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계가 역사의 전환기를 맞아 자체 민주화와 사회봉사를 다짐하는 반성운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과학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 6월 이후의 민주화 열기속에서 비교적 침묵으로 일관해 오던 과학기술자들이 여러분야에서 조직적으로 활동을 개시한 것이다. 젊은 과학기술자들이 주도하는 이러한 움직임은 기존의 과학기술계가 소시민적, 권위주의적 타성에 젖어왔다는 비판을 토대로 사회적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각 분야의 '제자리 찾기'를 선언하고 나섰다. 의사 과학자 엔지니어 연구원 건축인 대학원생 등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러한 바람은 이들이 2천년대 한국의 과학기술계를 떠맡을 주역이란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인도주의 실천 의사협의회」의 출범
지난해 11월 21일 여전도회관 강당에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가 창립대회를 가졌다. 1백여명의 의사가 참석한 이 대회에서는 '인의협'의 고문이기도 한 김일순(金馹舜·50·연세대)교수가 '인도주의와 현대의료'란 기조강연을 통해 의료인에 대한 사회의 기대가 곳곳에서 허물어지게 된 이유로서 인간의 복잡한 면중에서 자연과학적인 측면만을 강조해온 의학자체의 문제점과 서구 자본주의 가치관에 바탕을 둔 물질주의의 팽배를 들면서 사회적 책임을 지는 의사의 역할과 자세를 강조했다. 이런 문제제기는 '인의협'의 발기취지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의과대학 시절 우리가 설레이는 젊은 가슴을 여미며 몇 번이고 읽어보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에 쓰여 있듯이 의업은 질병으로부터 이들을 어떤 조건에도 관계없이 도와야 하는 박애주의를 유구한 전통으로 해왔읍니다. …그러나 근자에는 이러한 의업의 전통은 의료계의 안팎에서 점차 잊혀져가고 있으며 우리들 자신조차 의업의 순수성을 어디까지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인지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지 오래입니다."
'인의협'에는 홍창의(洪彰義·서울대) 구연철(具然哲·이대) 김일순교수 등 원로급 의사교수들이 고문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회원의 활동 분야별로 4명의 공동대표를 두고 있다. △교수 : 윤종구(서울대병원·소아과) △봉직의 : 문병수(강화병원·내과) △전공의 : 김유호(한국보훈병원·소아과) △개원의 : 김기락(신촌연합의원·가정의학과)
현재 회원은 2백여명으로, 인턴, 레지던트 등 전공의가 가장 많고 교수도 17명이 포함돼 있다. 사업은 상담부 진료부 학술부 출판부 홍보부 등 5개 부서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중요한 것들로는 △전화 서신 방문 등을 통한 상담 △의료소외계층에 대한 의료서비스 제공 △긴급역학조사 및 의료구조 △대중적 보건교육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사업은 진료와 상담. 진료사업은 연내에 상설진료소가 마련되면 본격적으로 추진될 예정이지만, 상담전화(742-9358)을 통한 상담활동은 벌써 시민들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문의전화에 대해서는 배치된 상근의사가 필요한 자문이나 정보를 제공해 주거나 변호사나 다른 의사를 소개해 주기도 한다.
'기독청년의료인회'(회장·전철수)도 지난 10월 10일 창립돼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다. 서울대 연대 가톨릭의대 이대 고대의 기독학생회 출신 의료인이 주축이돼 결성한 이 단체는 창립취지문을 통해 "의료문제가 정치 경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다"는 인식 아래 "현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생한 의료소외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자주적 민중의료체계를 형성하는데"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회원으로는 의사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문제도 개방적인 자세로 받아들인다는 게 전철수회장의 말이다.
