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이 웃고 있을 때 인간은 우는 것으로 보기 쉬우며 그 반대의 경우도 흔하다.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 다른 감각 세계를 살고 있다. 즉 다른 생물들이 보고 듣고 냄새맡고 느끼는 일을 결코 동일하게 따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생물의 감각세계에 대한 오해가 수없이 많다.
가령 풀밭에 화려하게 피어 있는 꽃을 보고 우리는 이렇게 속단한다.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것은 먼 곳에 있는 곤충들의 눈을 끌기 위한 것이라고….그런데 이는 크나큰 오해이다. 곤충들의 눈은 모두 먼 곳을 볼 수 없는 근시안인 것이다.
또 지렁이를 반으로 자르면 동강난 몽뚱이가 발발 떠는 것을 보고 우리는 얼마나 아프면 저렇게 몸서리를 치는가 하고 애처러워 한다. 하지만 지렁이는 아픔은 느끼지 못한다. 발발 떠는 것은 단지 반사작용일 뿐이다.
인간의 눈으로 본 생물의 세계는 이처럼 엉터리였다.
죽은 척해서 위기를 피해
우리는 자신의 환경에서 경험한 바에 의하여 어떤 물체가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모양을 보고 인식한다. 따라서 대상 물체가 움직이든 정지해 있든 그에 대한 인식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기차는 움직여도 기차, 가만이 있어도 기차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동물의 환경세계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동물의 환경세계에 있어서 멈추고 있는 모양과 움직이고 있는 모양은 두개의 전혀 다른 지각의 대상이다.
예로 메뚜기를 잡으려고 하는 갈가마귀를 들어보자. 갈가마귀는 멈추고 있는 메뚜기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다가 메뚜기가 날려고 할 때 잡아 먹으려고 덤벼든다.
많은 경험에 의하면 갈가마귀는 멈추고 있는 메뚜기의 모양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한다. 갈가마귀는 움직이는 모양만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는 많은 곤충의 '죽은 척하는' 습성을 설명해 준다. 대개 곤충은 위급한 순간을 맞으면 죽은 척함으로써 적의 추적권을 확실하게 벗어난다. 움직이지 않고 '숨을 죽이고' 있으면 결코 들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개의 가는 막대 끝에 실로 콩을 매달은 파리채를 만들어 보자. 또 이 콩에 끈끈이를 묻혀 보자. 그리고 파리가 많이 모여 있는 양지바른 창가에서 이 막대라 가볍게 흔들어 콩을 좌우로 움직이면 많은 파리가 콩을 향하여 돌진해와서 일부가 콩에 달라붙을 것이다. 뒤에 조사해 보았더니 달라붙는 놈은 모두 숫파리였다.
이는 암컷을 잡으려다 실패한 숫파리들의 행동을 나타낸 것이다. 즉 움직이고 있는 콩이 날고 있는 암파리의 보습을 교모하게 흉내내고 있기 때문에 유도된 행동이다. 따라서 이 콩을 멈추게 하면 콩을 암컷이라고 생각하는 숫파리는 한 마리도 없게 된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숫파리에게 있어서 멈춰 있는 암파리와 날고 있는 암파리는 전혀 다른 대상으로 비치는 것이다.
꿀벌의 환경세계에서도 좋은 예를 찾을 수 있다. 꿀벌은 열린 모양, 이를테면 별모양이나 +자형으로 보이는 것을 좋아하며 닫힌 모양, 즉 원형이나 정방형인 것을 피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활짝 핀 꽃과 봉우리가 뒤섞인 들판에 꿀벌이 찾아드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꿀벌은 열려 있는 꽃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꽃을 별모양이나 +자형으로 바꾸면 봉오리는 고리처럼 닫혀 있는 모양을 갖게 되어 꿀벌이 찾아오지 않는다.
이런 꿀벌의 성질은 최근 새로 발견된 것인데 적잖은 생물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꿀벌에 있어서는 피어 있는 꽃만이 중요할 뿐 봉오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적 옆에서도 여유만만
오랫동안 굶긴 두꺼비에게 한마리의 지렁이를 주면 탐욕스럽게 먹어치운다. 바로 뒤에 지렁이와 모양이 비슷한 성냥개비를 던져주면 두꺼비는 사정없이 달려든다.
