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컴퓨터는 국민학교 어린이들도 다룰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불과 10여년전만 해도 컴퓨터는 정부나 대기업들의 전용물이었다. 값도 비쌀뿐 아니라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고 다루는 방법도 매우 복잡했었다. 1970년대초 미국 인텔사의 마션E. 호프 2세가 개발한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컴퓨터대중화의 도화선 구실을 했다. 그런데 이 도화선에 불을 그어 당긴 것은 20대전후의 젊은 컴퓨터 광(狂)들이었다. 테드넬슨, 윌리엄 게이츠 3세, 스티븐 좁스와 스티픈 워즈니액을 포함한 여러 '컴퓨터 광'들은 1970년 중반께까지 누구든지 살 수 있게 컴퓨터를 되도록 작게, 싸게 만드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열을 쏟았다. 이들의 모험적이며 도전적인 사업열은 퍼스널 컴퓨터의 설계개발에 성공하는 한편 그 소프트웨어를 개발함으로써 마침내 컴퓨터 대중화의 막이 오르게 된 것이다.
미국의 '컴퓨터 광'들중에서도 애플 컴퓨터사의 창업주인 스티븐 좁스와 스티픈 워즈니액은 한때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영웅'대접을 받았으며 그들의 성공담은 모험심에 찬 미국 젊은이들의 숱한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들이 차고에서 출발한 애플사는 불과 3-4년만에 세계컴퓨터계의 거인 IBM을 제치고 퍼스널 컴퓨터계의 정상자리에 올라섰으며 좁스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억만장자가 되었다.
국민학교 동창
좁스와 워즈니액은 세계전자공업의 성지인 미국 캘리포니어주 실리콘 밸리에서 자랐다. 이들은 국민학교시절 같은 반 친구네 차고에서 처음 만난다. 좁스는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과학전에서 일등상 수상작인 컴퓨터를 만든 워즈니액의 재주에 감탄하고 있었다. 당시 실리콘 밸리에 있는 록키드사의 기사였던 워즈니액의 아버지는 아들의 컴퓨터회로 설계를 도와주기도 했지만 워즈니액의 재능은 뒷날 애플 컴퓨터설계에서 천재적인 기술솜씨를 발휘하게 된다.
이 두 젊은이는 함께 로스 앨토스에 있는 홈스테드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부터 더욱 가까워진다. 1971년 이들은 '에스콰이어'잡지에서 '캡틴 크런치'라는 이름의 전화광이' '블루 박스'라고 하는 장거리전화를 공짜로 걸 수 있는 위법장치를 만들었다는 기사를 읽고 두사람의 재주를 합쳐 블루 박스를 만들었다. 워즈니액은 이 장치를 이용하여 바티칸 교황청을 불렀다. 그는 당시 미국국무장관이던 헨리 키신저를 가장하고 교황 바오로 6세와 대화하고 싶다고 했다. 교황이 전화에 대기하고 통역을 할 주교가 몇마디 주고 받는 가운데 가짜가 탄로 나기도 한 일이 있다. 몇해 뒤 이들은 이 위법장치의 개발자인 캡틴 크런치를 애플사의 기술자로 초빙하여 애플Ⅱ 컴퓨터의 자동다이얼 설계를 맡기게 된다.
좁스는 학교가 파한 뒤 그곳 큰 전자회사인 휴렛 패커드사의 강의를 들었는데 하루는 사장인 윌리엄 패커드를 찾아가서 자기가 만들고 있는 기계에 필요한 장비를 줄 수 없겠느냐고 간청했다. 패커드 사장은 이 대담한 젊은 이에게 호감이 가서 선뜻 그의 청을 들어 주었을 뿐 아니라 여름방학에 일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1972년 좁스는 오레곤주 포틀랜드의 리드대학에 입학했으나 2년뒤에 가족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중퇴하고 인도로 히피여행을 떠난다. 한편 대학 입학 예비시험에서 수학에 최고 점수를 땄던 워즈니액은 당초 콜로라도대학에 진학했으나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으로 옮겼다. 허나 어느 대학에서도 학교생활에 적응 하지 못한 워즈니액은 버클리를 중퇴하고 휴렛 패커드사의 설계사로 취직했다. 인도에서 돌아온 좁스도 비디오게임 메이커로 이름난 아타리사에 취직하여 두사람은 다시 함께 실리콘 밸리에서 어울리면서 컴퓨터에 미치게 된다.
