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평범한 사실이 인정되기까지 2천여년의 독선과 과학과의 투쟁이 있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중에, 다음 날 아침 동녁에서 혹시나 해가 뜨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사람은 정신 이상자를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 까닭은 모든 사람이 지동설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시인들은 해가 서산에 지고 어둠이 찾아 오면서부터 태양이 자신들을 미워한 나머지 혹시나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까 하고 마음 조이면서 밤을 지새웠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태양은 어김없이 그 시간에 그곳에서 떠오르고 밝음과 따스함을 주고 식물을 자라게 했다. 다음 날 아침도 그 다음 날 아침도 이런 현상은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인간들은 오랫동안 경험하였다. 따라서 태양은 자신들을 버리지 않고 주기적으로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인다고 믿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이런 신앙은 '솔로몬'시대의 사람들도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구약성서 전도서 1장에는, "해가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간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구약성서 여호수아 10장에는 "태양아 기보온 위에 머물러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약 태양이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것을 믿지 않았다면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일찍부터 태양이 움직이고 지구는 정지하고 있는 것으로 모두가 믿어 왔다. 그리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인 까닭은, 만물은 인간을 위해서 신이 만든 피조물이며 또한 그 피조물의 중심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살고있는 지구는 당연히 우주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여기에 지구 중심설의 최후 근거가 있었다.
고대의 우주관
플라톤의 제자인 '에우독소스'(Eudoxos, 약408~약355 B.C.)는 행성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완전한 원의 위를 운동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스승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에우독소스'는 한개의 행성이 총총히 박혀 있는 천구(天球)의 극은 또 다른 천구에 내접하고 있으며, 다시 또 다른 천구의 극은 또 다른 천구에 내접하는 식의 모양이 거듭되는 우주를 생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동심천구설(同心天球說)이다.
그러나 '에우독소스'의 동심천구설은 우선 행성의 광도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었다. 더우기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한결같이 운동하고 있다는 선입견 때문에 동심천구설은 그 이상 발전하지 못하였고, 계속된 천체관측은 '에우독소스'의 학설의 약점을 한층 더 드러나게 함으로써 또 다른 학설의 출현을 재촉하였다.
그리스 시대의 천문학자인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310~230 B.C.)는 대담하게 태양은 정지해 있고, 지구가 그 주위를 돌고 있다는 이른바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행성 역시 지구처럼 태양의 주위를 회전한다고 했다. 또한 지구는 1년에 한번 공전하고 하루에 한번 자전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이와같은 대담한 이론을 주장하게된 것은 행성의 광도에 변화가 있다는 사실과 지구보다 무거운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하였다('아리스타르코스'는 태양은 지구보다 7배 무겁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아리스타르코스'의 주장은 발전적이었지만 불행히도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고, 오히려 불경죄로 고발당해 결국은 동네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한편 동심천구설의 약점을 보강하기 위한 새로운 학설이 나왔다. 이 학설이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ios, 85~165A.D.)의 주전원설(周転圓說)이다. 그의 우주체계에서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있고, 여러 행성은 그 주위를 돌고 있다. 행성들은 지구로부터의 거리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의 순이다. 그런데 행성들은 단순히 원을 그리면서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 위에서 작은 원을 그리면서 큰 원의 위를 회전한다(그림1). 이로써 동심천구설의 약점인 행성의 광도변화를 설명할 수 있었다.
결국 고대에 있어서 천문학자들이 생각한 우주는 지구 주위에 동심적인 투명한 구체가 겹겹으로 쌓여 있는 모습이었다. 이 지구중심설은 그후 신학과 문학 그리고 철학에까지 깊이 침투하여 당시 지식인의 우주관을 고정시켜 놓았다. 특히 중세 종교사상과 깊이 관련되면서부터 지구 중심설은 더욱 굳어져 버렸다.
'코페르니쿠스'의 망설임
그러나 문예부흥기에 접어들면서 지식인이나 사상가들은 당시까지의 우주관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우주관의 수립을 위해서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흐름을 배경으로 '코페르니쿠스'(Nicholaus Copernicus;1473~1543)는 역사상 유명한 혁명적인 우주관을 수립하여 근대 천문학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저서를 내놓았다. 그의 학설의 중심은, 모든 행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원운동을 하며 하루에 한번 자전하고, 1년에 한번 공전하다는 내용이다(그림2). 그는 이런 내용이 담긴 저서를 출판하기를 약간 주저하였다. 왜냐하면 그 내용 자체가 종래의 학설에 너무 급진적인 도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벗이며 루터파 신부인 '오시안더'(Andreas Osiander;1498~1552)에게 자신이 죽은 뒤 출판해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또 '오시안더' 신부 자신도 그 내용이 너무 혁명적이라 생각하고 그 책의 서문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의 근본적인 원리는 계산상의 편의에서 나온 수학적인 가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종교측과의 충돌을 미연에 막아보려고 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근대 사상가인 '브루노'(Giordano Bruno;1548~1600)는 '오시안더'신부의 서문을 읽고서, 이 서문이야말로 어느 바보가 또 다른 바보들만을 위해서 쓴 것이라고 꼬집어 비난하였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브루노'는 종교 재판을 받고 파문당한 뒤 감금당했다. 그리고 진실에 대한 그의 신념을 취소하거나 변경하라는 종교재판소의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1600년에 그는 처형당하고 말았다.'브루노'는 처형당하는 직전에 "…아마도 신문관 여러분이… 겁에 질려서 나에게 화형을 선고한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비난은 대단하였다. 종교개혁가인 '루터' (Martin Lurther;1483~1546)는 '코페르니쿠스'를가리켜 "천문학 전체를 뒤 엎으려는 바보"라 평하고, "그러나 성서가 증명하는대로 여호수아가 멈추라고 명령했던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케플러'가 밝혀낸 태양계의 공간배치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는 분명히 두 가지 약점이 엿보인다. 한가지는 시종일관 원운동만을 주장한 사실이고, 다른 한가지는 지동설을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연구한 것이 아니라 수학적인 가설로 제출한 사실이다.