이번에는 그 두꺼비가 지렁이 대신 거미를 먹음으로써 굶주림을 벗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두꺼비는 좋아하는(?) 대상을 바꾼다. 거미와 닮은 이끼라든가 개미에 달라붙는 것이다. 굶주린 두꺼비는 처음에는 먹고 싶은 기분에서 먹이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지렁이나 거미를 먹고 난 다음에는 일정한 모양을 지닌 대상을 먹이로 정하는 모양이다.
국자가리비(조개)의 환경과 그의 움직임을 나타내 보자. 현재 이 조개의 시야안에는 극히 위험한 적인 불가사리가 수백개나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불가사리가 멈추고 있는 한 그것은 조개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불가사리의 독특한 모양도 조개에게 대단한 '경고'가 되지 않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불가사리는 결코 조개의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가사리가 움직이자마자 조개는 불가사리의 운동에 대한 반응을 나타낸다. 후각기관으로 작용하고 있는 촉수를 재빨리 내밀어 불가사리의 '냄새'를 맡는다. 이어 조개는 급히 몸을 일으켜서 헤엄쳐 도망간다.
여러 실험 결과, 움직이고 있는 대상물의 모양이나 색깔따위는 국자가리비를 조금도 놀라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단지 움직임 자체가 문제였다. 즉 어떠한 대상물도 그것이 불가사리와 비슷하게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면 조개에게 '섬뜩함'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국자가리비의 눈은 모양이나 색깔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적의 움직임의 템포와 딱 맞는 일정한 템포에 대해서만 대응하는 것이다.
맛을 향해 움직인다
오랫동안 지렁이가 모양을 구별할 수 있는 것으로 추측되어 왔다. 특히 '종의 기원'으로 유명한 다윈(Darwin)은 지렁이가 보통의 나뭇잎과 솔잎을 식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그 잎의 모양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다룬다는 것을 지적했다. 다윈은 대학자답게 바른 관찰을 하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지렁이가 그 좁은 구멍 속으로 나뭇잎이나 솔잎을 끌어들이고 있는 장면을 주시해 보자. 이들 잎은 지렁이의 훌륭한 보금자리이자 먹이. 지렁이가 이 잎들을 '탐식'하는 장면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마치 지렁이가 이 잎들의 특성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지렁이가 보통나뭇잎의 잎자루부분을 앞으로 해서 구멍으로 끌어 당기려고 하면 구멍이 막혀버릴 것이다. 그러나 잎의 끝을 끌어 당기면 구멍이 막히지 않는다. 그런데 솔잎은 이 경우와 상반된다. 언제나 두 개가 쌍이 되어 떨어지는 솔잎은 끝이 아니라 앞쪽을 붙잡고 끌어 당겨야한다. 이런 이치는 우리가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지만, 지렁이의 IQ로 과연 가능할까? 그러나 지렁이는 신통하게도 이 구별을 해 낸다.
지렁이가 나뭇잎과 솔잎을 정확히 구별하여 다룬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물론 지렁이가 대상물의 모양을 식별할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견해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가정은 틀렸다는 사실이 한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젤라틴 속에 넣었던 막대를 지렁이에게 제공한 실험이었다. 그랬더니 지렁이는 이끝 저끝 가리지않고 무차별하게 막대를 물고 구멍 속으로 끌어 당겼다. 이번에는 그 막대의 한쪽 긑에 벗나무잎의 끝쪽을 갈아서 만든 가루를 바르고, 다른 쪽 끝에는 잎의 밑동의 가루를 발라두었다.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지렁이는 막대의 이 두 끝을 정확하게 구별해냈다. 실제 잎의 끝과 밑동처럼.
요컨대 지렁이는 나뭇잎을 그 모양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다루고는 있으나 실제로 모양을 식별할 능력은 없다. 지렁이는 잎의 맛에 의해서 모양을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갈가마귀의 IQ
색깔또한 동물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투우장의 소는 붉은 색만 보면 돌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대표적인 잘못된 보기이다. 색맹인 소가 붉은 색에 의해 흥분될 리 없다. 사실은 펄럭이는 것에 대해 전투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색깔과 관련된 다른 예를 들어보자.