애플Ⅰ이 나오기까지
1976년초 알테어 8800 마이크로컴퓨터 시스팀이 처음으로 선을 보였을 때 좁스와 워즈니액은 갖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으나 한대 3천달러나 하는 것을 살형편이 못되었다. 그래서 자기들의 손으로 컴퓨터를 설계해 보기로 했다. 두 사람은 각각 근무하던 회사에서 몇가지의 전자 회로 부품을 조달한 뒤 심장부가 될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컴퓨터 쇼에서 싸게 입수할 수 있었다. 설계의 천재인 워즈니액은 마침내 휴대용 타이프라이터 보다는 작으나 큰 컴퓨터의 성능과 맞먹는 최초의 퍼스털 컴퓨터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애플 Ⅰ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컴퓨터는 스탠퍼드대학구내에서 열린 컴퓨터 애호가의 모임인 '홈 부류 컴퓨터 클럽'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애픔 Ⅰ은 커다란 반응을 일으켰다. 2백여명의 회원들은 너도나도 이 컴퓨터를 갖고 싶어 했다. 이들의 간청에 못이겨 두사람은 애플 Ⅰ 만들기에 주말도 없었고 밤잠도 제대로 잘 수 없게 되었다. 부품을 사들일 자금으로 좁스는 자가용인 폴크스바겐을 팔았고 워즈니액은 휴렛 패커드사제의 과학계산기 한대를 팔아 간신히 1천3백달러를 마련했다. 기술의 천재인 워즈니액은 컴퓨터 만드는 데만 취미가 있었으나 좁스는 벌써 퍼스널 컴퓨터의 상업성을 내다보고 있었다. 1백대의 컴퓨터를 만들어 한대에 50달러를 받으면 원가 25달러를 빼고 2천5백달러가 남는다는 계산이었다. 그 돈으로 팔아버린 폴크스바겐과 계산기를 다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애플 Ⅰ이 컴퓨터 애호가들의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게 되자 이들은 내친 김에 이 컴퓨터를 양산하여 돈을 벌겠다는 구상을 하게 된다. 이들은 애플Ⅰ을 처음 조립하는데 둘이서 60시간이 걸렸으나 친구가 설계해준 프린트회로판의 덕으로 한대 조립에 6시간이면 충분했다. 입심이 좋고 거침없는 도전적인 성격의 조브즈는 이때부터 사업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컴퓨터 부품상과 신용거래를 튼 것이다. 이들은 외상으로 가져온 부품으로 좁스의 양친의 차고속에서 컴퓨터조립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뒤 차고는 컴퓨터로 가득 차버렸다. 기업의 확장이 필요한 단계에 왔으나 이들에게는 자금이 없었다. 이들은 당시 근무하던 이타리사와 휴렛 패커드사에 이 신제품의 생산을 권했으나 두 기업이 모두 시장의 장래성이 없다고 거절했다.
1976년 가을 좁스는 마침내 자기들의 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워즈니액은 한사코 반대했다. 그는 친구들을 위해 컴퓨터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그치자고 했다. 좁스는 워즈니액의 부모와 친척에게 부탁하여 워즈니액이 기업창설에 동의하도록 압력을 넣어달라고 했다. 한편 아타리사의 상관인 '노란 부쉬넬'과 거래선인 PR사의 '레지스매켄너'에게 자금조달을 의뢰했다. 그러던 어느날 차고에서 컴퓨터조립에 몰두하고 있던 두 젊은이에게 번쩍이는 벤츠차를 몰고 신사 한사람이 찾아 왔다. 그는 실리콘밸리에서도 이름난 벤처캐피털리스트(위험투자가)인 '돈 발렌타인'이었다. 그는 부쉬넬과 매켄너의 부탁을 받고 자금조달이 필요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를 맞은 좁스의 몰골을 보고 질겁을 했고 아무렇게나 싹뚝 자른 바지를 입고 샌달을 신은 좁스는 어깨까지 내려뜨린 장발에다가 콧수염까지 키웠다. 이꼴을 본 발렌타인은 이들에게 출자할 생각이 싹 가셨지만 대신 인텔사를 퇴직한 백만장자 아머스 마큘러를 소개했다.