치과의사들의 사회민주화운동
한편 치과의사들의 활동도 주목을 끌고 있다. 지난해 10월16일 발족한 '연세민주치과의사회'(회장·이문령)는 작년 이한열군 사건과 연세대 최루탄추방운동을 계기로 탄생한 민주화운동의 한 결실인 셈. 연세대 치대출신의 젊은 개업의를 중심으로 현재 60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운영위원장인 권호근(權晧根·34)씨는 이 단체가 좁은 의미의 '정치적' 활동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사회민주화'를 지향하고 있음을 전제하면서 앞으로 "기존의 자선적인 진료를 지양해 새로운 의료체계의 대안을 찾아나갈것"이라고 전했다. 현재 다른 대학출신 치과의사들도 이런 성격의 모임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어 치과의사들의 순수한 사회운동단체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지난해 5월16일 출범한 '보건과 사회 연구회'는 보건의료를 사회적 맥락에서 연구하려는 젊은 연구자들의 이색적 모임. 회장인 김용익 교수(서울대·의료관리학)는 "외국에서는 의학을 사회과학적 각도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활발함에 반해 국내에서 이런 시도는 처음"이라고 밝혔다.
회원은 교수 연구소연구원 의사 석·박사과정학생 등 60여명이며 이들의 전공은 의학 치의학 간호학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행정학 등 다양하다. 이들은 매달 월례발표회를 갖고 있으며 회지 '보건과 사회'를 격월간으로 발행하고 있다. 이제까지 월례발표회에서 다룬 주제들은 '생의학적 모델의 자본주의적 발전과정' '한 도시 영세민지역의 사회적 조직망과 의료 추구행위' '노동자 건강문제의 사회구조적 이해' 등으로 이 연구회의 성격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앞으로 딱딱한 학회지 성격을 탈피, 대중적 무크지를 발행해 아직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고 있는 우리나라 의료문제 해결을 위한 이론작업을 벌여나갈 계획이다.
산업보건에 관한 최초의 민간단체
우리나라에서 가장 심각한 의료문제중의 하나는 산업재해와 직업병.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산업재해는 날로 증가해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더라도 80년부터 86년까지 1만여명의 근로자가 사망했고 96만여명이 부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인 안전장치, 열악한 작업환경속의 장시간 노동은 여전해 산업재해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게다가 통계조차 제대로 작성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최근의 수은 중독사건 처럼 불쑥 불쑥 제기되고 있는 직업병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11월 29일 민간차원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산업보건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노동과 건강연구회'가 창립돼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연구회가 발족된 계기는 지난해 10월17일부터 격주로 4회에 걸쳐 철야로 진행된 '산업보건에 관한 웍샵'. 구로의원의 주최로 열린 이 모임에 참석한 의료인, 산업안전 관계학자, 공해연구가, 노동자, 노동조합관계자, 노동상담소관계자, 학생 등 80여명은 산업보건에 관한 지식이 전문가와 일반인을 막론하고 놀랄만치 부족하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이 연구회를 조직하게 됐다는 것이 공동대표의 한사람인 양길승씨의 말이다.
앞으로 이 연구회는 산업보건문제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 산업장 근무자를 위한 기본적 지식을 교육하는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과학기술자들의 움직임 가운데 의료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는 것은 그만큼 이문제가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료인보다도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일반 연구자들의 활동은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까. 우선 그 의미와 배경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집단적으로 표출된 과학자의 양심
과학 또는 과학자라고 했을 때 우선 연상되는 이미지는 정확성 객관성 중립성 등이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와 뉴턴 이래의 오랜 과학적 전통의 산물로서, 과학자는 감정이나 가치판단 같은 질(質)적인 요소는 배제하여 정량화(定量化)하며 대상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관찰해야 한다는 규범에 따른 것이다.
