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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도와 산호초로 이루어진 별처럼 많은 섬들. 그곳엔 아직 원시의 순수와 아름다움이 살아 있다.

고고학이나 언어학자들은 폴리네시아인의 기원지가 멜라네시아이며 궁극적으로는 아시아라고 보고 있다. 피지제도에서 사모아와 통가 두 제도에 이주한 사람들이 3세기경 마르케사스제도로 건너 갔고 다시 하와이제도 이스터섬 뉴질랜드 방면으로 이주했다고 보고 있다. 이 이주세계를 폴리네시아 '트라이앵글'이라고 한다.
 
트라이앵글

별처럼 많은 섬들

폴리네시아는 어원이 '많은 섬'이란 뜻이며 오세아니아에서 섬이 가장 많다. 이 많은 섬중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는 마르케사스, 투아모투, 소시에테, 투부아이, 감비에의 다섯제도로 소련을 제외한 유럽과 맞먹는 넓이의 해역에 떠 있다. 이 섬들은 모두가 화산도나 산호초로 이루어져 있다. 그만큼 폴리네시아는 원시의 아름다움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가 정치적으로 하나의 단위로 간추려진 것은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두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간에 종교와 해운분쟁이 전개된 결과였다.

이에 앞서 16세기에는 많은 스페인 선박과 포르투갈 선박이 남태평양의 이 해역을 항해했다. 그러나 정식기록으로서의 소시에테제도 발견자는 영국해군의 '새뮤얼 월리스'로 되어있다. 월리스는 1767년 타히티섬의 마다바이만에 닻을 내렸다. 그는 당시 남반구에 있다고 믿고 있던 '알려지지 않은 남방대륙' 을 확인하기 위해 항해하고 있었다. 같은 무렵 영국해군은 '제임스 쿠크'에게도 남태평양 탐험을 위촉했다. 쿠크는 1769년 6월3일 금성의 태양면 통과를 관측하기 위한 왕립지리학회 관측대원과 함께 타히티섬을 방문했다.

이를 전후하여 프랑스의 '부겐빌'제독이 부도우즈호로 전설의 '남방대륙'을 향해 떠났다. 또 1788년에는 유명한 바운티호가 팡나무(뽕나무과의 열대성상록교목. 태평양제도 원산. 열매는 원주민의 주식이고 목재는 건축 조선 등에 씀) 묘목을 채집하러 갔다. 이 나무를 서인도제도에 이식하면 흑인노예에게 값싸게 식품을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원정이 유럽인에 의한 폴리네시아 지배의 제1단계이다. 이어 1797년에는 영국의 선교사단이 파견되고 1830년에는 프랑스의 카톨릭사제단 제1진이 이 땅을 밟았다.

프랑스의 지배가 감비에제도에서 시작되어 서서히 타히티로 향해감에 따라 폴리네시아 전역이 영국과 프랑스의 이해가 충돌하는 무대로 변해갔다. 그러다 드디어 1843년 타히티사상 유명한 브리차드시건이 일어났다. 타히티는 1842년에 프랑스보호령이 되었으나 메소디스트파의 선교사 '브리차드'가 영국영사에 지지하여 외교상의 중대사건으로 발전했다. 이 선교사를 추방하고 마르케사스제도에 대한 프랑스의 패권을 확립했다.

1880년 프랑스는 포마레왕조 최후의 왕 포마레 5세를 설득하여 타히티 북서쪽에 있는 여러 섬을 병합하고 타히티를 오세아니아의 프랑스식민지 정청소재지로 만들었다. 7년후에는 폴리네시아의 여러 섬들이 프랑스 보호령으로 통합되었다. 그 뒤 1957년에는 남태평양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로 명명되고 1958년에는 주민투표결과 프랑스의 해외영토가 되었다. 그때부터 프랑스의회의 상·하원 의원 각 1명이 폴리네시아에서 선출되고 있다. 그리고 타히티의 수도 파페에테에는 고등판무관이 상주했으며 1977년에는 주민자치권이 인정됐다.

