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주인이 되기 위한 인류의 열망은 오랜 세월에 걸친 시계발달의 역사로 표현되어왔다. 태양의 변화를 기준으로 측정한 해시계, 그 한계를 뛰어넘어 어둠의 시간을 측정했던 물시계와 보다 짧은 간격을 재는 데 유용했던 모래시계는 이러한 인류의 열망과 노력의 소산이었다. 해시계로부터 그 열망과 노력의 첫걸음을 내디뎠던 인류는 그가 진정으로 시간의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낮과 밤을 연속된 시간으로 이어나가고, 시간들을 보다 규칙적이고 오차없는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시간’을 보다 정밀하게 구분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시간단위보다 더 세분화된, 가령 시각의 세분화, 시각내 분, 초로의 세분화 방법이 창안되어야 했던 것이다. 해시계 물시계는 인류의 시간에 대한 요구를 어느정도 충족시켜 주었지만, 하나의 발전이 낳은 또따른 요구, 정교함과 규칙성을 수용해내기에는 많은 한계와 어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인류가 시간을 지배하기 위해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 해시계였다면, 이제까지 있어온 수많은 시계의 역사를 현대에 접목시켰던 것은 다름아닌, 기계시계의 발명과 사용으로부터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이 기계로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14세기에 기계시계 등장
일찌기 14C경부터 유럽인들은 기계적 시계장치를 고안했던 것이다. 그 이전에는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시계라해야 그림자시계 대시계 모래시계 양초시계 향시계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인류의 시간측정에 관한 지혜가 축적되어온 오랜 세월, 그 안에는 이미 5천여년전에 해(年)의 측정에서 주목할 만한 전진이 있었고 날(日)들의 무리인 주(週)가 오랫동안 유용하게 쓰여졌는가 하면, 이러한 것들은 또다른 문제를 드러내보이면서 이어져온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엄청난 발전의 뒷편에도 다른 많은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발전은 다른 한편의 의미로 하나의 발전을 낳음으로 인해 이제까지 숨겨져온 새로운 한계를 발견하게 해주는 계기였던 것이리라. 이러한 발명의 축적 위에서 근대에 들어와 인간은 비로소 분(分)으로까지 세분화된 시간속에서 살기 시작했다. 시간을 기계로 측정하는 근대식 시계의 발명은 수도승들의 충실한 종교생활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수도승들은 정해진 기도를 하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더 정확한 시간을 알 필요가 있었다.
최초의 기계시계는 시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으로서 고안되었다. 타종 시계가 그 첫번째 시계였다. 수도원의 타종장치라든가, 일정한 간격이 지날 때면 벨을 때리는 기계들이 최초의 기계시계였던 것이다. 일찌기 수도원 타종소리들이나, 깊은 잠에서 일어나게 하는 침실의 시계들은 근대 시계의 선구자였다. 정해진 시간에 종이 울리면, 수도승들은 어김없이 일어나서 탑에 높이 걸려 있는 큰 종을 때려, 모든 사람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했다. 마침내 작은 종소리에 맞춰 탑의 큰 종들이 자동적으로 울리는 장치까지 고안되었다.
이렇게 수도원 시계들은 기도하는 시간을 비롯한 교회의 규범적 시간들을 알렸다. 교회의 규범과 규율이 변화하거나, 각 나라 각 시대마다 풍습의 변화에 따라, 이러한 시간들의 측정단위 역시 변화했다. 하지만 이 무수한 변화와 복잡함 가운데서도 종교가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고 지배했던 서유럽의 중세사회에서, 수도원의 시계들은 계절에 따르는 시간의 변동과 변화되는 시간의 간격을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소리시계
타종시계가 인간사회에 자리잡기까지, 비록 거듭되는 실패로 세상에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소리시계를 만들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어왔다. 일찌기 한 똑똑한 파리사람이 대포시계를 고안했다. 정확하게 12시에 맞춰놓은 해시계 볼록렌즈를 작은 대포의 포문에 끼워넣었다. 그후로 태양이 머리 위에 머무는 정오 무렵이면, 태양빛에 의해 대포가 자동적으로 예포를 쏘아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786년 ‘오를레앙’공작은 파리의 궁전 정원에 이 우아한 대포시계를 설치하여 이 시계를 더욱 빛내주기도 했다. 이후 새로운 종류의 기계시계는 기계의 발명과 보다 정확한 시간 측정의 요구에 따라 더욱 세밀하게 발전되어 갔다. 엄밀히 말하자면 ‘듣는 것’으로서 출발했던 초기의 기계시계는 벨을 울린다는 점 말고는 시계가 될 소지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것이 시간의 흐름을 재는 어떤 장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되었을 따름이다.