사과를 많이 먹어서
'마큘러'는 이들에게 25만달러를 출자하고 별도로 모험자본에서 60만달러를 조달하는 한편 인텔사의 마케팅부장으로 쌓아온 경험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으며 이들은 마큘러를 회장으로 영입하기로 했다. 1977년 초 유한회사 애플컴퓨터는 회장에 마큘러, 부회장에 좁스, 개발담당부사장에 워즈니액 그리고 전문 경영인 마이켈 스코트를 사장으로 하여 출범하게 된다. 회사이름을 애플(사과)이라고 정한 사연은 창립자인 좁스가 인도에서 돌아 왔을 때 적리에 걸려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며 그뒤로는 과일주의자로 전향하여 특히 사과를 많이 먹게 되었다는데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아뭏든 애플사는 첫 작품으로서 컴퓨터계의 신화를 창조한 애플Ⅱ를 내놓는다. 1977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제1회 서해안 컴퓨터전시회에서 첫선을 보인 애플Ⅱ는 참관자들로부터 공전의 인기를 모았다. 애플사 전시부스에 전시된 5대의 이 컴퓨터 앞에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으며 기계를 만져 보고 시험한뒤 모두가 감탄하고 주문하는 것이었다. 그해 9월로 끝나는 애플의 77회계년도의 판매고는 250만달러, 78년에는 1천5백만달러, 79년에는 7천만달러, 80년에는1억1천7백만달러, 81년에는 3억3천5백만달러 그리고 82년에는 무려 5억8천3백만달러로 치솟았으며 종합경제지 '포천'이 선정한 미국의 500대 기업대열에 올라섰다.
애플Ⅱ가 컴퓨터 수요자의 사랑을 독점하게 된 배경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77년이전에는 컴퓨터라고 하면 무겁고 네모진 금속상자로 되어 있어 은근히 공포감마저 자아내게 할 뿐 아니라 복잡하고 쓰기가 매우 어려운 기계의 대명사 같은 것이었다. 애플Ⅱ는 이런 이미지를 깡그리 바꿔버렸다. 기술의 천재인 워즈니액은 매우 세련되고 간편한 구조의 컴퓨터를 설계한 것이다. 애플의 간결한 설계로 프로그램을 작성하거나 하드웨어를 제작하는 일도 매우 간편해졌다. 하드웨어의 무게는 불과 12파운드(약 5.4킬로)였으며 최종조립공정은 10개의 나사만 조이는 것으로 끝났다. 좁스는 아타리사의 그의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사용자에게 친근감을 자아내게 하기 위한 배려에서 케이스는 파스텔조의 아이보리색조로 하고 6색의 무지개 빛을 구사한 사과상표를 키 보드위에 붙였다. 컴퓨터의 알맹이는 워즈니액의 마술같은 솜씨로 간편하게 정리되었다.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소형의 전원장치, CPU(중앙처리장치)와 반도체칩을 포함한 한장의 회로기판 그리고 키보드용의 콘넥터뿐이었다. 그것은 문외한에게 매우 간편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회로기판 위의 하나하나의 부품은 복잡한 설계의 정수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애플Ⅱ가 성공을 거둔 기술적인 비결은 전원장치에 있었다. 좁스는 컴퓨터를 소형화하고 납짝한 케이스에 수용하기 위해서는 두께가 4인치이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76년까지 나온 모든 마이크로 컴퓨터시스팀은 식빵 덩어리크기의 전원변압기방식이었다. 이것은 열을 받기 쉬워 컴퓨터 내부에 냉각용 홴을 부착해야 했으며 컴퓨터 조작중에 소음을 낼 뿐 아니라 그 소리도 귀에 몹시 거슬려 불쾌한 것이었다. 워즈니액과 좁스는 당시 아타리사에 근무하던 로드 홀트라는 엔지니어에게 새로운 전원장치를 개발해 달라고 의뢰했다.
