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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버트 센트-죠르지 생명현상의 가장 광범한 연구자

"생명은 신비한 추진력을 갖고 있다. 언젠가는 물리·화학적으로 그 신비가 모두 밝혀질 것이다"

작년 가을, 미국 메사추세츠주의 대서양을 낀 한적한 동네 '우즈 홀'에서 수천마리 갈매기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94세의 노 과학자 한사람이 파란 많던 생애를 마쳤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과학의 여러 분야를 고루 섭렵했을 뿐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많은 역경을 이겨내면서 숨을 거둘 때까지 70여년을 정력적으로 과학 연구에만 몰두한 노벨수상 과학자로서 오래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방황의 시절

'알버트 센트-죠르지'는 1893년 9월 16일 헝거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4대째 과학자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과학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수 없었다. 특히 유명한 해부학자인 그의 숙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부다페스트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해부학자로서 과학자의 길을 출발하게 된다.

그러나 해부학은 죽은 자료만을 다루고 있어 곧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자 살아있는 생명과학에 눈을 돌렸다. 당시의 생명과학은 대체로 3가지 분야로 나눠 있었다. 하나는 토끼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생리학이며 또 하나는 인간을 다루는 의학이었다. 다른 하나는 원생동물이나 거미를 가지고 하는 동물학이었다. 센트-죠르지는 해부학보다 활기 있는 분야를 찾으려고 토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본시 단순한 마음을 가진 그는 토끼는 너무 복잡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이밖에도 생리학연구에서 눈을 돌리게 된 이유를 "토끼는 발길 질을 하고 깨물고 해서" 라고 말하고 있다. 아뭏든 그는 궁리끝에 이번에는 약학쪽으로 방향을 전환해 볼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순한 것을 찾던 그는 약이라는 것은 매우 단순할 것이라고 보았던 곳이다. 그러나 곧 약은 비록 단순하다고 해도 토끼에게 실험을 시켜야 하며 따라서 토끼를 알지 못하면 약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결국 세균연구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균은 아주 작은 것이어서 필경 간단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떄문이다. 그러나 세균학도 깊이 들어가면서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세균보다 더 간단한 것은 없을까?" 하는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로 분자라는 생각에 미치게 되어 화학자로 전환한다. 단순한 것을 찾는 센트-죠르지의 집념은 마침내 전자와 양자역학 분야까지 관심을 돌리게 된다.

이렇게 다양한 학문적인 섭력을 하는 가운데 그는 노벨의학상(1937)의 대상연구에 손을 대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헝가리는 세계 제1차세계대전에서 독일 편을 들었기 때문에 전쟁에 패하자 헝가리 사람들의 주거지는 제한 되었고 독일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세균학자로서 함부르크에 있는 기술의학연구소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열린 네덜란드의 한 생리학회의에서 소개를 받은 네덜란드 라이든 대학의 교수와 인연을 맺게 되어 네덜란드로 가게 된다. 센트-죠르지는 라이든대학에서 낮에는 약학을 공부하는 한편 밤에는 화학과 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훌륭한 화학자들이 많았던 라이든은 그의 화학공부에 매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그곳을 떠나야 할 사정이 생겼다. 그의 부인은 젊고 매우 아름다왔는데 그를 네덜란드로 초청해 주었던 젊은 교수가 그의 부인을 열렬하게 사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센트-죠르지는 이런 눈치를 채리자 서둘러 부인과 함께 그곳을 떠나 '그로닝겐'으로 옮겼다. 그의 생각은 그곳에서 네덜란드의 의사자격증을 얻어 멀리 네덜란드령 인도제도(오늘날의 인도네시아)로 떠나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실력은 미치지 못해 의사시험에 낙방했으며 돈도 떨어져버려 오갈데가 없게 되었다. 마친 이때 그로니겐대학의 생리학교수인 '함부르거'가 개의 복잡한 수술을 의뢰했다. 해부학을 전공했던 그는 개 수술을 거뜬히 해내서 개를 살려냈을 뿐 아니라 그덕에 일자리까지 얻게 된 것이다.