한마리의 갈가마귀를 입에 물은 고양이에 대하여 공격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갈가마귀가 있다. 하지만 입에 사냥감을 물고 있지 않은 고양이는 결코 갈가마귀로 부터 공격을 받지 않는다. 고양이의 주무기인 송곳니가 그 사이에 있는 사냥감으로 말미암아 무용지물이 된 경우에만 고양이는 갈가마귀의 공격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고도로 계산된 행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행동은 갈가마귀가 혹시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통찰력과는 관계없이 진행된다. 우연히 들어맞은 하나의 반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증거는 간단하게 드러났다. 검정 수영팬티를 손에 들고 지나가기만 하여도 갈가마귀가 공격자세를 취한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또 고양이가 흰 갈가마귀를 물고 지나갈 때에는 공격을 받지 않았다. 눈앞을 지나가는 검은 대상물만이 갈가마귀에게 즉시 공격 자세를 취하게 하는 것이다.
한 검은 닭이 흰색 닭의 알10개와 자기 새끼인 흑색종 알1개를 동시에 품었다. 그 결과 11개의 알에서 10마리의 흰 병아리와 1마리의 검은 병아리가 태어났다. 그런데 이 어미 닭은 피를 나눈 검은 병아리에 대하여 실로 불합리한 태도를 보였다. 검정 병아리가 울면 어미는 서둘러 거기로 달려가기는 했지만 흰 병아리 속에 끼어있는 검정 병아리를 찾아내면 돌봐주기는 커녕 공격자세를 취했다. 같은 대상물이 내는 청각적인 신호를 받고 달려갔지만 보는 순간 마음속에 두개의 대립하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흰 병아리 속에 있는 검정 병아리가 이색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목적이냐? 계획이냐?
인간은 목적을 좇아서 자기를 끌고 나가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므로 동물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거의 모든 동물은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는다. 다만 '자연의 계획'에 의해 행동하고 있다. 또 설령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동물이라 할지라도 한가지 목적을 위하여 여러 가지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 명제를 증명해 보자.
예컨대 어떤 높은 소리는 나방의 행동에 특별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면 병을 두드릴 때 나방은 어떻게 행동할까?
유리병의 마개를 비벼대는 소리가 나방의 청각에 동일하게 와 닿으면 나방의 행동은 언제나 같은 것이 된다.
밝은 색체때문에 눈에 띄기 쉬운 나방은 이 높은 소리를 들으면 곧 도망친다. 반면 보호색으로 위장하고 있는 나방은 같은 소리를 들어도 가까이 있는 검은 물체에 멈추어 있을 따름이다. 같은 지각의 표지(여기서는 높은 소리)가 전혀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이 두가지 행동이 갖는 높은 계획성은 정말로 뚜렷한 것이다. 물론 나방은 자기의 살갗의 색깔을 실제로 본 일이 없으므로 색깔을 식별하고 있다거나, 목적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나방의 청각기관이 오로지 높은 소리를 듣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방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게 자명해진다. 나방은 살기 위해서라기(목적) 보다는 높은 소리에 의한다는 ''자연의 계획성'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다.
목적과 계획과의 사이의 대립은 이미 곤충학자 파브르(Fabre)의 뛰어난 관찰에 의하여 확실히 밝혀졌다. 그는 밤나무에 붙는 큰 공작나방의 암컷을 한 장의 흰 종이 위에 놓아두었다. 이때 암컷은 그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얼마동안 배를 움직였다. 잠시후 파브르는 암컷을 종이 옆에 있는 유리병 속에 넣어두었다. 그랬더니 밤 사이에 이 나방이 수컷이 떼를 지어서 창문으로 날아 들어왔다. 그들은 흰 종이 위에서 웅성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수많은 수컷 중에서 유리병 속에 들어 있는 암컷에 관심을 갖는 놈은 한 마리도 없었다. 단순히 생식이 목적이었다면 수컷들은 당연히 유리병 속의 암컷에 끌려 갔을 것이다.
어미닭과 병아리의 관계에서도 '자연의 계획'을 엿볼수 있다. 위기에 처한 병아리를 도우려고 황급히 덤벼드는 닭을 보면 그 행동에 분명히 '목적'이 개입돼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한 실험에서 그 행동의 '목적성'을 부인하고 있다.
병아리의 다리를 막대에 묶어 놓으면 병아리는 큰 소리로 삐약삐약 울어댄다. 그 비명을 들은 어미 닭은 설령 병아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깃털을 곤두세우고 소리 나는 쪽으로 달려간다. 병아리의 모습을 보자마자 어미는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드는 자세를 취한다.
이번에는 병아리의 다리를 막대에 묶은후 유리병으로 덮고 어미의 눈앞에 놓아보자. 이 때는 병아리의 모양은 보이나 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괴로워하는 병아리를 눈앞에 두고도 어미 닭은 아주 태연해진다.