자연스런 결과로 이들은 과학이 사회와 연관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초연한 입장을 지니고 엄정중립의 객관적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를테면 깔끔한 수학이론에 몰두하고 있는 수학자는 그 연구결과가 수소폭탄의 개발에 이용되는 것을 알지도 못하며 또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연구체제가 비대해져 과학자들의 목소리가 연구지원체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연구결과의 이용이 커다란 사회적 의미를 가지게 됨에 따라 이러한 '상아탑 속의 과학'은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30년대부터 '버널' 등에 의해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문제가 강조되기 시작했고 그후 환경파괴, 과학기술의 군사적 이용, 과학자들에 대한 정부의 통제와 대중의 과학기술로부터의 소회 등이 과학자들에 의해 산발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과학기술 이용구조에 맞서는 과학자 개개인의 양심은 미약하기 마련. 이에 과학자들은 나름대로의 사회적 관심을 조직적으로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1955년 7월 '버틀란트 러셀'이 초안하고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다수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서명해 유명한 '러셀-아인슈타인 선언'과 그 이념을 바탕으로 한 '푸궈시 회의', 그리고 1946년 파리에서 창설된 세계최대의 과학기술자 조직인 '세계과학노동자연맹' 등은 과학기술의 사회적 의미에 관심을 갖고 세계평화유지에 힘쓰며 전쟁을 위한 과학의 오용(誤用)에 반대하는 대표적 과학기술자 조직체.
한편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60년대 말의 반전운동 분위기 속에서 미국과 유럽에서는 새로운 과학자운동조직이 앞을 다투어 탄생했다. 이들은 "원래 민중편에 서야 할 과학이 오히려 지배체제에 편입되었다. 과학을 체제로부터 분리시켜 민중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며(미국·민중을 위한 과학그룹·SESPA)" "과학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정치와 분리될 수도 없다. 따라서 과학의 사회적 역할을 바꾸는 일은 사회의 변혁에 필수적(영국·과학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학회·BSSRS)"이라고 주장한다.
공해문제와 싸우는 과학자들
수백년의 과학전통을 갖고 있는 서구에 비해 우리는 불과 30여년의 근대과학의 경험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서구의 과학기술을 도입하기에 바빴지, 그것을 우리 문화속으로 체화(體化)한다는건 엄두도 내지 못한 형편. 결국 서구의 '과학주의'는 그대로 우리 과학기술계의 지배이념이 되어 '과학과 사회' 또는 '과학과 인간'이란 주제는 자리를 잡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학자의 사회에 대한 관심도 거의 전무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70년대 중반부터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공해, 의료문제 등에 관심을 쏟는 과학기술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80년대에 들어와서는 양적 확대와 함께 이들의 관심의 폭도 넓어져 핵문제, 과학기술정책 그리고 과학기술자계층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논의가 대두하게 되었다.
7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과정에서 과학자들의 사회에 대한 관심은 공해문제를 통해 표출되었다. 그러나 양심적인 과학자들의 산발적인 움직임은 공해연구 자체가 억압받는 상황에서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기가 일쑤였다. 공해연구에 관한 한 당시는 '과학자의 수난시대'였다.
그러나 82년 5월 '한국공해문제연구소'(소장·최완택목사)의 출범은 공해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공해문제의 심각성을 조사·폭로하고 홍보활동과 더불어 주민운동의 확산을 꾀한다"는 목표에서 보듯, 이 연구소는 기존의 과학계의 힘을 빌지 않고 양심적인 학자와 젊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공해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을 내세우고 있다.
연구소의 회원은 1천4백여명으로 대학생 대학원생 재야인사 교사 교수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당국이 조사를 방해 또는 기피하는 지역, 조사를 했더라도 결과를 발표하지 않거나 내용이 미진한 지역의 공해실태를 집중적으로 조사해왔다. 지난 85년 1월 '온산괴질'을 공해병이라고 폭로한 것은 대표적 예.