의사자격증을 따지 못한 센트 죠르지는 아내까지 잃을 지경에 빠졌다. 그럴 때 개의 수술을 거뜬히 해내 일자리를 얻게됐고 이것이 그의 생애의 전기가 되었다.


절망상태에서 구원받다.

그는 함부르거교수에게서 생화학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그가 첫번째 논문을 완성하자 얼마뒤에 함부르거교수는 별세해 버렸다. 새로 부임한 교수는 동물심리학에 심취해서 생화학을 전공한 사람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다시 일자리를 잃은 그는 실망 끝에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아내와 아이를 처가로 돌려 보내고 인생과 과학을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하직하기전에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 무렵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는 국제생리학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그는 이 회의에서 많은 참석자들틈에 끼어 당대의 위대한 생화학자인 영국의 홉킨스경(Frederick Gowland Hopkins, 1861-1947)의 특강을 듣고 있었다. 홉킨스경은 신장촉진 비타민의 발견으로 노벨생리의학상(1929년도)을 받은 생화학계의 태두였다. 그런데 그의 발표를 듣고 있던 센트-죠르지는 자기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깜짝 놀랐다. 홉킨스경은 특강을 마칠때까지 센트-죠르지의 이름을 몇번이나 비치면서 그의 연구에 언급했던 것이다.

그는 갑자기 용솟음치듯 용기가 났다. 그래서 강연이 끝난 뒤 그 위대한 과학자를 찾아갔다. 홉킨시는 매우 반가와하면서 처음 만난 이 헝거리태생의 불우한 과학도를 도와 주기로 했다.

"케임브리지대학에 올 생각은 없소?"
"생각은 간절하지만 저의 형편이…"
"내가 돌아가서 장학금을 얻어보겠소."

이리하여 마지막여행으로 작정하고 떠났던 센트-죠르지의 스톡홀름은 그에게 노벨상을 탈 수 있는 생애 최대의 행운의 문을 열어 주게 된다.
케임브리지대학에 자리를 잡은 센트-죠르지는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케임브리지에서의 연구는 네덜란드에서의 연구의 계속이었다. 당초 생명현상에 매료되었던 그는 생명은 본질적으로 에너지의 전달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살아 있는 기계를 움직이는 에너지의 대부분을 공급하는 산화과정에 연구의 촛점을 맞추었다. 본시 색깔을 좋아하는 그는 산화연구를 하면서 색깔에 홀려 버렸다. 그가 이 연구를 시작하면서 던진 질문은 "바나나에 상처를 주면 어째서 색깔이 갈색으로 변하는 것일까?" 라는 것이었다. 그는 곧 바나나에 상처를 줄때까지 본래의 상태로 보존되는 것은 효소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매우 활동적인 이 효소는 그 뒤 바나나속에 있는 무색의 폴리페놀을 유색인 퀴논으로 산화해 버린다. 퀘논은 다시 가죽을 모두질할 때 쓰이는 화학물질과 같은 타닌단백질과 합쳐서 상처를 아물게하면서 세균을 죽인다. 이렇게 단순한 산화에서 시작된 과정이 바나나에게 중요한 생존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는 홉킨스경의 지도로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식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했다. 상처를 주었을 때 까맣게 변하는 것과 색깔이 변치 않는 것이 있다. 그는 이때 "연구란 흡사 사냥개와 함께 산보하는 것과 같다" 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격언을 되새겼다. 까맣게 변한 식물은 상처를 낸 결과 분명히 산화되고 있는 것이며 식물은 그것을 이겨 생존하려고 한다. 그런데 상처가 났는데도 어떤 식물은 색깔이 변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그 까닭을 밝혀내기 위해 과산화제반응이라는 실험을 했다. 식물의 즙을 내서 벤제딘을 섞고 과산화물을 가했더니 곧장 푸른 색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여러가지 식물을 사용하여 여러번 이런 실험을 했다. 그런데 감귤류 식물에 과산화물을 섞었을 때 색깔의 반응을 얻기는 했으나 다른 식물과는 중대한 차이가 발견됐다. 감귤류에서는 과산화물질의 효과가 나타나기 전에 어떤 물질이 나타나지 않게 색의 반응을 늦추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 물질은 바로 비타민 C인 아스코르브산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연구는 노벨상의 반은 탈 수 있는 업적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이 물질의 이름을 붙이는데 많은 곡절이 있었다. 어떤 탄수화물에 이름을 붙일 때는 'ose'라는 접미어를 붙여주면 되지만 센트-죠르지는 그 물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ignose'(모른다는 뜻)라고 불렀다. 이리하여 논문을 <;생화학회지>; 편집인에게 보냈는데 이 편집인은 퍽 외곬수의 위인이었다. 그는 센트-죠르지에게 과학에 대해서는 농을 해서는 안된다고 엄숙하게 꾸짖는다. 그래서 센트-죠르지는 'Godnose'(하느님의 코라는 뜻)라고 붙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으나 그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헥술로닉 산'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권했다. 그러나 뒷날 이것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져 결국 아스코르브 산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생체의 산화작용 연구로 노벨상