따라서 어미 닭의 행동은 병아리를 구하려는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병아리의 비명에 의하여 행동을 일으킨 것으로 생각된다.
콩바구미의 '유비무환'
이미 파브르(Fabre)에 의하여 연구된 콩바구미의 유충의 '유비무환'을 알아보자.
이 유충은 완두콩이 아직 익지 않아서 연한 동안에 때를 놓치지 않고 콩 밖으로 나가는 갱도(길)를 파놓는다. 탈바꿈하여 어미가 되었을 무렵에는 완두콩이 딱딱하게 굳어져 '땅굴작업'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미리 '굴'을 파 놓는 것이다.
그러나 새끼벌레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무의미한 행동일뿐이다. 장차 어미벌레가 된 후 받을지도 모를 '위협'을 새끼 때 미리 알 리 없기 때문이다.
또 거우벌레의 암컷은 자작나무 잎의 일정한 곳(거우벌레는 아마도 이 장소를 맛 감각에 의하여 알았을 것이다)에서 출벌, 활과 같은 모양의 줄을 따라서 잎을 잘라낸다. 거우벌레는 이 줄을 따라서 잎을 깔때기 모양으로 갉고 그 속에 알을 낳는다.
이 벌레는 전에 이 길을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으며 자작나무의 잎에도 길을 암시할만한 표적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거우벌레의 눈앞에는 신비스러울 정도로 뚜렷하게 이 길이 펼쳐 있는 것이다.
대륙간 새의 비밀
이와 비슷한 사실은 철새의 관찰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철새중에는 굉장히 먼 거리를 여행하는 새가 있다. 이러한 '대륙간'새에는 오직 그들의 눈에만 보이는 길, 즉 나면서부터 아는 길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예를 들면 검정명매기(Apus apus)는 봄에 유럽에서 새끼를 치지만 여름 동안에는 아프리카로 날아간다. 그리고 이듬 해 봄이 되면 다시 유럽으로 돌아오는 IC(Inter Continental) 새인 것이다.
검정명매기는 이주를 시작하기에 앞서 일정한 기간 동안 이주준비를 한다. 이사준비란 예를 들면 급속도로 몸안에 지방을 축적하고 해질 무렵이 되면 활동을 줄이는 것이다. 또 집단으로 모이는 경향을 나타내고 차츰 밤에 행동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준비를 마친 뒤 그들은 택일을 한다. 어느 날 출발하는 게 좋을지 결정하는 것이다. 이주 출발을 결정하는 요인으로는 외부요인과 내부요인을 들 수 있다. 외부요인으로는 온도와 기상상태가 중요하다. 아울러 그 새가 매일 받는 일조시간의 길이도 고려된다. 내부요인으로는 새의 영양상태를 꼽을 수 있다.
새가 방향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낮이냐 밤이냐는 중요한 변수이다. 독일의 크라머(Kramer)는 찌르레기를 재료로 실험, 매우 그럴듯한 가설을 세웠다. 그 새는 태양을 지표로 이용,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새가 밤에 이동할 때 하늘이 극도로 흐려 있으면 새들의 이동은 완전히 교란된다. 몇몇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별의 역할을 주시하고 있다. 새들은 야간 이동에서 별의 도움으로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이디.
그러면 이주한 새들이 월동 또는 생식을 위한 장소에 도달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낼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특히 선천적인 능력이라는 학설이 자주 등장한다. 새들은 나면서부터 이주장소 또는 도달해야 할 거리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그위너는 다른 견해를 보인다. 그의 학설에 따르면 새의 속에 간직한 시간측정 프로그램으로 목적지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비행시간을 미리 정한다는 것이다. 또 그는 휘파람새(열대 아프리카에서 월동)가 일정한 기간동안 건너가야 할 거리를 이들이 나타내는 이주흥분의 강도와 비교했다. 그 결과 흥분의 지속시간이 유럽과 월동장소 사이의 거리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동물들에게도 고향은 있다
집과 고향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가시고기의 실험을 예로 드는 것이 가장 알맞을 것이다. 가시고기의 숫컷이 둥지를 만들 때 그 입구는 대개 색깔이 있는 식물섬유를 쓴다. 이는 새끼에 대한 시각적인 길잡이인지 모른다. 새끼는 둥지속에서 어미의 보호를 받아가며 자란다. 이 둥지가 바로 가시고기의 집(Heim)이다. 그러나 그의 고향(Heimat)은 둥지보다 훨씬 넓다.
