교수가 되기를 원하고 있는데, 어떻습니까? 우리 수학과의 경우를 말씀드리면 매년 8천명의 학생이 졸업하고 수백명이 유학중이지만, 교수로 임용되는 사람은 극소수인 형편이에요.
박-교수라는 직업은 현재가 인기절정인 듯 합니다. 앞으로 10년 뒤에는 선호도는 물론이고 사회적인 지위도 떨어질 것으로 보여요. 교수를 '장래희망'으로 적어 놓은 학생중 많은 수는 연구소 등으로 흡수될 수 있겠지요.
김용-이공계 대학에서도 여학생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차 높아가고 있어요.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이는데, 일부 학과에서는 지나치게 여학생비율이 늘어나 고민하기도 한다는 군요. 아마도 약대가 대표적인 경우겠지요. 그렇다면 여학생들이 지원하기에 알맞은 과가 따로 있습니까?
박-이 문제는 우리 사회가 여성인력을 어떻게 보느냐와 직결돼 있어요. 현재 여학생들은 생물학 관련분야에 대한 선호도가 크고, 물리학 수학등에는 비교적 지원율이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진국에서 여성 물리학자 여성 수학자가 많이 배출되는 것과는 대조를 이루지요.
저는 여학생들에게 여학생이 잘 안가는 과를 노크해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이것도 닭머리 이론의 일종이죠. 앞으로는 '여성 연구원을 반드시 일정비율 이상 뽑아라' 하는 내규도 생길 전망이므로 여학생의 과학계 진출가능성은 매우 크다 할 수 있어요.
김창-여학생들은 가급적 자유업을 가질 수 있는 학과를 지원했으면 해요. 예컨대 약학과 디자인학과 보험학과 관광학과 컴퓨터관련학과 등이 좋겠지요.
하-여학생은 체력면에서 남학생보다 떨어지고 나중에는 가정과 양립시켜야 하므로 제약이 많아요.따라서 문ㆍ이과를 떠나서 조언하라면 인문사회계통에 지원할 것을 권하겠어요.
확실히 약대나 생물계통 학과에는 여학생들이 몰리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정적인 학문일 것이라는 오해 때문이죠. 그런데 실제로 생물학은 실험위주의 동적인 학문이에요. 따라서 상당한 중노동이 필요한 데, 여학생들은 체력이 달려요. 어쨌든 실험위주학과에 여학생이 진학하면 경쟁에서 뒤처질 가능성이 커요.
김용-미국이나 일본 학생들은 어떻게 진로선택을 하는지 궁금해요. 미국은 대학을 다니면서 결정하게 되어 있고, 전교 전과도 자유로워 별다른 갈등이 없어보이는 데요.
하-일본 학생들의 사정은 우리와 비슷할 것입니다. 그 대신 충분한 정보가 사전에 주어지므로 실수할 확률은 줄어들겠지요.
김창-일본 학생들은 가업잇기를 중요시한다는 점이 우리와 다른 점이에요. 도쿄대학출신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초밥장사를 한다는 얘기는 유명하지요.
김용-다소 주제에서 빗나간 얘기지만, 내신제 확대에 대해 의견을 나눠보지요. 내신비율을 더 높여야 한다, 현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갑론을박이 한창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창-서울의 고등학교 한 학급(60명 정도)당 대학 진학자수는 20명 정도이고, 지방으로 내려가면 1자리 수가 보통입니다. 실제로 서울과 지방학생 간의 학력차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래서 내신비율을 높이면 서울의 고등학교 출신자에게 불리하다고 울상이에요.
그러나 저는 내신비율을 더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입니다. 여러 여건이 불리한 지방학생들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주기 위해서라도 높여야지요. 또 현재 내신반영비율은 30% 수준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기본점수를 빼면) 6%정도 차밖에 나지 않거든요.
하-저도 내신성적 반영비율을 대폭 올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신비율을 더 올리면 안된다는 측은 3가지 문제를 그 근거로 들고 있어요. 즉 현존하는 학교간의 학력차, 치마 바람, 선생님들의 '장난'을 막을 수 없다는 겁니다.
저는 이 주장의 합리성이 약해 보입니다. 선생님을 믿어야지요, 그러면 치마바람도 동시에 물리칠 수 있어요. 또 학력차도 문제가 될 수 없어요. 잠재능력에 있어서는 서울에서 1등하는 학생과 지방에서 1등하는 학생의 차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죠. 그리고 우수한 지방학생들이 지방대학에 많이 지원해 주었으면 해요. 물론 지방대학에 대한 유형무형의 차별철폐가 선행돼야 겠지요.
●- 통속적인 유혹에 약해
김용-고등학교 교사들의 욕심이 학생들을 망치는 경우도 많다고 해요. '서울대 몇명 합격'이라는 실적을 위해 반강제로 학생을 서울대에 지원시키는 거에요. 무리하게 하다보니 자연 학과는 무시되지요.
박-학교의 명예를 위해 '희생' 당하는 학생이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어요. 이같은 교육계의 풍토는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합니다. 학생이 우선이 돼야지요.
김창-원서를 쓸 때 학생들은 좀 더 의연한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특정 대학 특정 학과에 들어가 공부할 사람은 선생님도 부모님도 아닌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죠. 부모들은 흔히 '자식때문에 산다'고 말하지만 공부나 진로문제에 대해서는 무지한 경우가 많아요. 또 시대 감각도 뒤떨어지기 쉽구요. 또 선생님이 시키는대로 받아 적는 일도 현명하지 못해요. 대개 학생들은 가장 통속적인 권유에 약하기 마련이죠.
김용-끝으로 수험생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하시지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 문과ㆍ이과로 나뉘는데, 이 선택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어쩌면 인생의 첫 단추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 뒤 원서 쓸 때까지 약 2년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이 기간동안 장래를 구체적으로 설계해야 하는데, 될수록 빨리 정하는 게 유리해요. 그리고 그 결심을 굳혀나가야죠.
김창-사실 무슨 과를 택하면 좋을지 참고할 수 있는 믿을만한 책조차도 없는 실정이에요. 담임 선생님의 조언을 듣는 것도 한계가 있구요. 대개가 자기 중심으로 어드바이스를 해주기 때문이죠. 또 졸업생들을 불러서 진로가이드를 하는 학교도 있는데, 성과는 그리 크지 않은 모양이에요.
이같은 상황 하에서 경험이 부족한 학생들이 바른 선택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이런 충고를 해주고 싶어요. 관심있는 전공을 담당하는 대학교수를 직접 찾아가 보라구요. 선택에 도움을 얻기 위해 교수실 문을 두드렸을 때 상담을 거절하는 교수님은 아마 없을 거예요.
하-대학은 중ㆍ고교와는 다른 곳입니다. 학생들은 자신의 적성과 좋아하는 과목을 고려해서 전공을 정해야 해요. 대학 이름에 현혹되지 말고 학과 중심으로, 청춘을 불 태울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행복하다는 것을 재삼 강조하고 싶어요.
박-삶의 이상, 개인적인 자아완성, 미래상, 자기성취감 등을 총제적으로 파악해 전공학과를 선정해야 합니다. 또 얼마나 보람있는 일이냐,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일이냐를 따져보는 것도 중요해요.
절대 유행을 쫓아 인기학과에 지원하지 말고 자신의 성적을 의심받을까 두려워 성적과 일치되는 학과만 고집하는 어리석음은 피해야 해요.
될수록 낮춰 가세요. 최고로 낮춰 가는 사람이 가장 성공합니다. 또 학부모나 선생님의 말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 결정해야 후회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