그밖의 공해반대운동단체로는 '공해추방청년운동협의회'(회장·이덕희) '공해연구회'(대표·조중래) '공해반대 시민운동협의회'(회장·서진옥)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공해문제 핵문제 등을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주민운동과 시민운동의 활성화, 공해실태고발 접수, 공해실태 조사, 홍보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특히 이들은 "당국과 결탁한 연구기관이 공해실태를 왜곡해 발표하거나, 피해주민에게 불리한 결론을 일방적으로 내왔다"고 분석하고, "피해주민의 체험을 중시하고 공해문제의 생태학적 복잡성을 이해하는 양심적인 과학자들을 동원, 과학기술이 가해자에게만 유리한 도구로 전락되는 것을 막겠다"고 공통적으로 밝히고 있다. 실제로 '공해연구회'는 지난 6월 다른 공해반대운동단체와 양심적인 과학자들의 도움으로 당국의 '온산병'에 대한 보고서의 허구를 '과학적'으로 논박하는 책 '우리 아이들만은 살려주이소'를 펴내기도 했다.
젊은 건축인들의 모임
우리사회가 안고있는 가장 큰 문제의 하나인 주택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려는 건축인들이 모임을 구성했다. 지난 11월14일 1백50여명의 건축관계 교수, 대학원생, 설계사무소 및 건설회사 근무자들이 모여 '청년건축인협의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는 협의회의 활동지침으로서 △우리땅에 뿌리박은 진정한 건축문화의 창달에 노력 △주거·도시·환경문제가 건축인의 중심적 실천영역임을 자각, 대중을 위한 건축적 사회적 해결에 나설 것 △건축문화의 발전과 창조성 제약하는 사회제도의 비민주와 행정만능, 권위주의의 개혁 △전반적 문화발전을 선도할 것 등을 선언했다.
활동은 창작 학술 사회제도 기술 주거 도시분과 등 6개 분과를 통해 수행될 예정이며 건축기획전, 공동작업, 세미나, 공청회 등의 방법을 이용할 계획이다. 최명철(33)회장은 장차 "지역별로 서민주택센터를 설치해 기술 및 설계지원과 법률서비스를 할 것"이라며, 서민들의 필요에 맞는 주택의 보급에도 힘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위 협의회가 발족한 배경에는 이제까지 대학생을 중심으로 활발히 벌어진 '민중건축'에 대한 관심이 크게 작용했을것으로 보인다. 한 회원의 말대로 "사회적인 기여가 직접적으로 요청되는 건축계가 민주화시대를 맞아 오랜 침묵에서 깨어나 제자리를 찾으려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독재체제가 과학의 창의성 막아
과학기술자들의 본격적인 사회참여를 지향하는 '청년과학기술자협의회'가 87년 8월 22일 출범했다. 이는 85년부터 YMCA내의 서클이었던 '두리암'이 확대 발족한 것. 이들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문제점으로서 ①외세에 의해 과학기술자의 생산적 활동이 민족적 생산력 발전으로 연결되지 못했고 ②군부통치가 가장 민주적이어야 할 과학기술자 집단에 상명하복 체제를 강요, 과학기술의 창조적 발전을 저해했으며 ③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과학기술의 신비화와 과학기술자들의 엘리트의식이 과학기술자들의 문제해결능력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인식아래 이 협의회는 "과학기술이 진정한 자주·민주사회의 토대건설에 이바지하도록 한다"는 취지를 밝히고 있다.
협의회의 회원은 1백50명. 대부분이 대학원생 박사과정 또는 국공립연구소의 연구원이며 산업체의 기술자나 교사 약사 의사 등도 참여하고 있다. 활동은 정책연구, 문화, 과학기술조사 등 3개 소위원회를 통해 이루어지며 기관지 '과학과 노동'을 발간하고 월례 세미나와 강연회를 열고 있다.
앞으로는 '핵소위원회'를 두어 핵문제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키고,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연구도 강화시킬 예정. 특히 이들은 낭만적인 비과학론이나 문명비판론, 그리고 관념적인 민중과학론을 비판하면서, 과학기술자를 '과학기술노동자'로 규정한 '과학기술노동운동론'을 펴 주목을 끌고 있다.