마주 보는 두 개의 모퉁이에 가시고기는 집, 즉 둥지를 만든다. 여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한줄의 경계선이 있는데 이를 경계로 각각의 둥지가 속하는 영역이 바로 가시고기의 고향이다.
그러나 고향을 가지지 않은 동물도 있다. 예컨대 집파리는 형광등의 주위를 몇번이고 빙빙 날아다니며 일정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지만 고향을 가진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에 반해 거미줄을 치고 그 안에서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는 거미는 하나의 집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그 집은 거미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두더지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러면 두더지의 집과 고향은 어떤가?
하나의 규칙적인 터널조직이 거미의 집과 같이 땅속에 퍼져 있다. 이 개개의 통로가 두더지가 지배하는 영역이다. 아울러 이 갱도의 의하여 포괄되어 있는 전지역이 두더지의 영토인 것이다.
두더지를 잡아두면 거미의 그물과 비슷한 모양으로 갱도를 만든다. 두더지는 고도로 발달한 후각 덕택으로 갱도 안에서 아주 손쉽게 먹이를 찾아낸다. 단단한 흙속에서도 대강 5~6cm의 거리 이내면 먹이가 되는 대상물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붙잡힌 상태에서 두더지는 비교적 촘촘한 갱도를 만든다. 하지만 자연속의 두더지는 갱도 간격을 넓힌다. 듬성듬성하게 갱도를 설치하는 것이다. 이때 갱도 주위의 일정한 반지름이 두더지의 후각으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범위가 된다.
두더지도 거미와 같은 방법으로 먹이를 잡는다. 그물과 같이 사방으로 뻗쳐있는 갱도속을 몇번이고 걸어다니면서 그 속에 잘못 들어온 모든 것을 잡아 먹는다. 또 두더지는 이 갱도조직의 중앙에 마른 나뭇잎을 깔아놓은 큰 불을 만든다. 이것이 그의 '본점'이며 여기서 휴식시간을 갖는다. 지점망인 땅속의 통로는 두더지가 모두 잘아는 길이므로 같은 속도와 재주로 왔다갔다 할 수 있다. 이 통로가 닿는 범위가 바로 두더지의 사냥터이며, 또한 고향이다. 이 고향을 탐내는 근처에 있는 모든 두더지에 대하여 생사를 걸고 대항하여 지켜나간다. 눈 먼 두더지가 땅속에서 정확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다. 먹이를 일정한 장소에서 제공하는 방법으로 훈련된 두더지는 설령 거기로 통하는 길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려도 그곳을 다시 찾아낼 수 있다. 이 경우 두더지가 순전히 냄새에 의존하여 그 통로를 찾았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두더지는 한번 지나간 길의 방향을 알아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 능력의 도움으로 파괴된 길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통로조직의 전체 또는 그 일부가 파괴되었을 경우, 두더지는 그가 기억하고 있던 공간도형을 다시 생각해 냄으로써 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조직을 만들어 낸다.
냉큼 물러가라
꿀벌도 집을 만드는 동물이다. 물론 그들의 집주위의 지역은 훌륭한 사냥터이다. 그러나 생사를 놓고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고향은 아니다.
하지만 까치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은 일정한 영역 내에 집을 만들고 그 영역내에 다른 까치의 침입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아마도 대단히 많은 수의 동물이 까치의 예를 따를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사냥터를 다른 무리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고, 그곳을 고향으로 삼는다는 얘기다.
어떤 임의의 한 구역을 선정, 거기서 살고 있는 동물의 고향의 영역을 기록하여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나타난다. 동물의 종마다 정치지도(政治地圖)와 비슷한 것이 하나씩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선은 공격과 방어의 균형에 의하여 정하여진다. 또 임자가 없는 빈 터는 존재하지 않으며, 고향과 고향이 도처에서 경계선을 이룬다.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맹금류(독수리 등)의 집과 그 사냥터(고향)와의 사이에 중립지대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 지대에서 그들은 절대로 사냥을 하지 않는다.
조류학자들은 맹금류가 자기의 손으로 새끼들을 죽이는 일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같은 중립지대는 자연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실제로 새끼가 둥지를 떠나서 어미둥지 근처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게 되면 자기 어미에게 죽게 되는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새끼들은 얼마동안 보호구역에 해당하는 중립지대 안에서 지내는 것이다.
