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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지층에서 잔출된 화석의 대부분이 일본인명을 따 명명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하영(李河營·52)교수는 1936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지질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독 본대학 지질·고생물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북대 조교수를 거쳐 현재 지질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한국고생물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40여편의 논문과 3권의 저서가 있는데 특히 87뇬에 출간된 '한국의 고생물'은 지난 1백여년간 우리나라에서 발견, 보고돼온 화석과 고생물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토개발과 지질학의 선택

고생물학은 물리학이나 생물학과 같이 아직 우리에게 일반화돼 있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이학문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생물학은 삼엽층이나 공룡과 같이 오래전 선사시대(先史時代)에 살았다가 전멸해버린 생물들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이다. 이 선사시대에 살았던 생물을 고생물(古生物)이라고 하는데 이들 고생물의 유해(遺骸)나 흔적이 지층속에 묻혀 보존되는 것을 화석(化石)이라고 한다.

고생물학은 이 화석연구를 통하여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린 고생물의 실상을 파악하고 이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함은 물론 현생 생물에 이르기까지의 계통발생과 진화과정을 다루며 지층의 시대와 과거의 지구환경 등을 해명 하는 등 그 연구내용이 생물학 및 지질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이 두 학문 사이의 가교역할을 맡고 있다.

따라서 고생물학은 지질학과의 생물학과의 교과과목으로 개설되어 있고 특히 지질학과에서는 기초필수과목으로 이수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고생물학을 전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질학과 생물학의 지식이 필요하며 이 바탕위에 점차 고생물학 전문 분야로 좁혀 들어가면서 깊이있는 연구를 행하게 된다.

나도 처음부터 고생물학을 대학과정에서 바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지질학과를 택하여 공부하면서 대학원과정에서 비로소 고생물학분야로 그 전공을 좁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먼저 지질학을 택하게 된 동기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일 듯 싶다.

내가 지질학이란 학문이 있다는 것을 처음 듣게 된 것은 국민학교 6학년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지질학은 다른 자연과학에 비하면 비교적 생소한 분야로 알려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해방직후인 40여년 전에야 더 말할나위가 없었으며 다만 과학분야에 종사하는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만 알려졌을 때였다.

이런 시기에 지질학을 얻게 듣게 된 것은 가까운 친척중에 지질학을 전공하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의 사촌 매형되는 분으로 해방 직전 수원고농에 다니시다가 해방후 서울대학교에 지질학과가 창설되면서 이 학과로 편입한 학생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는 그 매형이 퍽 존경스러웠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 매형과는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 자주 접촉할 기회는 없었으나 자주 배낭을 걸머지고 며칠씩 야외에 조사를 나가고, 야외에서 돌아올 때는 배낭 가득히 암석 표본들을 가져와서는 이들을 분석하고 현미경으로도 관찰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렇게 실내 분석이 끝나면 이것을 토대로 지질도라는 도면을 만들게 되는데 이 도면이 완성되면 이를 통해 지하의 내부를 알아낼 수 있다는 내용을 어렴풋이 듣게 되었다. 퍽 흥미롭고 신비스러운 학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지질학을 앞으로 나의 전공으로 선택하겠다는 생각은 전해 해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5, 6년이 지난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게 된 무렵이었다. 얼마후에 있을 대학진학을 앞에 놓고 여러가지로 진로 문제를 생각하고 있을 때 어느 책자를 통해 덴마크의 '그룬트비'목사에 대한 내용을 읽게 되었다. 19세기 중엽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덴마크는 전쟁의 페허가 극심한 상태에서 승전국 독일이 요구하는 상당한 액수의 전쟁보상비까지 지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나라가 극도로 피페되어 있을 때 '그룬트비'목사는 '하느님 사랑 민족사랑 국토사랑'의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고 일대 국민운동을 전개하면서 메말랐던 국토를 개발, 덴마크를 재건하였다는 것이 그 책의 내용이었다.