중세의 타종시계는 사람들이 잠든 적막한 밤 동안에는 울리지 않았다. 저녁기도를 알리는 한밤중의 네번의 타종이 끝나면, 다음날 새벽기도시간까지 종은 울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생활리듬을 고려한 조치였던 것이다.
●─탈진기에서 스타카토음이
해시계 물시계 모래시계의 역사 위에 우뚝서게 된 이 타종시계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듣는다는 것’에 있었고, 이를 위해 종을 망치로 때리는 기계적 움직임을 정규화시켜야만 했다. 기계의 사용은 그 안에 기계발전의 계기를 내포하면서 시계의 역사를 크게 진전시킬 수 있었다. 인류의 새로운 감각은, 종을 때리는 힘은 추가 떨어지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기계는 추의 운동을 조절하는 데서부터 새롭게 태어나기 시작했다. 추가 떨어지는 자유를 막고 규칙적인 간격으로 추의 낙하를 중단시키는 장치가 고안되었다. 실로 인류지혜의 전승의 한 단면이랄 수 있었다. 태양으로부터 그림자의 연속되는 움직임을, 모래와 물시계에서 물이나 모래의 자유로운 낙하운동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던 인류는 그 지혜의 소산을 추 운동에 아낌없이 적용했던 것이다.
이 새로운 기계는 후세의 사람들에 의해 ‘탈진기(脫進機)’로 불리웠던 바, 시계속의 기동력의 ‘배출’을 조절하는 단순한 도구였다. 추의 떨어짐을 번갈아가며 저지하게끔 고안된 이 기계는 시계의 작동장치 위에 추의 힘을 투하하도록 되어 있었다. 탈진기는 추가 떨어지는 힘을 규칙적으로 중단하는 장치 이상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것은 스타카토식으로 대표되는 모든 현대식 시계를 만들수 있었던 기초발명품이었다.
최초의 단순한 형태는 ‘굴대 탈진기’였다. 알려지지 않은 한 기계의 천재가 수평봉이나 굴대를 가로지르는 수직굴대에 톱니바퀴를 끼움으로써 떨어지는 추와 고정된 추들을 연결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추의 운동은 규칙적이었다. 서로 맞물려 있는 수평봉과 수직봉은 커다란 추에 의해 규칙적인 운동을 했다. 봉들은 톱니바퀴에 의해 맞물렸다가 떨어지곤 했다. 이러한 끊어지는 운동들은 결국 분들을 구분했고, 이후에는 더욱 발전하여 초들을 구분했다.
기계가 생활 속에 일상화되었을 때, 사람들의 시간에 대한 관념도 바뀌게 되었다. 그것은 더이상 ‘흐르는 어떤 것’으로서가 아니라 측정된 순간들의 축적으로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일상적 삶을 지배하는 독립된 시간은 이미 태양빛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른 주기들이 아니게 되었다. 일조량의 변화에 따라 시간을 조절했던 태양의 시간과는 달리 기계의 시간은 ‘기계의 운동’과 그 규칙성을 따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기계는 그 자신의 규칙성을 나타내는 균등한 단위들의 끝없는 계열을 창출시켜나가게 되었다. 단위들의 균일함, 시계의 정밀성은 탈진기의 정규성과 정확성에 의존하며 발전했다.