이 보호구역은 수많은 새들이 안심하고 지저귈 수 있는 장소로 약한 새들은 이곳에서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기른다. 이곳은 맹금류가 출몰하지 않으므로 자기들의 새끼를 안전하게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개가 다른 개들에게 자기의 고향을 알리는 방법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개들은 오줌의 냄새로 내 땅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로 함부르크 동물원의 지도를 보자. 지도에는 날마다 주인을 따라 나온 두마리의 수캐가 산책 도중 소변을 누는 곳이 표시돼 있다.
개들이 오줌을 싸서 냄새를 남긴 곳은 인간의 눈에도 잘 띄는 곳이었다. 또 두마리가 함께 산책을 나오면 언제나 소변경쟁이 벌어졌다.
활발한 개는 다른 개를 만나자마자 가까이에 있는 눈에 띄는 대상물에 소변을 누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고향임을 알리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다. 또 다른 개의 고향에 침입하여서도 자신만만하게 행동한다. 가령 대상물에 이미 터줏 개의 냄새 표지(오줌)가 붙어있으면 그는 그 터줏 개의 표지를 차례차례로 찾아내어 없앤다. 자기의 소변을 누어서 표지를 지우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에 반해 원기가 없는 개는 다른 개의 영역내에서 극도로 몸조심을 한다. 냄새의 표지 옆을 지나칠 때는 살금살금 걷고 자기가 거기에 왔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게 행동한다. 냄새의 표지를 남기는 일은 극력 피하는 것이다.
북아메리카의 큰 곰(아메리카 검정곰)은 자신의 고향에 표지를 붙인다. 이 곰은 될 수 있는 대로 등을 펴고 일어서서 그 등과 코 끝으로 멀리서도 보이는 홀로 서있는 침엽수의 나무껍질을 벗겨낸다. 이것은 다른 곰에게 주는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다.
"이 나무를 보면 알겠지만 여기는 이만큼 덩치가 큰 내가 고향으로 삼고 방어하고 있는 영역이다. 괜히 다치고 싶지 않거든 냉큼 이 구역에서 물러가라."
'자연의 계획'은 과연 존재하나?
누구나 '자연의 계획'이라는 말을 즐겨쓴다. 그만큼 생물의 행동을 설명하는 중요한 무기가 된 것이다. 예로 거미의 그물치기나 새의 둥우리짓기 등도 이 '자연의 계획'에 의해 이뤄진다고 믿어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의 계획'은 곧잘 부정되기도 한다. 실제로 본능이라는 용어도 개체를 초월한 '자연의 계획'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등장했다. 이처럼 쉽사리 부정되는 까닭은 '계획' 그 자체가 물질도 힘도 아니므로 실체가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눈에 보이는 실례를 바탕으로 추적해 간다면 이 계획에 대한 상(像)을 얻는 것도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다.
거미는 자연의 '피카소'
새 옷을 맞추고 싶을 때 우리는 대개 양복점에 간다. 재단사는 자를 가지고 몸의 주요부분의 치수를 잰다. 그것이 끝나면 잰 길이를 지형에 옮긴다. 그 다음 그려 놓은대로 천을 자른다. 이어 잘라낸 천을 꿰맨다. 그 뒤 가봉을 하고 나면 제법 몸에 맞는 옷이 완성된다. 그런데 만일 재단사가 몸을 측정하지 않고 가봉도 하지 않고 딱 맞는 옷을 만들었다면 누구나 크게 놀랄 것이다. 하지만 거미는 이 일을 손쉽게 해낸다.
거미의 경우에는 치수측정이나 가봉 등 전제조건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미는 자신의 집속에 파리의 모형을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다.
거미는 파리와는 전혀 다른 모양을 가진 자신의 몸을 표준으로 재단할 수 없다. 그럼에도 거미는 파리 몸의 치수에 맞추어서 그물의 크기를 정한다. 또 거미는 자기가 짜낸 실이 파리의 힘을 견딜 수 있게 한다. 이를 위해 거미는 방사상(放射狀)의 실을 환상(環狀)의 실보다 단단하게 맨다.
그물에 부딪친 파리는 순응성이 있는 고리모양(環狀)의 실에 둘러싸이게 된다. 이어 끈적끈적한 물방울에 의하여 어김없이 잡혀버리고 만다. 그러나 방사상의 실에는 접착성이 없다. 잡힌 사냥감 쪽으로 거미가 달려가는데 힘을 덜 들이게 하고 최단 코스를 제시하기 위함이다. 거미가 목표지점에 도착하면 사냥감은 이미 실로 감겨져서 저항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거미의 집은 파리의 통로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짓는 경우가 많다. 더욱 놀랄만한 사실은 그물의 실이 아주 가늘게 짜여져 있어서 조잡한 구조를 가진 파리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파리는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있다가 죽음의 '늪'으로 빠지는 셈이다. 확실히 거미집은 거미라는 '화가'가 파리를 모델로 해서 그러내는 아주 정교한 그림이다.
