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회암 퇴적층에 50만년간 꼭꼭 숨어 있다가 불과 60년전에 빛을 본 북경원인. 그들의 모습과 삶이 남겨진 유적들에 의해 하나씩 벗겨지고 있다.
금년 봄 학회참석차 중국을 방문했던 필자는 평생 잊지 못할 학문적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제까지 교과서에서나 보아 왔던 인류의 한 조상, 즉 50만년 전의 북경원인(北京猿人)을 직접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북경원인의 고향인 주구점(周口店) 유적지를 돌아 본 감격은 지금 생각해도 뿌듯하다.
공룡과 맘모스의 뼈도
오전 회의가 끝난 직후, 마이크로버스를 대절한 우리 일행은 지난 86년 영국에서 열렸던 세계고고학대회에서 만나 이미 잘 아는 '우르캉'(吳汝康)교수의 안내와 설명으로 주구점을 방문하였다. 그는 중국 사회과학원 고척추 고고인류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는데 인류진화에 관한 새로운 학설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중국의 대표적인 석학이다.
우교수는 주구점으로 가는 도중에 자신의 연구소가 있으니 잠깐 들리자는 제안을 하였다. 최신의 고층빌딩 두채를 사용하고 있는 중국 고척추고고인류 연구소는 명성 그대로 중국 자연사 박물관 바로 그것이었다.
중국 전역에서 발굴된 엄청난 양의 동물화석들이 이곳에 거의 총망라돼 있었다. 여기에는 이미 오래 전에 절멸된 공룡이나 맘모스의 동물뼈도 포함돼 있었다. 약 1백50명의 연구원들이 재직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전문잡지에서 낯익은 이름의 얼굴들이었다.
지질학자의 개가
연구소를 나선 우리 일행은 산이라고는 그림자도 볼 수 없는 평지를 54km 정도 달렸다. 이제는 북경시내와는 꽤 먼 거리였다.
마침내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주로 석회암을 채취한다는 한 탄광마을에 들어섰다. 주구점부락이었다. 그 마을의 서남쪽에는 용골산(龍骨山)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북경원인의 옛 고향이다.
동서길이 1백40m, 남북길이 40m. 산기슭 곳곳에는 여러 개의 석회암 자연동굴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동굴 안에서 50만년 전의 인류가 산 것이다. 이러한 인류역사상 중요한 동굴을 쉽게 둘러볼 수 있도록 시멘트 오솔길이 산주위를 휘감으며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 일행은 먼저 50만년 전의 북경원인 머리뼈가 나와 세계의 화제가 되었던 제1 지점굴을 들어가 보았다. 이 굴은 약 30m 지점 아래까지 내려갈 수 있도록 계단이 나 있었는데 유물이 출토된 퇴적층이 명확하게 확인되었다.
이 유적은 1921년 스웨덴의 지질학자인 '앤더슨'(1874~1960)과 '스단스키' 등이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앤더슨은 중국정부의 광공업 고문으로 초빙되어 광산 등을 탐사하고 있었다.
앤더슨은 탄광의 고문자격으로 왔기 때문에 그가 주구점 일대를 탐험 조사하게 된 것은 우연한 일만은 아니었다. 지질학자인 그가 용골산의 석회암 동굴에서 동물의 화석들을 채집하면서 어금니(臼齒, 구치)화석 하나를 채집한 게 북경원인이 빛을 보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일제시대 경주에서 신라시대 서봉총 고분을 발굴할 때도 내한했던 스웨덴 황태자가 1926년 북경을 방문한 후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후 해부학자인 'D.블레이크'교수가 주구점에서 발굴된 인골이 사람의 화석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짓고 그것을 '시난트로프스 페키넨시스'라고 명명했다. 우리는 그것을 '북경원인'(北京猿人)이라고 부르고 있다.
45인의 인골
192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발굴은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십회에 걸쳐 계속되고 있다. 현재까지 발굴된 지역의 넓이는 약 2만㎢ 이상인데 22개 지점에서 화석퇴적층이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45인의 인골, 수십만점의 석기 골기 동물화석들이 발견되었다.
출토된 인골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남자의 키는 1백56cm, 여자는 1백44cm로서 현대인보다 작은 편이다. 그러나 팔다리 모양은 별 차이가 없다. 뇌용적량도 현대인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현대인의 뇌용적량을 1천4백50cc라고 할 때 그보다 약간 적은 1천2백50cc 정도이다. 또 이마가 경사지고 눈두덩이 튀어나온 것도 현대인과는 다른 점이다.