●─하루가 24시간이 되기까지
1330년경, 시간은 하루에 24시간으로 고정하는 근대식 시간으로 고정되었다. 이 새로운 하루의 시간은 밤을 포함했다. 그것은 한 낮과 다음 낮 사이의 시간, 더 정확하게는 소위 현대 천문학자들이 ‘평균 태양시간’으로 불렀던 것으로서 측정된 것이었다. 역사상 최초로 시간은 언제 어디서든지 정확한 의미를 띠게 되었다. 여기에는 인류의 위대한 혁명적 성과와 경험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인간의 태양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이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연적 조건과 주변 환경, 그리고 바로 그 자신에 대해 인간은 변화된 자신의 우위를 새롭게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 자신이 발명한 기계의 지배 아래 그 자신이 놓이게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연으로부터의 해방은 다른 어떤 것, 즉 기계에의 종속을 낳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때문에 인간의 진보와 발전의 의미가 손상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최초의 시계들에는 숫자판이나 시간의 변화를 알려주는 바늘이 없었다. 숫자나 문자의 해독률이 별로 높지 않던 당시로서는 종은 모든 사람들이 쉽게 시간을 알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려니와 굳이 숫자판이 아니더라도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시간의 흐름을 표지판으로 알려주고 분과 초 등의 보다 세밀한 단위들로 구분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한 상태였지만, 간단한 기계와 커다란 소리로써 시간을 측정하고 알 수 있었던 기계시계의 발명은 인류에게 커다란 진보의 걸음을 내딛게 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14세기 유럽 사회에서 교회와 공회당의 종각에 설치된 커다란 탑시계는 매일, 같은 시간에 종소리를 울렸는데 이것은 인류의 새로운 시간의식의 선구자역을 담당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신을 섬기고 인간의 천국을 향한 열망을 나타내기 위해 지어졌던 교회탑의 역할 역시 자연히 넓어졌다. 결국 교회탑은 지금의 시계탑으로까지 전승되었던 것이다. 1335년, 연대기록자 ‘갈바노’는 밀라노 성 마리아 교회 종각에 대해 찬미를 보낸다.
“종각의 종들은 이 도시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낮과 밤을 잇는 24시간을 알려준다. 아주 커다란 망치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수만큼 종을 울린다. 첫번째 시간에는 한번 울리고, 두번째에는 두번을, 세번째는 세번, 사람들은 이렇듯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하루의 삶을 구획하는 시간들을 구별한다.”
●─분(分)과 초(秒)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일상적 삶을 계획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필요로 하였으나 시민들 각자의 힘으로는 시계를 만들 수 없었던 때, 타종시계는 사람들의 삶의 한 가운데로 밀려들어갔다.
이 외에도 1500년경 영국의 웰즈 수도원에 있었던 시계는 1/4시간을 알려주었지만, 분을 측정하는 장치나 방법은 개발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표지판에 시침과 함께 분침이 등장했을 때는 추가 성공적으로 시계에 적용되었을 무렵이다. 그 때까지 분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모래시계를 사용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었다. 추의 사용은 분과 침뿐 아니라 1670년경 초침의 사용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것은 추의 낙하운동과 그 저지를 보다 짧은 간격으로 조절하면 되는 문제였다.
이들 짧은 간격을 재는 분침과 초침의 발견은 기계시계의 유용성을 더욱 높여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시계의 장점이랄 수 있었던 것은 하루의 전부를 규칙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던 기계시계의 연속적인 작동이었다. 기계시계는 낮과 밤의 단절을 막기 위해 하루종일 작동되었고 하루의 전부를 통솔했다. 물론 사람들은 그 자신이 경험해온 오랜 관습에 따라 낮시간과 밤시간을 따로 세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간은 연속적으로 측정되었지만 사람들은 낮과 밤의 시간을 따로이 지칭했던 것이다. 미국인들은 하루의 시간을 ‘12씩 두쌍’인 체계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의 시간은 24시간이라는 점이 일반화되게 된 것은 순전히 기계시계의 연속적 작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루 24시간의 사연
왜 하필이면 24였을까? 이것은 고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인들의 60진법 사용례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칼레아의 바빌로니아인들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다섯 혹성들을 주목했다. 혹성의 5에 달들의 숫자이면서, 6의 배수인 12를 곱하면 60진법과 일치하는 숫자들이 발생했다. 이렇게 발생한 12라는 숫자에서 낮과 밤, 하루를 두번 측정하는 총계로서 ‘24’라는 수는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었다.
우리가 하루 24시간과 각각의 시간을 기록하고, 더 나아가 분을 사용하게 되기까지 우리에게 전수되어온 인류의 지혜가 그 밑거름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태양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기까지 그 과정에 새겨진 시계발달의 역사는 새삼 인류역사의 전승과 함께 그 전승 속에 살아 움직이는 ‘인간적’ 삶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인류의 고뇌를 읽게 해준다. 기계시계가 처음 ‘듣는 것’으로서 고안되었을 때가 그러했고, 그 위에 ‘보는 것’으로서의 역할 또한 담당하게 되는 ‘시계표지판’의 고안 또한 그러했다. 중세의 방송매체는 종이었다. 무엇인가 그 사회의 공공의 목소리를 모두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을 때, 인간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고 많은 한계를 지닌 것이었고 그렇다고 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기계장치가 특별히 발명되어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좋은 인류에게 이 어려움을 뛰어넘게 해주는 수단이었다. 커다란 교회 탑 곳곳에서 울려퍼지는 종은 시간을 이야기했고, 불을 끄기를 도와달라고 외쳤고, 적이 나타났음을 알렸다. 또 일을 하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모으는가 하면 휴식과 수면의 시간을 알려 그들을 잠자리로 보내기도 했다. 그들의 지배자였던 왕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전쟁의 승리나 새로운 황제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서도 종은 울렸다.