과연 거미는 자연의 '피카소'일까? 조그마한 생명체인 거미가 그런 능력을 가질 리가 없다. 더구나 거미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한번도 모델(파리)과 만난 일이 없다. 따라서 거미집은 결코 파리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다만 구체적으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파리의 원형의 한 단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뛰는 자 위에 나는 자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완두콩을 파 먹고 사는 바구미의 생애는 매우 흥미로운 데가 있다. 바구미의 암컷은 알을 어린 완두콩의 깍지에 낳는다. 알에서 깨어난 유충은 껍질을 부수고 아직 연한 완두콩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그후 완두콩의 중심에 자리잡은 유충이 가장 빨리 자란다. 함께 들어간 다른 유충은 얼마 안가서 생존경쟁을 단념하고 죽어버린다.
남은 단 한마리의 새끼는 먼저 완두콩의 중심에 구멍을 뚫고 콩의 표면으로 통하는 길을 판다. 그리고 출구, 즉 콩의 껍질을 둥글게 잘라서 문을 만든다. 그 다음에 다시 먹이가 있는 제 구멍으로 돌아와서 정해진 크기로 자란다. 완두콩이 굳어질 때까지 여기서 생장을 계속하는 것이다. 완두콩이 굳어지는 현상은 유충이 자라서 성충이 되었을때 큰 문제로 떠오를 수 있다. 굳어진 완두콩은 유충에게는 보호벽이 될지도 모르나 성충에게는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관(棺)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경험은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이다. 조상은 유충에게 어떤 것도 알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통로와 문의 설비가 성장하는 유충의 '계획'속에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완두의 원형의 의미를 바구미의 원형으로 옮기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바구미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통로와 문의 정비가 때로는 그의 죽음을 가져오기도 한다. 조그만 나나니벌이 있기 때문이다. 나나니벌은 가는 침(針)을 활용, 완두콩 속에 자신의 알을 낳는다. 이때 바구미유충이 뚫어놓은 문과 통로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 후 알에서 나나니의 유충이 부화, 살찐 숙주(바구미유충)을 먹어치우고 나나니로 자란다. 그 뒤 자기의 사냥감이 열심히 만들 길을 통하여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낙산'향기'에 끌려서
시골에서 가끔 개를 데리고 숲이나 덤불속을 헤치며 걸어다닌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작은 생명체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생명체는 풀숲의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가 사냥감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린다. 사냥감을 발견하면 그 위에 떨어져서 피를 배불리 빨아 먹는다. 이 벌레는 본래 1~2mm쯤의 크기이지만 피를 빨아 먹으면 완두콩만한 크기로 부풀어 오른다.
이 생명체,즉 진드기는 포유류나 인간에게 크게 위험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진드기의 생활사는 최근의 연구에 의해 비교적 상세히 밝혀졌으므로 이제 그 모습을 거의 완전하게 볼 수 있다.
진드기의 생애는 알에서 아직 몸의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은 새끼벌레가 기어나오면서 시작된다. 새끼벌레는 다리 한쌍뿐으로 생식기가 없는 상태이다. 그렇지만 새끼벌레는 벌써 풀줄기의 긑에 매달려서 도마뱀과 같은 냉혈동물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것을 덮칠 수 있다. 몇 차례의 허물을 벗고 나면 없었던 기관이 생기고 성숙해져 온혈동물도 노리게 된다.
암컷은 교미가 끝나면 여덟 개의 다리를 사용, 떨기나무 가지 끝으로 기어 올라간다. 그리고 알맞은 높이에서 사냥감을 기다린다. 대개는 나무 밑을 달려가는 비교적 작은 짐승의 몸위에 떨어지는데 꽤 큰 동물일 경우에는 동물의 몸이 나뭇가지를 스칠 때 그 몸에 찰싹 달라붙는다.