이것이 나에게는 큰 감명을 주었다. 물론 어느 학문이든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 분야는 없겟지만 그때 나의 마음에 새삼 떠오른 것이 5, 6년 전에 사촌매형으로부터 얻어들은 지질학이었다. 나와 같은 나이의 연배는 중학교 상급반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거치는동안 6. 25동란의 전화속에서 지냈기 때문에 어느 세대보다 큰 어려움 속에서 이 시절을 보내야 했다.

처참한 페허속에서 극도의 경제적 어려움을 체험한 나에게는 5, 6년전 그 매형으로부터 얻어들은 지질학을 배워 우리나라의 지하자원을 찾아내고 국토를 개발하면 경제적으로 우리 조국을 부흥시키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들었다.

●―야외지질조사와 화석연구

당시는 서울대학에서만 지질학과가 설치되어 있었다. 입학원서를 제출하고 시험장에 나가니 지질학과 지망생이 약 1백20여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합격후에 알고보니 1차 지망에서는 5명만이 합격되고 나머지 15명은 모두 의과대학 지망생중 제2지망으로 지원한 학생들이었다. 그때 같이 입학한 20명의 동급생은 지금 대부분이 박사학위와 기술사 자격을 얻어 전공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1955년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의 수업과정은 순조로왔으나 해방후의 사회적 혼란과 6. 25동란때 입은 전화로 인하여 현미경 등 실험시설이 극히 불충분하였으며 문헌도 부족하여 어려움이 많았다.

2학년때는 정규필수과목으로 야외지질 조사실습과목이 있었다. 이 과목은 야외에 직접 나가서 여러 지질현상을 직접 관찰하는 실습과목이었는데 우리는 이 실습을 위하여 강원도 삼척지역(지금의 태백시)으로 가게 되었다. 그 지역은 우리나라 고생대 퇴적지층이 잘 발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무연탄 탄전지대로 여러 종류의 퇴적암과 퇴적구조를 식별하는데 아주좋은 실습장소이다. 더욱이 삼엽층 등 동물화석과 고사리류 등 고생대 식물화석이 비교적 풍부하게 산출되고 있어 누구에나 흥미를 일으키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지도교수 정창희교수님과 김봉균교수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교과서에 배운 여러 지질현상들을 하나 하나 확인하게 될 때 지질학에 대한 흥미가 새로워졌고 더욱이 삼엽층화석이나 고사리종류의 화석을 직접 지층에서 채집하고 보니 신기한 느낌이 더하였다.

이미 학교강의시간을 통하여 고생물학 담당 교수님으로부터 고생물학이 지층의 시대를 규명하고 과거의 퇴적환경 등을 규명해주는 등 지구역사를 해명해주는 지질학의 기초과목이라는 사실 알게 되었던 때문도 있지만 기독교인의 한사람으로 가끔 신앙과 과학 사이의 갈등문제로 여겨왔던 생명의 창조와 진화문제에 대한 옳은 해답을 이 화석연구를 통해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화석에 대한 관심이 더 새로워졌다.

지질과학에서는 4학년이 되면 졸업논문을 작성하게 된다. 졸업논문이란 각 학생이 교수가 선정해주는 어떤 지역을 배당받아 그 지역에 대한 지질조사를 실시하여 지질도를 만들고 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이 졸업논문은 지질학의 각 전공분야별로 나누어져 전문 교수들의 지도를 받아 작성하게 되는데 그 당시에는 암석학분야와 층서고생물학분야, 광상학분야로 구분되어 작성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화석에 대한 흥미에 끌려 층서고생물학분야에 속하여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부근의 고생대지층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으며 이때에 여러 종류의 고생대식물화석을 채집하여 문헌을 통해 실제 분류하는 작업을 시도해보았다.

1959년 봄에 대학을 졸업했다. 바로 대학원 진학을 원했으나 가정형편상 진학을 포기하고 현 동력자원연구소의 전신인 상공부중앙지질광물연구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당시 중앙지질광물연구소에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김옥준박사께서 소장으로 임명돼 연구소의 재건작업이 활발하게 시작되던 때였다.