홀트는 일반가정용전원으로 작동하는 스위칭 레귤레이터를 채용하여 발열문제를 해결했다. 이 방법은 초소형회로로써 정확하고 큰 전력의 직류전원장치가 될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새로운 전원장치는 어린이의 과자의 일종인 애니몰 크래커 상자보다 적었기 때문에 좁스가 요구한 규격에도 맞고 더우기 컴퓨터 본체에서 고장이 생기면 자동적으로 스위치가 끊어지게 되어 있어 큰 사고를 막는 역할도 할 수 있었다. 그뒤 홀트는 '애플 펠로우'라는 특별한 칭호를 받으면서 애플사의 연구개발팀의 스타가 된다.
이리하여 1976년이 다 저물어 갈 무렵에는 애플Ⅱ의 모습은 거의 갖추어졌다. 이해 성탄절부터 1주일간 워즈니액은 그의 위대한 기술역량을 발휘하게 된다. 애플Ⅱ의 플롭피 디스크 컨트롤러를 설계했으며 보통 기술자라면 1년이 걸리는 일을 워즈니액은 1주일에 끝내 버린 것이다. 마이크로 컴퓨터 시스팀에 프로그램을 격납하기 위해서 종래에는 카셋 테이프를 사용했기 때문에 속도가 느렸다.
또 종래의 디스크 컨트롤러는 30-60개의 집적회로가 필요했으나 워즈니액은 이것을 8개로 줄이는데 성공했다. 홀트도 워즈니액의 이 디스크 컨트롤러 설계를 보고 최고의 위업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애플은 이로써 세계에서 가장 앞선 플롭피 디스크 구동장치 메이커가 되었다.
워즈니액은 애플Ⅱ의 프린트회로기판 설계에서도 예술가의 진면목을 발휘했다. 프린트회로기판은 전선으로 배선하는 대신 녹색의 플라스틱판위에 가느다란 구리피막선을 에칭배선한 것이다. 반도체칩은 적은 플라스틱 패키지에 넣어서 이 기판위에 접속된다. 그런데 이 기판의 앞뒤면의 배선을 접속하기 위해 피드스류홀(보내기 구멍)이라는 구멍이 있다. 워즈니액은 배선도를 다시 구성하여 종래 50개의 구멍을 3개로 줄이는데 성공했다. 그는 2-3주일은 새벽 2시까지 기판조립에 매달리면서 때로는 기판위에 얼굴을 파묻고 자는 일도 있었다. 그는 자기의 흥미를 끄는 일에는 몇시간이라도 흡사 중독환자처럼 일했다.
그러나 일단 흥미가 사라지면 다시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이런 성미를 잘알고 있는 좁스는 애플Ⅱ를 설계하는 동안 이 괴퍅한 성미의 기술천재를 모시느라고 온갖 정성을 다 할 수 밖에 없었으며 무던히 속도 썩혔다.
애플사가 성공한 배경에는 워즈니액과 좁스의 노력외에도 애플Ⅱ용의 프로그램을 만든 수천명의 프로그래머들의 공도 깔려있다. 1978년으로 접어 들면서 마이크로 컴퓨터 시스팀 애호가들의 시장은 포화점에 도달하자 많은 중소 컴퓨터 메이커들이 도산했다. 그러나 애플Ⅱ는 부기회계용, 워드 프로세싱에서 교육과 그래프작성용에 이르기 까지 온갖 구색의 소프트웨어를 만든 프리랜서 프로그래머들의 덕분으로 경영은 끄떡하지도 않았다. 1983년까지 1만5천종류의 애플용 프로그램이 개발돼었으며 그중에서 95%이상은 독립된 소프투웨어 프로그래머들이 만든 것이었다. 좁스는 처음부터 컴퓨터에서 소프트웨어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궤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컴퓨터경쟁에서 기술개발경쟁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경쟁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가파른 성장궤도를 탄 애플사는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980년 12월 12일 처음으로 주식을 공개했다. 주당 22달러로 4백60만주가 날개 돋힌듯 팔려 애플사는 금방 1억1천만달러의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창업자들 모두 거부가 되었다.