「과학기술 노조시대」의 도래
최근의 노동조합결성의 분위기를 타고 과학기술자와 전문 연구원들이 잇달아 노조를 결성하고 있다. 이것은 과학기술자의 급격한 양적 팽창을 반영하는 것으로 과학기술자가 더이상 상아탑속의 선택된 소수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과학기술자가 주축이 된 최초의 노조는 '기술노조'라는 기치를 걸고 작년 8월28일 출범한 '한국데이타통신 노동조합'. 이들은 노조결성 보고대회에서 자신들이 "기술과 정신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노동자임이 분명하다"고 선언했다.
현재 조합원은 6백50명으로 이 가운데 대부분이 컴퓨터·통신관련의 기술자인 프로그래머 시스팀엔지니어 시스팀어낼리시스트들이다. 노조의 사무장인 김상민(28)씨는 "앞으로 노조활동을 통해 엔지니어의 사회인식을 일깨우고 컴퓨터의 확산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컴퓨터로 인한 직업병, 통신정책 등에 대한 연구작업도 수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공립연구소도 노조결성의 물결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지난 9월 22일 산업연구원(KIET)에 국내에선 처음으로 연구원노조가 설립되었다. 이어서 12월 9일에는 한국과학기술원에도 연구원을 중심으로 하는 노조가 결성돼 '과학기술 노조시대'의 도래를 실감케 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메카'라고 일컬어지는 대덕연구단지에도 한국전기 통신연구소와 한국화학연구소에 노조가 탄생했다. 이런 움직임은 단지내 다른 연구소에도 파급될 전망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국토개발연구원과 한국개발원(KDI)에도 연구원 노조가 결성되었다.
이들 '과학기술노조'들은 한결같이 연구소내의 비민주적 연구체제의 개선과 과학기술자들의 사회적 책임의식을 강조하고 있어 앞으로 젊은 과학기술자들이 주도하는 과학기술자운동은 한층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예비 과학기술자들의 항변
예비과학기술자 집단이자 대학내 연구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는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활동도 눈길을 끈다. 서울대의 경우 지난 9월 자연과학대학 대학원생(7백60명)과 공과대학 대학원생(1천5백명) 전원이 각각 대학원자치회를 구성했다. 자치회를 만든 배경으로서 자연대 대학원자치회의 김근배회장은 대학원교육의 문제점, 대학원생의 권익옹호의 필요성, 그리고 한국사회의 진정한 과학기술 발전 추구를 들었다.
대학원생들은 대학원이 안고 있는 문제점으로 △연구비와 연구시설의 절대적 부족 △정실에 의한 교수채용와 교수 자의에 의한 커리큘럼 설정 등 교육의 비민주성 △석사과정 이수후 대부분이 유학을 가는 풍토 △프로젝트 위주의 연구 △교수와 학생의 봉건적·권위주의적 관계 등을 꼽고 있다.
지난 11월17일 공대와 자연대 대학원자치회는 공동으로 '유학의 현실태와 과학기술의 자립화'란 주제를 놓고 공개토론회를 가진 바 있다. 앞으로 이들은 대학원생들의 복지문제 뿐 아니라 건전한 사회의식을 갖는 과학자상 세우기와 과학의 자립적 발전을 위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또 공해문제 등 사회문제에도 적극 참여할 계획이라고 한다.
과학기술과 사회에 대한 관심은 각종 학회활동을 통해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예컨대 서울대의 '현대과학기술연구회'와 '과학철학연구회', 한국과학기술원의 '과학기술연구회', 한양대의 '현대과학연구회'등은 심포지움 등을 통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오늘날 일상생활의 구석구석까지 과학기술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만큼 과학기술과 사회는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물밀듯이 밀려오는 과학기술의 파도 앞에서 일반대중이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문적인 과학기술자나 정치인들이 그 영향에 대해서 무관심해 온 게 사실이다. 따라서 뒤늦게나마 젊은 과학기술자들을 중심으로 다방면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과학기술과 사회의 균형잡힌 발전을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