비록 촉탁이라는 비정규직원으로 봉급과 대우는 빈약하였지만 대학교의 연장과 같은 분위기에서 비로소 지질학, 특히 고생물학에 대한 실제적인 눈이 트이기 시작했다. 전공분야에 대한 문헌을 더 접하게 되었고 현미경 등 연구기기도 자주 다루게 되었으며 야외지질조사도 선배들의 지도를 받으며 점차 심화되어 갔다.

●―태백산지구를 집중적으로 조사

1961년 가을에는 정부의 재정적 지원하에 대한지질학회내에 태백산지구 지하자원조사단이 조직되어 그 조사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 조사단에는 당시 지질학회 회원 대부분이 참가하여 강원도 태백산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지질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때 약 3개월동안 태백산지역을 누비며 지질조사를 행하던 일은 일생에 잊혀지지 않을 추억으로 남아 있다. 태백산의 험준한 준령들을 매일 아침 이슬이 맺혀 있는 산길을 오를라치면 옷이 절반정도 젖게 되지만 1천m는 넘는 고지를 오를 때는 늦가을 날씨에도 땀방울이 비오듯이 흘렀다.

이렇게 조사를 하다가 저녁 늦게 숙소로 돌아와 몸을 씻고 식사를 마치면 8시나 9시경이 된다. 이때 한자리에 모여 그날의 조사된 자료를 검토하고 토의하는 것이 매일처럼 행해지는 조사 일과였다. 조사반원중에 가장 어렸던 나로서는 주로 선배들의 내용을 듣고 배우는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때로 나의 해석이 채택될 때도 있었으며 그럴 때마다 마음에 새로운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또 야외에서 조사를 하면서 예측했던 구조들이 그대로 확인될때는 지질학도로서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태백산 지하자원조사단은 그 다음해인 1962년 4워 17매의 지질도를 작성하여 발간하였으며 이 도면들은 오늘날까지도 유익하게 이용되고 있다.

나는 이 조사가 완료되면서 바라던 대학원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는 동안 경북대학교에 전임강사로 발령도 받게 되었다. 대학원에서의 전공은 층서고생물학이었으며 지도교수는 정창희교수였다. 대학원 석사논문은 경상북도 봉화지역에 분포하고 요곡층이라는 지층의 시대문제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 지층에서 산출되는 식물화석과 연체동물화석을 근거로 이 지층의 시대를 밝히는데 주력하였다.
대학과정을 진행하면서, 점차 지질학 내지 고생물학분야의 내용을 좀더 깊이있게 다루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과거 조사자료들을 더 빈번히 접하게 되었다. 특히 석사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과거 우리나라 지질에 관한 논문들을 찾아 읽고 검토하게 되면서 이 논문들의 대부분 일본인에 의하여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국토으 과학적 자료가 우리 손에 의하여 연구되지 못하고 남의 나라 사람들에 의하여 발표되었다는 사실이 퍽 아쉬었고 부끄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1910년 일본인들을 한국을 합방한 후 1918년에 조선총독부 산하에 지질조사소를 설치하였으며 이곳에 일본인 지질학자들을 파견하고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우리나라 자원수탈을 목적으로 지질조사에 총력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이전으 우리나라 지질에 관한 연구논문의 거의 대다수가 일본인에 의하여 발표되었고 우리나라 지층에서 산출된 화석이름의 대부분이 일본인 명명자의 이름과 함께 붙어다니게 된 것은 오늘날도 안타까울 뿐이다.

●―코노돈트 미화석 연구에 몰두

대학원에 석사과정을 마친 후 뜻밖에 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당시 미고생물학분야중 새로운 연구분야로 세계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던 코노돈트라고 불리는 미화석연구분야가 있었는데, 이 분야의 세계적 대가인 서독 본대학 교수 '뮐러'박사가 한국을 방문했었다.

그는 국내에 코노돈트 화석이 산출되는 고생대지층이 발달되어 있음을 알고 국내지질학계의 원로인 김옥준박사와 이대성교수를 만나 고생물학을 전공하는 젊은 신진을 추천하면 본대학에서의 연구를 허락해주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이에 두분 교수께서는 나를 추천, 뜻밖에 본대학에서 연구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1967년 독일 흠볼트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뮐러교수의 지도하에 모든 연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2년여의 연구끝에 우리나라 고생대층에서 산출된 코노돈트 미화석에 대한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으며 이를 독일 전문학술지에 게재하게 되었다. 이때 신속(新屬)으로 명명한 코노돈트 화석이 그후 중국 말레이이지아 등에서도 발견되어 신속으로 공인을 받게 된 것은 하나의 수확이었다.