유럽인에 비친 폴리네시아

폴리네시아의 섬들이 유럽열강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이 섬들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인종적 문화적 언어적으로 같은 폴리네시아문화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런 동질성은 5세기부터 15세기에 걸친 광범하고 수많은 폴리네시아인들의 이동결과였다. 해양민족인 그들은 사모아에서 마르케사스, 소시에테제도, 뉴질랜드 등의 섬으로 분산하여 갔다. 그런것을 나타내듯 타히티라는 섬이름은 '넘어간다' '이동한다' '위치를 바꾼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최초의 폴리네시아인은 남미에서 집단으로 이동한 것이라는 동방이동설은 1947년에 노르웨이의 인류학자 '헤이엘다르'가 발사나무로 만든 뗏목 '콘치키'호로 탐험하여 입증을 시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가설은 많은 전문가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민족이동은 서쪽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폴리네시아어와 인도네시아어의 유사성, 동남아시아 기원의 가축사육, 폴리네시아의 카누와 말레이지아의 배와의 유사성 등이 이를 뒷바침하고 있다.

잃어버렸던 낙원을 폴리네시아에서 다시 찾았다는 찬탄으로 가득한 여러가지 설화가 초기 유럽인 항해가들을 통해 구전되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타히티의 발견으로 낙원을 다시 찾았다는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디드로'(Denis Diderot·1713~1784)는 부겐빌제독이 항해기를 출판한 직후에 "타히티인은 세계의 원초와 접하고 있고 유럽인은 노경에 이르고 있다'라고 새로 발견된 섬들 주민의 원시사회를 표현했다. 유럽인들이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대였던 그만큼 나히티를 중심으로한 섬들이 '인류의 황금시대'를 이루고 있는 바로 그곳이며, 도원경으로 본것이다.

그래서 다시 발견한 에덴에 대한 많은 찬사가 나왔다. 소설가로는 '스티븐스' '멜빌' '로티' 등등···. 로티의 '결혼'은 이국적 문학으로서 널리 읽혔으며 프랑스 화단의 귀재 '고갱'은 법열과 예술에 사는 꿈을 이곳에서 실현했다.

폴리네시아문화에는 수수께끼가 많다. 그 정점은 이스터섬의 거대한 석상이나 조인(鳥人)신앙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암석조각일것이다. 이런 신비감이 한층 폴리네시아의 섬들에 매력을 더해주었다. 섬들과 바다는 실로 훌륭한 조화를 이루어 보인다. '남해의 푸르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해양은 두 종류의 육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하나는 화산도, 다른 또 하나는 산호초다. 화산도는 화산암으로 이루어졌으며 나무가 무성하다. 이에 비해 산호초는 산호를 안고 있는 환초로 둘러싸여 있다.

환초는 그야말로 자연이 이룩한 경이. 해면과 거의 같이 잠겨 있는 환초는 가장자리를 진주로 꾸민 에머럴드 위에 금은 보석을 박은 장신구 같다. 환초의 좁은 틈으로 바깥 바닷물이 섬주위에 들어와 산호초 호수를 만든다. 외해에서 밀려오는 파도는 산호초 벽에 부딪쳐 부서져 흩어지나 산호초호수의 수면에는 잔물결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조용하고 맑은 호면은 해저의 해조류와 모래와 산호를 여러가지 색깔로 비쳐보인다. 산호초호수 안쪽은 조용한 모래톱이 길게 선을 그리며 뻗어 있고 그 주변에는 야자나무가 이름답게 우거져 있다. 태양도 이곳에서는 모른 것을 아름답게만 하기 위해 그 독특한 빛을 한층 반짝인다.