종업원까지 백만장자 돼
좁스는 1억6천5백만달러, 마큘러는 1억5천4백만달러, 워즈니액은 8천8백만달러 그리고 스코트는 6천2백만달러의 부호가 되었다. 1978년 애플주를 주당 9센트로 64만주를 5천7천6백달러로 사들였던 벤처 캐피털리스트 '아더 록'은 3년뒤 1천4백만달러를 거둬 들였다. 주식시장사상 3년만에 243배나 남은 선례가 없다고 해서 록은 또 다른 의미의 전설적인 사람이 되었다. 이 통에 애플사 종업원 가운데서도 3백여명의 백만장자들이 탄생했다.
1981년에는 컴퓨터계의 거인 IBM이 퍼스널 컴퓨터시장에 뛰어 들었다. 워낙 뛰어난 성능을 가진 애플Ⅱ의 덕으로 당분간 IBM보다 훨씬 웃도는 시장점유율을 지켜 나갔다. 그러나 쫓기는 자는 언제나 불안하기 마련이어서 새로운 모델을 서둘러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애플이 81년 중반에 선을 보인 신형기종 애플 Ⅲ는 애플Ⅱ보다 기억용량이 3배나 많고 2개의 화면표시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출하를 너무 서둘렀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여러가지 결함을 드러냈고 마침내 실패작으로 낙인이 찍혀 버렸다. 워즈니액이 설계에 관여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마침 그는 자가용비행기의 추락사고로 일과성 건망증에 걸려 있었을 때였다.
좁스는 그 책임을 물어 스코트사장에게 물러 날 것을 요구했으며 많은 종업원이 해고되었다. 애플Ⅲ사건은 첨단 기술기업이 기술주도형에서 경영관리주도형으로 전환하는 시기와 때를 같이 해서 일어 난 하나의 전형적인 사건이라고 보고있다. 급격한 성장에 미쳐 따르지 못하는 기업의 조직이 빚어낸 결과였던 것이다. 이제 연간 1백만대의 컴퓨터를 출하하는 세계적인 컴퓨터 메이커로 성장한 애플사는 전문 경영인이 아니면 운영하기 어려운 규모로 커진 것이다.
애플사는 1983년 전 펩시콜라 사장이었으며 치밀한 경영전문가인 '존 스컬리'를 사장을 영입했다. 1985년 좁스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결국 애플사와 인연을 끊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제 세계적인 컴퓨터기업으로 성장한 애플사는 창의적이며 변덕스럽고 방만한 좁스의 경영방식보다는 냉정하고 규율적이며 질서있는 경영방식이 요청되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 것이다.
좁스는 애플사에서 그와 뜻이 맞는 10여명의 핵심요원을 끌어 내어 '넥스트'라는 이름의 새로운 컴퓨터기업을 차리고 주로 대학교육용의 사고 성능이 좋은 미니컴퓨터 생산에 나섰다. 차고에서 출발하여 연간 수십억달러의 매출고를 올리는 대기업을 만든 경험을 가진 좁스는 아직도 30대초반의 나이에 상당한 재력(애플사의 소유주)를 갖고 있어 '애플의 기적'을 재현할 수 있다고 자신이 만만하다.
한편 학업을 마치기 위해 버클리의 캘리포니어대학으로 돌아갔던 다른 한사람의 애플사 창업자 워즈니액은 'CL9'이라는 새로운 기업을 차리고 타고난 천재적인 솜씨를 발휘하여 적외선 증폭기를 이용한 기발한 원격조종장치를 개발했다. 본시 돈에는 관심이 없는 워즈니액은 그의 애플사의 주식도 이혼한 처를 비롯하여 그녀의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나눠주어 모두를 천만장자와 백만장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실리콘 밸리의 신화'를 창조했던 두 컴퓨터광의 신나는 이야기는 꿈에 부픈 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언제나 뛰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