찍개류가 주류를 이뤄
한편 북경원인들이 사용하던 도구는 타제 석기류가 주가 된다. 자갈들을 한쪽 또는 양쪽에서 떼어내어 만든 찍개류가 주류를 이루는 것이다. 주먹도끼를 주체로 하는 유럽 아프리카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즉 북경원인은 '자갈돌 찍개 문화권'에 속한다. 이런점은 한국 구석기문화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어쨌든 이곳에서는 전후기 구석기 유적이 함께 출토된다. 주구점 1지점에서는 전기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었지만 같은 산의 윗부분에 위치, 산정동(山頂洞)이라고 명명한 동굴에서는 후기 구석기 유적까지 출토되고 있다. 이는 인류의 탄생에서부터 그 발전과 전개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물이다. 또한 인류 최초의 불의 사용을 증명하여준 최고(最古)의 유적이기도 하다.
중국인 학자로 이 작업에 참가한 배문중(裵文重, 1904~1983)과 가란파(賈蘭坡)박사등은 중국 과학원 고척추동물 및 고인류 연구소 리더로서 이 방면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29년에 처음으로 북경원인의 두개골을 발견한 학자도 배문중박사였다.
자취를 감춘 두개골
인류 최초의 화석인골은 중국 이외의 다른 곳에서도 출토되었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발견된 자바원인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자바원인의 두개골은 형체가 명확하지 않다. 복원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부서진 파편만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북경원인의 두개골은 '최상품'이었다.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5개의 두개골이 차례로 발굴되었던 것.
그러나 최초로 발견된 두개골들은 현재 행방불명 상태이다. 중일전쟁으로 일본군이 북경을 점령한 이래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1941년 12월8일 일본인들은 이 화석인골이 보관돼 있던 북경의 협화의학원에 들어갔다. 북경원인의 유적을 접수할 요량이었다. 두개골을 발굴한 배문중박사의 입회 아래 접수를 서둘렀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두개골이 사라진 것이다. 이런 일이 있기 일주일 전에 최종적으로 확인했던 배박사도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들의 행방은 오늘도 묘연한 채, 복제품만이 돌아다니고 있다.
북경원인과 관련된 또하나의 흥미로운 연구는 그들 사회에 식인풍습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봐이덴라이히'교수가 이곳에서 수집된 인골편을 관찰한 후 내린 결론인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두개골의 수는 많은데 비해 사지의 뼈부분은 적다는게 식인설의 요체이다. 즉 골수를 빼 먹기 위해 뼈를 부숴 버렸다는 얘기다.
동굴에서는 나무의 열매와 껍질도 발견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식물도 즐겨 먹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북경원인이 거주했던 동굴에는 불을 사용한 흔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는 음식물을 익혀 먹는 데 활용했거나 난방용으로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코뿔소의 뼈도 발굴돼
주구점에서는 화석인골 이외에도 1백11종에 달하는 동물화석이 발견되었다. 그중 30종은 이미 절멸된 동물의 유골이다. 예컨대 지금은 북경 주변에 서식하지 않는 물소나 코뿔소의 뼈도 같은 층에서 나오고 있다. 또 고양이 뼈도 있는데, 그 크기를 통해 볼 때 덩치가 지금의 사자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북경원인은 자연을 극복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갔을 것이다. 특히 수렵과 채집에 의존했던 그들의 생활에서 먹이가 되어주는 동물들은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따라서 이 동물들을 잡는 기술의 개발은 그들에게 주어진 커다란 과제였다. 이를 통해 기술도 발달하고 과학정신도 싹텄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무튼 이들 화석동물들은 당시의 환경을 말해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북경원인의 후두골에는 작은 화산형 돌기가 있다. 이것은 현재의 황색인종(몽골로이드)의 특징과 같다. 또 숟가락 모양의 상문치(上門齒)를 갖고 있는데 이 점도 몽골로이드의 특징중 하나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경원인이 몽골로이드 직접 선조라고 단언할 수 는 없다.
주구점 동굴중에는 퇴적층이 50m에 이르는 곳도 있다. 이 퇴적층이 형성되기까지에는 아마도 수십만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깊은 층에서 나온 두개골과 최상층부에서 나온 두개골의 해부학적 차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그들의 생활이 오랜세월동안 안정되어 있었고 외적의 침입이 없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촌인의 이빨
구석기시대 초기의 중국 북부에는 북경원인만이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54년 중국 산서성(山酉省) 정촌(丁村)에서는 구석기시대 초기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사람의 치아3개가 출토되었다. 그중 2개는 상문치였는데 몽골로이드의 특징인 숟가락 모양의 치아였다.
치아의 주인은'정촌인'이라고 명명되었다. 정촌인은 시난트로프스보다는 약간 후에 출현한 원인으로 추정된다.