균형있는 신체

섬 사람들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향해 "이아 오라 나!"(안녕하세요)하고 반갑게 맞으며 꽃이나 조개껍질로 만든 목걸이를 걸어준다. 허례허식 같은 것은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따뜻함이다. 이것이야말로 폴리네시아의 전통이며 유럽의 영향 속에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유지된 미풍이다. 스스럼없이 손과 볼을 내밀고 얼굴을 꽃처험 환하게 펴고 즉흥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카누에 가득 실은 선물과 타산이 없는 연회. 섬사람들은 어디선가 돌연히 나타난 외국인들을 이렇게 환영했다. 영국의 전함 바운티호에서 반란이 있었던 원인도 실은 섬사람들의 거짓없는 친절에 있었다. 함장 '블라이'가 5개월간 계속된 이 타히티에서의 행복한 체류를 끝내고 출항하려고 엄한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섬 여인들의 야성미와 애교로 가득한 아름다움은 빅토리아여왕시대부터 지금까지 침투한 유럽문명에도 오염되지 않고 그대로 이다.

머리에 장식한 꽃다발이 물결처럼 흐르면서 허리까지 이르는 검은 머리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화려한 색조의 '파레우'(허리를 감는 옷감)가 모통둘레에 우아하게 걸쳐져 있고 '모노이'(아자유와 타히티 특유의 꽃향으로 만든 향유)의 향이 갈색 피부에 감돈다. 그런 타히티 여인들은 마치 여신과 같다. 고갱은 이렇게 말했다. "여인들의 황금색으로 빛나는 육체와 호박색의 매끄러운 피부에는 마음 속으로 깊이 스며드는 우아함이 감춰져 있다"

여인들 뿐만인가. 남성들도 훌륭하다. 부겐빌의 다음과같은 말은 약간 탐미적이긴 하지만 정확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이렇게 균형이 잡힌 체구의 사나이들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달리 비길 데가 없어 힘이 센 헤라클레스나 군신 아레스(마르스)를 그릴 때 이만큰 적절한 모델을 다른데서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축제의 모습

남위 17도의 섬에서는 밤이 갑자기 온다. 밝은 낮에 돌연 검은 정막이 내리는 것이다. 열대 특유의 후덥지근한 공기도 사라지고 시원한 저녁바람이 분다. 그러면 사람들은 '레바레바'라는 야자나무 잎에 하이비스커스를 꽂은 꽃다발을 머리에 얹고 스페인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시작한다. 처음엔 몇사람이 시작한 노래가 나중엔 대합창이 된다. 유럽사람들은 이런 집단적인 들뜬놀이를 금지했다. 그러나 7월14일의 '티우라이'축제 때만은 지금도 그대로다. 티우라이란 영어의 7월(July)이 와전된 것. 이 남쪽섬의 축제 때는 섬사람 모두의 희열과 정력이 폭발한다. 티우라이 축제는 몇주 전부터 준비가 시작되어 약 1개월간 섬 전체가 축제 무드에 젖는다.

티우라이축제가 시작되면 남자들의 색채가 선명한 '모레'(나무잎이나 나무껍질을 천연염료로 짙게 물들여 만든 의상)와 여인들의 '아와모레'(허리도롱이). 그리고 독특하게 만든 관 등이 어울리는 화려한 춤이 펼쳐진다.

이런 폴리네시아춤은 원래는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마음을 서로 통하는 의식이었다. 원통형의 북 '토에례'를 가는 북채로 쳐 리듬을 낸다. 이 리듬에 맞춰 모두가 어울려 춤을 춘다. 타히티인에게 있어 춤은 노래와 함께 생활의 일부다.

'타마차라차'라는 연회의 식사가 있다. 섬에서 나는 모든 것을 재료로 하여 타히티식 오분인 달군 돌에 익힌 특별요리가 나온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바닥에 달군 돌을 깔아 그 위에 해산물과 산에서 나는 식품재료 등을 얹고 바나나 잎을 덮는다. 그 위에 흙을 덮어 한동안 두면 알맞게 익는다. 익은 요리는 바나나 잎에 얹어 낸다. 보기에도 재미있고 맛이 좋다.