그런데 눈이 없는 진드기가 어떻게 상황을 판단할 수 있을까? 잠복할 나무로 올라가는 길목을 찾는데는 온 살갗에 퍼져 있는 빛감각점을 활용한다. 사냥감을 찾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즉 모든 짐승의 살갗샘에서 흘러나오는 낙산(lactic acid)의 냄새가 진드기에게 '초소에서 밑으로 떨어지라'는 신호로 작용하는 것이다. 진드기는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감각에 의하여 사냥감이 온혈동물인지 냉혈동물인지 식별한다. 성장한 진드기는 따뜻한 물체 위에 떨어진다. 따뜻한 피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냥감에 낙한한 뒤에는 촉각의 도움을 빌어 되도록 털이 적은 곳을 찾는다. 이어 먹이의 살갗 속에 머리를 쳐박고 따뜻한 피를 몸 속으로 빨아들인다. 그러면 진드기는 '미식가'일까?
피 이외의 액체를 쓴 실험에 의해 진드기는 전혀 미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 액체가 적당한 온도라면 진드기는 어떤 액체도 가리자 않고 빨아들였던 것이다.
배불리 빨아들인 피는 진드기에 있어서 마지막 식사가 된다. 그 뒤에 남아 있는 일은 땅위에 떨어져서 알을 낳고 죽는 일뿐이기 때문이다.
생리학 대(対) 생물학
진드기의 생활과정은 생물체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생리학적 연구보다 생물학적 관찰방법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생리학자들은 모든 생물은 각기 독자적인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 세계의 중심은 생물 자체라고 주장한다. 반면 생물학자들은 다른 견해를 펴보이고 있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진드기는 기계냐? 기관사냐? 아니면 단순한 객체(客体)냐? 그렇지 않으면 주체(主体)냐?"하는 문제이다.
생리학자는 진드기를 기계라고 보고 있다. 진드기는 수용기(受容器), 곧 감각기관과 실행기, 곧 운동기관으로 구별할 수 있으며, 이것이 중추신경 속에 있는 조절기관에 의해 서로 결합돼있다고 설명한다.
반면 생물학자는 "진드기의 몸 어느 하나를 들추어 보아도 기계의 성격을 띠고 있는 곳은 없다. 모든 것은 기관사의 구실을 하고 있다"라고 한다.
생리학자는 생물학자의 논리에 말려들지 않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바로 진드기의 경우야말로 모든 행동이 오로지 반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반사궁(反射弓)이야말로 모든 동물기계의 바탕을 이룬다. 반사궁은 하나의 수용기, 곧 낙산(酪酸)이라든가 온도라든가 하는 일정한 외적 영향만을 받아들이고, 다른 것은 모두 차단하는 기관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보행기관 천공(穿孔)기관 등 실행기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끝난다.
이에 대해 생물학자는 "사실은 바로 정반대이다"라고 반론할 것이다.
"생물은 어디까지나 기관사와 관련시켜야 할 것이며, 기계의 일부로 보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반사궁의 하나 하나의 세포는 모두 운동의 전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극의 전달에 의해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극은 주체에 의하여 지각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생물학자와 생리학자간의 '기계와 기관사'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순간의 길이는?
진드기가 자신의 종족을 보존하려면 우선 그 수가 많아야 한다. 동시에 오랫동안 먹이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진드기는 이 방면에서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호스토크의 동물학연구소에는 18년간 단식하고 있는 진드기가 아직도 살아있는 상태로 보존되어 있을 정도다.
진드기는 18년간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간은 다수의 순간(즉 최단의 구간)으로 구성된다. 이를테면 세계가 아무런 변화도 나타내지 않는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순간이 지나는 동안 세계는 멈추어 있다. 인간의 일순간은 18분의 1초. 동물마다 그 순간의 길이가 각각 다르다. 도대체 진드기의 일 순간은 어느 만큼의 길이 일까? 아마도 꽤 긴 시간일 것으로 추측된다. 조금도 변화가 없는 환경세계를 18년간 참고 견디는 능력은 모든 가능성을 뛰어넘는 것이다. 진드기는 그 대기기간 중 인간의 수면과 같은 상태에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특히 인간과 다른 점은 진드기는 몇년이라는 장시간에 걸쳐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낙산의 신호를 받아서 새로운 작용을 하도록 자극을 받았을 때 다시 진드기의 시간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즉 시간은 그 내용이 다양하게 변화하지만 우리의 눈에는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방금 주체가 그 환경세계의 시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시간이 없으면 생명을 가진 어떠한 주체도 존재할 수 없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믿음을 수정해야 한다. 살아 있는 주체가 없으면 어떠한 시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