전기구석기시대의 북경원인은 아주 높은 동굴에서는 살지 않았던 것 같다. 그후 점차 높은 동굴에서도 사람이 살게 되었는데, 이 주구점 동굴중 가장 높은 동굴에서 출토된 뼈는 현생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로 인정되고 있다.
이들을 상동인(上洞人) 또는 산정동인(山頂洞人)이라고 부르는데, 1933~34년 사이에 10구 이상의 인골이 출토되었다. 함께 나온 3개의 두개골은 노인 중년부인 젊은 여성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노인은 황인종, 중년부인은 에스키모, 젊은 여성은 멜라네시아인과 비슷한 점이다. 산정동인이 살았던 후기구석기시대의 주구점 근처에는 여러 지방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든지, 아니면 산정동인이 이곳 저곳으로 돌아다닌 결과일 것이다.
이상한 점은 또 있다. 3개의 두개골중 2개는 타박상을 입은 흔적이 있고 나머지 한개도 목부분에 상처를 입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에도 격렬한 싸움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북경원인과 다른 원인(猿人)으로 1964년 중국 섬서성 남전현(藍田縣)에서 출토된 두개골은 북경원인보다 약 10만년은 더 오래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 황하유역이 아닌 남쪽에서도 구석기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1965년 운남성 원모현(元謀縣)에서는 사람의 안쪽 앞니(門齒)의 화석과 석기류가 발견되었다. 이는 약 1백70만년 전의 것으로 현재까지 이 '원모인'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간으로 알려져 있다. 또 사천성 자양현(資陽縣)에서 발견된 소년의 두개골은 약 8만년 전의 호모 사피엔스로 '자양인'이라 불리운다.
중국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것은 이제 겨우 반세기 가량 밖에 되지 않았다. 그 전에는 석기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는 중국인의 문명관 탓도 있다. 즉 석기를 사용하는 야만적습성은 자기들과는 상관없다는 중화사상(中華思想) 때문일지도 모른다.
주구점에서 1927년 사람의 치아가 나와 북경원인이란 학명으로 명명되고 1929년 배문중박사가 완전한 머리뼈 1개를 발견함으로써 중국의 구석기연구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 주구점은 인류의 탄생지, 대륙문화의 발상지로서 세계적인 유적이 된 것
용곡동굴의 화석인골
한편 우리나라는 1960년까지 구석기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구석기 공백지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후 지속적인 발굴사업으로 이미 약 20개소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견되었다.
그중 세계적인 이목을 끈 발견이 최근 이룩되었다. 평양근처 상원 용곡동굴에서 10명의 화석인골이 수만점의 타제석기류와 함께 출토된 것이다. 이 용곡동굴 유적은 주구점과 같은 석회암동굴 유적으로 인골이 잘 보존될 수 있는 환경하에 있었다.
여기서 나온 인골의 연대를 발열광법이라는 과학적 방법에 의해 측정한 결과, 40만~50만년 전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 연대에 있어서나 화석인골의 특징에 있어서나 주구점과 유사성이 매우 큰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 화석인골의 발굴은 최근 북한 고고학자들에 의해 이룩된 최대의 성과이다. 이를 계기로 한반도 안에서 살았던 최초 인류의 거주양상과 체질 등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금년으로 북경원인이 발견된지 꼭 60년이 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북경에서는 올 가을 대규모 국제학술대회를 열 예정이며, 여기에는 세계적인 석학들이 초청되었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몰라도 필자가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중국의 신문방송은 연일 주구점 보존문제를 커다란 뉴스로 취급하였다. 실제로 주구점의 '오늘'은 우려할 정도로 느껴졌다. 석회암 채취회사들이 이 지역에서 엄청난 양의 석회암을 채석, 서서히 파괴되어가고 있었다.
우리 인류가 남긴 역사적인 유적은 비단 당사국 소유의 문화재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공동 조상이 남긴 것이라는 사실을 반추할 때, 주구점과 같은 문화유산을 소중히 간직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중국의 박물관 현황
끝으로 중국의 박물관 현황을 간단히 소개한다. 중국은 1979년 박물관법에 해당하는 '성 시 자치구지역에 있어서의 박물관 규정'이라는 법령 초안을 마련했다. 그 결과 1977년 3백개에 불과하던 박물관이 12년 뒤인 오늘날에 와서는 무려 8백27개로 늘었다. 또 박물관학을 설치한 대학만도 6개에 이른다.
한편 일본은 30여개의 대학에서 박물관학을 전문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2차대전 후 지금까지 1만명 이상의 학사를 배출하였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지만 박물관학과는 어느 한 대학에도 설치돼 있지 않은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