폴리네시아인들은 모두가 숙련어부다. 한쪽에만 플로트(float·부주·浮舟)가 달린 작은 카누로 산호초호수나 외해로 나가 여러가지 종류의 조개와 고기를 잡아온다. 가다랭이 농어 숭어 얼룩쥐치 등이 주로 많다.

타히티의 신화에는 식생활의 기초가 되어 있는 어류 외에는 육서동물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지금도 육서동물은 거의가 가축 뿐이다. 폴리네시아인이 양쪽에 플로트가 달린 대형 카누에 싣고 먼 서방에서 데려왔거나 뒷날 유럽인들이 데려온 개와 고양이 돼지 말 소 닭 등이 그 모두다. 도마뱀 쥐 바퀴벌레 등은 화물선에 따라 온 것들이다. 그러나 대단히 공격적인 '나오나오'(모기)와 학명이 '스코로펜도라'라는 쏘이면 부기가 좀처럼 삭지 않는 지네만은 야수와 독사가 없는 이 섬의 유일한 복병이다. 모기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성가신 모기를 퇴치하려고 인도네시아의 몰러카즈섬에서 개똥쥐빠귀새를 가져왔다. 그러나 벌레라면 아무거나 먹는 개똥쥐빠귀도 이곳의 모기는 잡아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타히티섬의 향기높은 꽃 티아레

쿠크가 명명한 소시에테제도는 풍상(風上)제도와 풍하(風下)제도로 나누어진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부는 무역풍의 영향으로 바람위에 면한 동쪽의 여러 섬은 바람 아래의 서쪽 여러 섬보다 강우량이 3~4배나 된다.

오세아니아는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지만 소시에테제도도 단조롭고 언제나 여름기후이다. 그래서 가벼운 차림으로 지낼 수 있다. 때때로 굵은 비가 오지만 그것은 일종의 스콜이다. 우기에는 호우가 쏟아질 때도 있으나 곧 끝나고 맑은 하늘이 나타난다.

풍상제도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총면적의 4분의 1을 차지하며 주민의 대부분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타히티섬은 그 중심이 되는 섬으로 면적이 약 1천평방km. 옛날의 항해가들은 이곳에 각별한 애착을 가졌던 것 같다. 특히 부겐빌제독은 그리스신화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친 시테르섬의 이름을 따서 이 섬에 '새로운 시테르섬'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정도다. 1770년대에 이 섬에 온 스페인 항해가들도 타히티를 특히 좋아했다. 그래서 타히티는 폴리네시아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하늘에서 본 보라·보라섬^환초가 섬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 끊긴 틈이 수로가 되어 산호초호수와 바깥 바다에 이어져 있다. 산호초호수는 언제나 파도가 없이 조용하다.

타히티의 어제외 오늘

1960년대에 프랑스는 타히티섬에 태평양핵실험센터를 설치하여 항만을 정비하고 파차차 국제공항도 열었다. 거기다 관광붐으로 해안에는 대규모 호텔이 줄지어 섰다. 그러자 급격한 경제팽창과 경제혼란이 왔다. 그런데도 타히티는 옛날에 사람들을 감동시켰던 매력을 조금도 잃지 않고 있다.

타히티는 크고 작은 두 개의 화산도로 이루어져 있다. 두 타히티의 연결보가 타라바 오지협이다. 이 해안일대는 바다물에 의한 심한 침식을 볼 수 있다.

오로헤나(2241m), 테투페라, 아오라이 디아템 등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강은 현무암질의 강바닥을 갉아 협곡을 이루었다. 그 계곡 사이에는 밤나무의 일종인 마페나무가 숲을 이루고 각 하천 연안에는 잎이 넒은 상록수가 많다. 섬의 연안평지에서는 야자나무 팡나무 파파이아나무 등이 무역풍에 흔들거리고 있고 그 잎 그늘에서는 열대의 도마뱀이 숨쉬고 있다. 작은 섬쪽에는 관목덤불과 구아바나무와 방향성의 외래품종 과수가 무성하다.