한편 노벨상을 타게 된 대상의 나머지 반은 비둘기의 가슴팍의 근육을 사용하는 산화연구였다. 비둘기는 날으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근육속에 있는 강력한 산화의 메카니즘이 요구된다. 그는 실험을 통해서 산화의 기본적인 촉매작용을 하는 것은 숙신산과 시트르산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센트-죠르지는 마침내 <;생물학적 연소에 관한 여러 발견>;에 대한 업덕으로 1937년에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게 된다. 그는 한사람의 과학자로서 누릴 수 있는데 최고의 영예를 얻게 되었다. 헝가리국민들은 자국민으로 처음으로 노벨상을 받은 그를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생명의 현상을 화학적인 측면에서 관찰하는데 성공한 센트-죠르지는 생리학적인 측면의 연구로 전환했다. 언제나 에너지 변환에 흥미를 가졌던 그가 연구의 대상을 근육으로 돌린 이유는 근육이 가장에너지를 맹렬하게 병형시키고 더우기 근육은 작용하는 것을 보기 쉽고 작용에 따르는 화학변화를 얻기 쉬워 일하기 쉽다는 점이었다.

19세기 말 빌리 퀴네라는 생리학자는 근육을 저며서 진한 소금용액속에 넣은 다음 이용액을 희석해서 많은 양의 단백질을 건져 냈는데 이것을 '미오신' 이라고 불렀다. 이 근육속에 있는 단백질은 수축성이 있어야 했으나 그가 추출한 미오신은 그런 기능이 없었다. 센트-죠르지는 매우 조심스럽게 퀴네의 실험을 되풀이했다. 그의 표현을 빌면 토끼의 근육을 잘라낸 것이 아니라 토끼를 근육에서 잘라낸 다음 근육의 교란이 일어나지 않게 아주 부드럽게 다루면서 실험을 계속했다.

이렇게 해서 추출한 물질은 매우 끈적거렸다. 그는 이 물질속에 새로운 것이 들어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조사결과 그속에는 분명히 새로운 단백질이 들어 있었다. 이것을 분리하여 액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액틴은 미오신과 복합체를 만들고 있었는데 이것에 엑토미오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이것으로 인공근육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든 인공근육은 수축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연구실에서 생명을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센트-죠르지는 이 때가 그의 과학자 생활중에서도 가장 흥분된 순간이었다고 실토했다. 그것은 1939년 헝가리 세게트대학에서 근무하던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는 독일의 나치당이 설치기 시작하면서 반 나치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들어나자 연구생활에서 물러나 지하에 숨어야 했다.