박사학위는 그후 1973년초에 본대학에 다시 들어가 1년반 동안의 학위과정을 거친 후 받았지만 실제 코노돈트 미화석에 관한 연구는 이때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난 20년 가까이 코노돈트 미화석 연구를 통해서 얻어진 보람된 일은 우리나라의 지층속에 보존되어 귀중한 과학적 자료인 화석을 하나씩 밝혀서 이를 학계에 보고할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1975년도에는 뮐러교수의 알선으로 일본 쿄토대학의 '노가미' 박사로부터 왜정시 북한지역에서 채집해간 시료들에서 산출된 코노돈트 미화석을 기증받을 수 있었으며 이에 대한 연구결과를 독일 학술지에 발표하였다. 만일 이때에도 국내에 코노돈트 전공자가 없었다면 그것마저 일본인에 의하여 발표되었을 것을 다행히 우리손에 의해 발표할 수 있었다는 점에 퍽 기뻤다. 또 그 시료를 쾌히 기증해준 노가미박사에게도 고밉게 생각하고 있다. 그 분과는 그후 계속 친밀한 학술적 교류를 계속하고 있다.

지난 1979년에는 강원도 정선지역의 하부 고생대층 연구를 진행하다가 이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다수의 코노돈트 화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의 고생대층에서는 지금까지 어떤 종류의 화석도 보고된 바 없었는데 이 코노돈트가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처음 발견된 화석군들에 의하여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했던 시루리아 지층이 새롭게 확인될 수 있었고 이를 1982년도 스웨덴에서 개최된 국제 코노돈트 심포지움에서 발표하여 인정을 받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었다.

금년 8월에는 연세대학교팀이 강원도 영월―태백시 지역에는 분포하는 하부 고생대층에 대한 3년여의 집중적인 연구끝에 코노돈트 화석군에 의한 생층서대(生層序帶)를 완성하여 이 결과를 독일에서 개최된 바 있는 국제 코노돈트 심포지움에서 발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조그만한 결과들이 결코 자랑일 수는 없다. 앞으로 힘이 미치는 데까지 우리나라의 고생대 지층에서 산출되는 화석연구를 계속할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다행히 그동안 국내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많은 젊은 신진학자들이 각각 전문분야에 따라 활발한 연구업적을 올리고 있어 마음 든든하며 계속 젊은 신진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우리나라의 귀중한 과학적 자료들을 연구하여 세계학계에 보고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앞에서도 짧게 언급하였지만 고생물학은지질학의 큰 과제로 삼고 있는 지구의 변천과정을 밝혀주는데 가장 긴요한 기초학문인 동시에 생물의 계통발생과 진화과정을 해명해주는데 필수적으로 뒷받침되는 학문이다. 또 경제적으로도 그 중요성이 결코 무시될 수가 없다. 대부분의 국제적인 석유회사들은 독자적인 고생물연구기관이 설치되어 있고 수많은 고생물학자들이 여기에서 석유탐사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각국에는 국립으로 지질조사기관이 설립되어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고생물학자들이 활발한 활동을 행하고 있으며 특히 자연사박물관, 과학관 등에서도 활발한 연구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4년에 한국고생물학회가 창설되어 현재 약 2백여명의 회원이 가입하여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앞으로 국내에도 국립자연사 박물관을 비롯하여 적어도 각 도청소재지에 이와 같은 박물관을 설립하여 국내의 귀중한 과학적 자료들을 연구, 보존하고 후세교육에 활용할 수 있도록 정부와 국민들에게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 나라 문화의 수준은 여러가지로 나타난다고 하지만 자기 나라의 귀중한 문화적, 과학적 자료가 국민 스스로에 의해 연구되고 지켜질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때 비로소 선진 문화국민으로 평가받게될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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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이하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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