섬에는 '파페' 또는 '브아이'라는 이름이 붙은 지명이 많다. 이 두 단어는 모두 물 또는 강을 뜻하는 것이다. 브아이오라 파페아리 파페노초 파페에테 같은 것이 그것이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신선한 물은 타히티섬의 활기를 돋구고 있다.

고갱이 그린 섬여인들은 머리나 가슴이나 팔에 여러가지 꽃을 장식하고 있다. 지금도 꽃과 여인은 변함이 없다. 대표적인 꽃은 '티아레·타히티'라는 흰 꽃이다. 치자나무꽃의 일종으로 6~8장의 화판을 갖고 있으며 타히티의 심벌이다. 해질무렵이면 그 향기가 산들 바람을 타고 온 섬에 번진다.

주거는 전체적으로 수가 적어 드문드문한 느낌이다. 지금도 망고나무 그늘에 옛날과 같이 야자잎으로 지붕을 인 집을 볼수 있다. 야자잎 지붕이 지면에까지 축 늘어져 있고 벽은 대나무로 짠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종일 먼 파도소리와 바람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가 단단한 재목을 사용한 유럽식의 집에 살고 있다. 양철지붕의 방갈로풍 집이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행정부가 있는 파페에테에는 관청 병원 은행 호텔 쇼핑센터와 같은 현대도시적 건물이 많다. 옛날에는 목조에 페인트칠을 하고 둥근기둥과 베란다가 있는 건물이 많았으나 최근 수년동안에 철금 콘크리트 건물로 변하고 포장도로에 주차장도 생겼고 교통체증까지 더해지고 있다. 다만 고층 빌딩은 아직 들어서지 않았다.

관광객을 위한 시설

여행자 격증에 대비하여 해안의 대로에는 관광국도 개설되었다. 이건물은 전통적 양식을 지킨 것이다.

파페에테의 매력의 중심은 시장이다. 시장은 언제나 물로 씻어내기 때문에 청결하다. 섬의 토산물이 모두 진열되어 있고 특히 일요일의 시장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조리가 잘 된 식품 꽃 과일, 지금 막 낚아온 생선, 소쿠리 등이 즐비해 있다. 시장은 밤이 되면 섬 사람들의 정보교환 장소가 된다.

시장 밖에는 버스 센터가 있다. 섬에서 유일한 공공교통수단인 버스는 실은 트럭에 널빤지로 승객이 앉을 자리와 지붕을 만들고 페인트를 칠한 것이다. 이 버스가 섬안의 각지를 연락한다. 승객은 타히티음악의 리듬을 타고 허술한 의자에 앉아 덜컹거리며 여행하게 된다.

 

유럽인들은 파페에테 시내에도 거주하지만 근교의 계곡입구나 산중턱 또는 해안의 높은 지대에 산다. 특히 파페에테의 남쪽 부나추이아 주택지구에 많다. 대부분이 공무원 군인 기업체 간부들이다.


섬을 일주하는 데는 자동차로 하루 걸린다. 하나뿐인 환상도로 양쪽에는 야자나무와 바나나 나무가 우거지고 그 사이에는 갖가지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 섬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 있는 타하라차 언덕에서 내다보는 경치가 아름답다. 해안에 검은 모래밭이 커다란 곡선을 그리고 있는 마타비아만(타히티어로 '물의 얼굴'이란 뜻)과 쿠크선장과 연고가 있는 비너스곶도 이름답다. 이 일대에서는 타히티섬 북서쪽 약 15km 해상에 있는 모초레아섬의 작고 둥그런 산이 안개속에 싸여 하늘에 떠 있는것 같이 보인다.