대통령추대 사양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헝가리국민들은 부다페스트대학교로 돌아온 센트-죠르지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그는 사양하고 대신 헝가리과학아카데미 총재가 되었다. 전후 헝가리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점차로 커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그는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우즈홀'의 해양생물학연구소 근육연구소장이 되었고 1955년 미국에 귀화해 버렸다.

우즈홀로 자리를 옮긴 이래 그가 주력한 과제는 여전히 생명현상에 관한 것이었으며 노년기에는 암연구에도 몰두했다. 그의 관심은 암세포를 성장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에 있다기 보다는 세포의 증식을 억제하는 힘과 규제가 어디에서 잘못되었는가를 찾아 내자는 것이었다. 그는 암조직이 세포의 성장을 부추기거나 늦추는 물질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물질을 분리하여 순수한 조건에서 재생시켜 그 정체를 밝히고자 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 성분은 특히 황과 수소와 반응을 일으킨다고 알려진 '메틸 글리옥실'의 유도체와 함께 케톤 알데히드와 같다는 것을 밝혀냈다.

70여년간을 줄곧 생명현상연구에만 몰두했던 그는 말년에 가서 생명속에는 생명을 향상시키는 추진력이 내포되었다고 믿기 시작했다. 예컨대 시신경을 자른 뒤 눈알을 돌리면 단절된 신경끝이 다른 한쪽의 신경끝을 찾아내어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생명 그 자체가 생명을 지속시킨다는 주장을 했다. 예컨대 자동차를 너무 많이 사용하면 차는 낡아 버리고 사람의 다리도 허약해 진다. 그러나 많이 걸으면 다리는 더욱 튼튼해진다. 생명이 없는 것은 일을 하면 저절로 낡아버리지만 생명체는 오히려 건장해진다. 그의 이런 주장을 신비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는 언젠가는 이런 신비가 물리학적으로 해명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그는 연구에 관한 구상을 언제 어디서 얻느냐고 물으면 대개 새벽 3시부터 4시사이 침대에서 얻는다고 술회했다. 두뇌는 우리가 모르는동안 무의식적으로 맡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열심히 생각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은 다만 집중적으로 지식을 집어 넣는데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머리는 가만히 내버려 두어야 한다. 고기잡이를 가든지 잠을 자든지하는 동안 머리는 모든 것을 저절로 정리해서 결과를 얻게 된다. 나는 이런 방법으로 큰 문제를 해결했다." 고 그는 말했다.

죽을때까지 계속된 연구
 

책보다는 동료와의 대화에서 더 많은 힌트를 얻었다는 센트 죠르지


물론 머리가 이런 일을 하게 위해서는 많은 정보를 머리속에 주입시켜야 한다. 센트-죠르지의 경우는 책을 통해서 보다는 동료 연구자들의 대화를 통해 더 많은 정보를 얻는 편이었다. 과학자들을 조직적인 사람과 직관적인 사람으로 나눈다면 그는 직관적인 과학자일 것이다.

사실 '직관'이라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센트-죠르지는 그것이 일종의 잠재의식적인 이성이며 다만 그 결과가 의식이 되는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70을 넘기면서 생명체의 발생을 밝히는 새로운 연구에 착수했다. 넉넉히 연구기간을 잡고 종래의 진화론적인 의미에서 생명의 발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속에 생동하는 추진력의 정체를 밝히려고 했던 것이다. 알프렛 노벨이 거액의 돈을 노벨수상자들에게 부상으로 제공하려고 했던 주요한 이유는 그 돈으로 경제적인 걱정을 접어두고 연구에만 몰두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의 뜻과는 달리 수상한 뒤에는 연구에서 손을 떼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센트-죠르지는 수상한 뒤 거의 반세기라는 오랜 세월 동안 정력적으로 연구를 계속해 왔으며 이런 집념은 그의 독특한 직관력과 함께 3백여명에 이르는 자연과학분야의 노벨수상자들중에서도 가장 이색적인 과학자의 한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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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현원복 과학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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