그의 첫번째 약점은 '케플러'(Johannes Kepler;1571~1630)에 의해서 수정되었다. 1601년 근대 관측천문학자인 '티코 브라에'(Tycho Brahe;1546~1601)는 사망하기 전 자신이 평생동안 관측하여 얻은 귀중한 많은 자료를 조수인 '케플러'에게 넘겨 주었다. '케플러'는 이 관측자료를 검토하는 도중에 화성의 불규칙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화성의 불규칙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원운동 대신 다른 형태의 운동을 끌어들여야만 했다. 여기서 '케플러'는 원운동 대신 타원운동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케플러'의 제1법칙). 왜냐하면 타원운동은 화성의 불규칙 운동 뿐 아니라 태양계의 모든 별들의 운동까지 잘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처음으로 태양계의 공간적 배치가 밝혀졌고, 천체의 여러 현상을 역학적으로 설명할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것은 또한 근대 초기에 있어서의 과학의 위대한 성과였다.
그런데 '케플러'가 이 같은 위대한 업적을 남기기까지 사용했던 연구 수단은 주로 수학이었다. 이에 반하여 '갈릴레오'(Galilei Galileo;1564~1642)는 망원경을 사용하여 지동설을 실증적으로 연구하였다. 이로써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또 하나의 약점 즉 수학적 가설을 실증적인 차원에서 입증하였다.
망원경의 위력
1609년'갈릴레오'는 먼 곳에 있는 물체가 확대되어 보이는 '망원경'이라는 기기가 네덜란드의 '밋델부르크'의 안경기술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그 사람은 '한스 리퍼세이'(Hans Lippershey;?~1619)인데 1608년 발명특허를 얻었다(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많다). '갈릴레오'도 렌즈를 여러가지로 조합하고 그의 광학적 성질을 연구하여 손수 몇개의 개량된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 망원경은 물체를 눈으로 볼때와 비교해서 약 1천배로 확대 되고 30배 이상 가깝게 보였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사용하여 하늘을 관측하고 새로운 사실을 많이 발견하였다. 당시까지 누구도 보지 못했던 달표면의 언덕과 골짜기를 보았고, 은하수가 수많은 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또 금성이 달처럼 초생달에서 만월로 모양이 바뀌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대한 발견의 하나는 목성의 주위를 4개의 위성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이 위성을 '갈릴레오위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는 17개까지 관측되었다).
이 사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실증적으로 입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다시 말해서 목성 주위의 4개의 위성의 운동은 곧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로서, 말하자면 태양계의 한 축도가 되었다. 그리고 달도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확신도 갖게 되었다.
'갈릴레오'의 역사적 시련
'갈릴레오'는 그의 천문학상의 대부분의 발견을 1610년에 발표하였다. 이런 발견들이 책자로 엮어져 나온 것이 유명한 '성계(星界)의 사자(使者)이다.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는데 효과적이었다. 따라서 교회측은 이에 대하여 강경하게 반발하였다. 그리고 1616년 '태양이 정지해 있고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는 믿음은 틀린 것이다"라는 성명을 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 성명이 있은지 이틀 후에 '갈릴레오'는 추기경회에 소환당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에게 그런 생각을 갖거나 가르치거나 변호하지 않도록 공식적인 경고를 하였고, '갈릴레오'는 이에 따르겠다고 서약했다고 한다. 어쨌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갈릴레오'는 1631년까지 지동설에 대해서 공식적인 발언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1632년 '갈릴레오'는 '천문학대화'라는 저서를 내놓았다. (물론 가톨릭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았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이로써 그는 예수회와 도미니크교단의 승려들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종교재판소는 그 책의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하기 위해서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 위원회는 그의 이론이 틀렸다고 보고했으며, 따라서 '갈릴레오'를 재판소에 출두하도록 했다. 이 때 그는 이미 70세의 병든 몸이었다.
'갈릴레오'는 첫번째 심문에서 '선의(善意)'에서 썼다고 항변했고, 두번째 심문에서 그가 쓴 것을 부인하도록 1단계 고문으로 위협하였다(1단계 고문이란 '데리도 레알리소'라 하여 피의자에게 갖가지 고문도구를 보여주고, 그것이 어떻게 쓰여지며 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갈릴레오'는 자기의 생각이 틀렸음을 선서하고 고백하였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갈릴레오'는 선서를 마치고 일어섰을 때, 양심의 가책을 받아 안절 부절했고 땅을 내려다 보면서 "그래도 역시 그것(지구)은 움직인다."(E pur si muove)라고 중얼거렸다한다(이 말을 실제로 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1980년 11월 10일,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의 위대성은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교회와 성직자들로부터 커다란 박해를 받았음을 우리는 숨길 수 없다"고 말했다. 실로 3백46년만의 교황청의 사과였고, '갈릴레오'에 대한 '지동설 재판'의 과오를 처음으로 시인한 것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길릴레오'의 신념이 비로소 교황청안에서 되살아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