 

타히티섬의 북동해안 타이레이에 있는 '물은 뿜는 동굴'은 암초의 균열에 빨려 들어간 파도가 분수가 되어 뿜어져 올라오는 것이다. 그 바로 가까이에는 타히티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바이하루루 폭포가 있고 폭포주변에는 식물군이 풍부하다.

섬의 남쪽 기슭 파페아리 식물원에는 약 1백종류의 열대식물과 미국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이식한 수목이 있다. 또 파페아리에는 1965년에 고갱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박물관은 산제포리냑재단이 관리하고 있으며 원주민과 친숙했던 고갱의 생활과 운명을 충분히 설명해줄 만큼 전시자료가 많다. 최근에는 고갱의 나무조각이 많이 수집되었다. 그것은 고갱이 마르케사스제도로 이주한후 그의 주거 입구 기중에 장식했던 나무 조각이다.

또 고갱박물관의 뜰에는 투아비제도의 라이바바에 섬 신전터에서 옮겨온 세개의 석상 '치키'가 있다. 투바이제도는 소시에테제도 바로 남쪽에 있으며 같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속한다. 폴리네시아인들은 석상을 이동하면 신들이 노여움을 산다고 믿고 있다. 사실 1933년에 이 '치키'를 운반한 선박의 선장들은 변사했고 이어 선원도 몇명이 변사했다.

폴리네시아인들은 지금은 신전에서의 종교 의식은 않지만 옛날의 신전의 신정을 범하는 것만은 피한다.

고갱박물관이 있는 파페아리에서 약 30km 북서쪽의 푸나아추이아에는 1977년에 세운 '타히티와 주변제도 박물관'이 있다. 여기에는 대표적인 폴리네시아 예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폴리네시아의 수호신「치키」상^옛날에는 이 신상 앞에서 여러가지 의식을 치렀다.


풍상제도와 풍하제도

파페에테의 북서해상에는 타히티섬과 같은 풍상제도에 속하는 모초레아섬이 있다. 주민들은 이 섬을 '바다에 누워있는 홍자색의 용'이라 한다. 모초레아란 폴리네시아어로 노란 도마뱀이란 뜻이다.

길이 60km의 환상도로를 따라 피어있는 티아레·타히티꽃향기가 그윽하다. 제2 타히티라는 이 섬은 현대화의 불협화음이 없는, 원래의 순수함이 간직되어 있는 섬이다.

타히티섬에서 서북쪽으로 2백70km 떨어진 곳에는 '태평양 진주'라는 보라·보라섬이 있다. 휴화산을 산호초호수가 에워싸고 있고 그 주변에 옹기종기 무여 있는 작은섬은 식물이 무성하다. 타히티를 소개하는 사진은 거의가 이섬을 찍은 것이다.

바닥 얕고 뽀족한 산호가 많아 해수욕장으로 알맞지 않은 소시에테제도 와는 달리 보라·보라섬 서쪽해안은 좋은 조건이 고루 갖춰진 해수욕장이다.

보라·보라섬의 서북쪽 50km에 있는 마우피티섬은 풍하제도중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유일한 섬이다. 산호초호수에 에워싸여 2백m 높이의 현무암 봉우리가 우뚝 서 있다. 그상공을 군함새와 갈매기가 유유히 날고 있다.

보라·보라섬의 남동쪽에 있는 라이아티아섬과 타하차섬은 하나의 산호초호수에 에워싸인 두개의 섬으로 풍하제도에서는 특히 중요한 섬이다. 라이아티아 섬은 면적 2백80평방km, 인구 6천5백명으로 제도중에서 가장 큰 섬이며 고대 폴리네시아의 성스러운 순례지여서 신전 흔적과 추장들의 묘소가 있다.

신전흔적은 반드시 바다를 향해 있다. 성역은 높이 2m정도로 돌을 쌓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라이아티아섬 오포아촌에 복원된 타프타프아테아 신전이다. 성역 중앙에는 피라밋형의 제단이 있다.