●─표시판이 등장하다
시계표시판이 설치되면서, 인류의 시간은 소리의 시간에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었고 많은 재미있는 우화들을 남기게 되었다. 시계의 표면 위에 춤추는 숫자판은 아주 천천히 등장했다. 시계판 위의 숫자는 간단했지만, 이 간단한 문자조차 쉽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문명의 발달과 교육의 세례가 전 인류에게 쏟아질 때까지 문맹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저 유명한 중세의 공공 시계들은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초기에는 간단한 ‘표시판’을 내걸었다.
약 두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기계시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후, 시계의 표시판은 보다 다양하게 변모하게 되었다. 1350년경 ‘스트라스부르크’의 대성당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시계는 달력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는가 하면, 점성술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것은 마치 하나의 작은 장난감처럼 시간을 알릴 때마다 다양한 쇼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달력과 지침들이 달린 간이 천측기의 움직임, 게다가 태양 달 혹성들의 운동을 기록하는 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천체기록판의 위쪽 칸막이 속에서는 시간을 알리는 편종의 곡이 연주되는 동안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세 동방박사가 줄지어 인사했다. 또 다른 하나의 측정판은 종교의 성일들을 보여주었다. 시간의 표시판에는 각 시간마다 네등분의 표시기가 있어 이들 각의 1/4시간 네 개는 인간의 유아기, 청춘기, 성년기, 노인기로 구분되어, 시간이 흐를 때마다 각각의 시대를 차례대로 가리키며 시간을 알렸다. 중세유럽에서 가장 대중적인 연극은 아마도 시계탑에서 공연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최초로, 눈으로 볼 수 있게끔 시간이 기록되는 기계적 장치였던 시계계기판은 1344년, 이탈리아 치오지아(chioggia)의 자꼬뽀(Jacopo Dondi)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평생을 시계공으로 살았고, 그의 아들도 또한 시계발명에일생을 바쳤다.
1364년, 그의 아들 ‘지오바니’는 추와 시계를 정교하게 결합시켜 이전에 만들어진 다른 어떤 시계보다도 정확한 시계를 만들었다. 오늘날, 비록 그 시계 자체는 소멸되었지만, 워싱턴 국립박물관에는 지오바니의 시계를 재현한 완벽한 설계도와 세밀한 설명서가 보존되어 있다. 5피트 가량의 7각형기계는 떨어지는 추에 의해 움직인다. 그리고 숫자판에는 항성의 변화를 반영하는 시간과 교회의 성일들, 매일 낮시간의 길이와 태양이 뜨고 지는 시와 분, 양력과 음력 주기 및, 태양과 달의 일년운동, 그리고 다섯 혹성의 일년의 운동이 표시되어 있었다. 이러한 뛰어난 발견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천체에 대한 정보와 시간 단위, 시간 측정 법들은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발견된 것들보다 훨씬 덜 정확했다. 이 시계가 일상적 삶에 자연스러운 것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먼저 넘어야 할 관문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천체변화에 대한 정보와 시간을 보다 정확하게, 오차없이 측정할 수 있는 시계의 정밀함이었다. 시계의 정확성이 떨어지고, 시계에 의한 규칙적인 시간측정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크게 필요치 않던 시대에는 오히려 해변이나 강 수위의 변화들이 알려주는 시간들이 더 유용했다. 인류의 지혜로써 기계시계가 발명된 이후로도, 자연적 시계는 인위적인 기계시계보다 더욱 삶의 가까이에 있고, 친근했으며 유용했던 것이다.
당연히 기계시계가 만들어진 이후, 인류사회에 보편적인 시계로 자리잡혀나가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기계시계가 모든 이들의 벗으로, 우리의 친근한 이웃으로 성큼 다가오기까지, 기계시계 자체의 정밀한 발전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었던 기술의 발전, 정밀한 시간측정을 모든 사람에게 요구했던 근대사회생활의 변화가 숨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