신화에서 종교가

폴리네시아 신화는 복잡하고 또 섬마다 다르다. 그러나 큰 윤곽은 대개 다음과 같다. 섬마다에서 전승된 신화가 합쳐져 하나의 종교를 이룬다.

이 종교의 창조신은 남녀 양성을 갖춘 타아로아신으로 육지와 바다를 만들어냈고 세계를 관장한다. 이 종교가 다시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변했다. 그래서 지금은 폴리네시아 전통의 신전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그러나 성역은 지금도 터부(taboo)이다. 원래 터부는 폴리네시아어이며 금기 신성등을 뜻한다. 이곳 예배소 간판에는 터부라는 표시가 반드시 곁들여 있다. 이런 경우는 무단출입금지라는 뜻이다. 풍하제도의 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푸아히네섬에는 가족용의 작은 신전이 많다.

고갱이 잠든 마르케사스 섬

소시에터제도 동쪽에 있는 투아모투제도는 힘이 센 바다신 투케라이가 폭풍을 타고 바위와 모래를 쌓아올려 만든 것이라는 현지 신화가 있다. 부겐빌도 위험군도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위험한 환초가 가장 많고 선박조난이 많았다. 그래서 거의 무인도 상태로 있다.

투아모투제도중의 랑기로아섬은 남태평양 최대의 환초로 맑고 푸른 바다에 뚜렷히 떠있는 하얀 성채와 같다. 하얀 산호초로 이루어진 기슭과 장려한 바다색의 대조. 투명한 물 속에서 이리 저리 노니는 물고기를 볼수 있다. 노래기 얼룩쥐치 성대등이 조초산호와 벽옥모양의 해조류사이를 헤엄치고 있다. 그 물고기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담청색 또는 밤색 무늬를 가진 큰 거거(조개의 일종)가 조용히 입을 벌리고 있는 것도 보인다.

같은 투아모투제도중의 섬인 마니히 타카포트섬 등에서는 1970년 이후 세계에서 유일하게 흑진주를 양식하고 있다.

투아모투제도를 남동쪽으로 연장한 곳에 있는 갬비에 제도는 거치른 4개의 화산도와 몇개의 환초로 이루어져 있다. 핵실험으로 악명높은 무르로아 환초도 여기에 있다.

소시에테제도의 남쪽,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가장 남쪽에 남회귀선에 걸터 앉듯한 모양으로 있는 것이 투부아이제도다. 이 부근에는 찬 남풍 '마라참'이 불고 있다. 투부아이섬을 중심으로 리마타라 루루투 라이바바에 그리고 약간 떨어져 있는 라파의 5개 화산도(휴화산)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느 섬이나 환초에 에워싸여 있다. 투부아이섬은 1769년에 쿠크가 발견했다.

투부아이섬은 땅이 비옥하여 주민들이 목축과 농경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이점이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다른 섬과 다른 특징이다.

소시에테제도의 동북쪽에는 마르케사스제도가 있다. 화가 고갱과 샹송가수 '자크 브레르'가 중심이 되는 섬 히바·오아섬의 아초나 마을 묘지에 잠들어 있다.

마르케사스제도는 1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서그룹과 남동그룹으로 나뉘어 있다. 어느쪽이나 화산활동으로 생긴 섬이지만 산호초호수도 연안평야도 없다. 산이 바다에 바로 내려뻗어 있어 주민들은 좁은 계곡에 살고 있다. 작가 '멜빌'도 한때 이 섬에 머물었으며 바위뿐인 험한 해안과 가파르게 치솟아 있는 낭떠러지, 수목이 울창한 협곡 등이 그의 작품 여러곳에 묘사되어 있다.

중심이 되는 섬 히바·오이섬은 가장 땅이 비옥하여 한때는 인구가 2만명을 넘었다. 이섬에는 호텔이 없어 여행자는 민박을 할수밖에 없는데 주민들은 모두 여행자를 좋아한다.

전체적으로 볼때 실로 기후 온화하고 주민이 매력적인 것이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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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동아일보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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