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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 비약적인 기술혁신의 비결은 무엇인가

불과 30년만에 기술도입에서 미래기술개발 단계까지 달려온 일본의 힘과 재능. 일본은 이제 독자의 길을 찾아야 하는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일본에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세계의 1할 국가'라는 말이 있다. 지난 78년 국민총생산이 세계총생산의 10%를 차지하면서 쓰이기 시작한 이 말은 경제력이나 기술력에서 일본이 전세계의 1할을 차지할 정도로 대국이 되었음을 나타낸다. 실상 지난 72년부터 일본은 기술수입국에서 기술수출국으로 탈바꿈했고 81년에는 기술의 수출이 수입을 2.8배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패전의 잿더미속에서도 일부 분야에선 미국을 능가하는 기술강국이 된 비결은 무엇일까. '모방의 천재'라는 시기어린 비난 속에서 세계 최고의 민간기술력 보유국을 건설한 비결을 알아본다.


밀폐형 헤드폰 스테레오 및 최신형 카세트 플레이어
 

상품화기술에 주력

일본의 성공을 이끈 가장 두드러진 요인중의 하나는 민생기술(군사적인 용도가 아닌 소비자를 위한 기술)에 주력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항공·우주기술 등 군사기술에 강한 미국과는 대조적이다. 군사기술은 폭넓은 기초연구가 필요하고 그 산물이 일반적인 용도와는 거리가 멀 정도로 고능성이고 복잡하며 극한적 상태에 적합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일본은 미국의 기초연구를 재빨리 도입해 소비자의 욕구에 맞는 기술로 개량하여 제품을 양산하는데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

미국의 군사기술의 부산물을 도입해 민생기술로 활용한 좋은 예가 카세트 플레이어이다. 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미공군은 미사일과 항공기에 적재된 장치를 움직일 소형모터의 개발에 몰두했다. 결국 67년 사마리움과 코발트의 함금(Sm${Co}_{5}$)으로 된 분말 자석을 발명하는데 성공했다. 일본은 이 기술을 들여와 소형모터를 제작해 세계적인카세트 플레이어 선풍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탄생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이미 30년대부터 미국은 군사적인 목적에서 진공관 대신 반도체를 사용하려는 기초연구를 벨연구소에서 추진했다. 48년에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시범장치가 개발되었으나 군사기밀로서 펜타곤의 엄격한 감시하에 있었다. 당시는 진공관의 전성시대여서 RCA등 미국의 산업계는 이 혁신적 발명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어51년에 개량형인 접합형 트랜지스터가 개발되었고, 이듬해 벨연구소는 국방성을 설득해 기술의 공개를 결정했다.

한편 일본의 동경통신공업(현재의 '소니')은 54년 2만5천달러의 특허료를 지불하고 트랜지스터 기술을 도입했다. 이때 미국의 기업들은 트랜지스터가 민간용으로는 보청기용이 고작이라고 만류하면서 오로지 군사용 트랜지스터 개발에 매진했다고 한다. 결국 1955년 일본은 '값싸고 작으며 성능좋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탄생시켰고 미국시장을 장악했다. 미국전자공업회는 59년 "일제 트랜지스터와 그 응용제품은 미국의 트랜지스터 산업에 위협을 주며 나아가 국방상의 안전을 해친다"며 수입규제를 요청했다. 미국과 일본의 기술마찰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일본이 처음 낸 제품은 진공관 대신 트랜지스터를 썼을 뿐 덩지는 작지않았다. 스피커를 비롯해 모든 부품의 소형화를 위해 모든 부품 메이커들이 소형화 연구에 뛰어들었다. 작은것이 갖는 매력에 끌리는 일본인 고유의 심성과도 맞아 떨어지는 이 소형화붐은 그후의 일본의 기술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원짜리 기술과 억원짜리 기술

민생기술 지향은 '팔리지 않는 기술은 무용지물'이란 사고방식과 함께 소형의 대량생산 기술로의 편향을 낳았다. 이점에서 미국과 일본의 기술은 판이한 성격을 갖는다. 미국이 억원짜리 기술에 강하다면 일본은 만원짜리 기술에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의 통신위성과 일본의 VTR의 예는 그런 양상을 잘 보여준다. 미국은 군사적 의미가 강한 통신위성 기술이 일본에 비할 바없이 앞서지만 VTR에서는 성능과 가격면에서 일본과 상대가 안된다. 물론 미국도 VTR을 개발·생산하고 있지만 말이다. 지난해 일본의 대미 VTR수출액은 30억달러에 이른다. 일본과 무역수지를 맞추려면 미국은 개당 가격이 2억달러가 넘는 통신위성을 매년 10개이상 팔아야 하지만, 일본의 수요량은 4~5년에 1개가 고작이다. 이것이 기술적 측면에서 본 미국과 일본의 구조적 무역불균형의 한 단면이다.


(표1) 기술발전의 5단계
 

실속없는 기초연구 회피

일반적으로 기술은 (표1)과 같은 5단계를 거쳐 발전한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 50년대 중반에 1단계에 접어들었고 그후 매10년마다 1단계씩 뛰어올라 80년대에 들어오면 미래기술에서 국제적인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일본의 중추산업의 변천과정을 보면 50년대에는 조선, 트랜지스터, 나일론순서로 외국의 기술을 도입하여 수출을 주도했고, 60년대에는 철강, 자동차, 탁상용 전자계산기 등의 응용제품이 미국의 틈을 노려 경쟁력을 얻었다. 70년대 중반부터는 자체개발상품이 세계시장을 석권하기 시작하는데, VTR을 필두로 컴퓨터, 산업용 로보트, 반도체 제조장치, X선CT, 레이저 가공기가 주종상품으로 등장했다.

이런 과정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이 기초연구에 매달리지 않고도 상품화기술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지난 82년의 통계로 전체 연구비의 60.1%가 개발연구에 25.9%가 응용연구에 투자되었으나 기초연구를 위한 연구비는 14.1%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이런 성격을 뒷받침해 준다.

일본의 이런 독특한 기술개발전략은, 구미의 과학정책가가 굳게 믿어오던 연구개발론 즉 GNP의 몇 %를 연구개발투자로 돌려 기초과학을 육성하면 그에 따른 기술혁신으로 경제성장이 이룩된다는 논리를 파산시켰다. 일본이 영국과 프랑스의 SST(초음속 여객기 개발)와 같은 거대 연구개발계획이 없이도 결과적으로 보다 큰 경제성장을 이룩했다는 사실은 미국과 유럽의 정책가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자조적으로 일본을 재평가 하지 않을 수 없없다.

"일본은 돈이 많이 들고 그 사회적 환원이 불확실한 거대 기초과학에서 현명하게 도피하여, 기초적 아이디어와 연구 성과를 미국 등 외국에서 빌어와 경제적으로 타산이 맞는 개발에 주력하여 고도성장에 성공했다. 그 비결을 우리도 배워야 한다. "

종신고용제의 위력

일본의 기술력을 지탱하는 힘줄은 다름아닌 연구자들이다. 일본 연구자들의 특징은 한 사람의 천재의 주도하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여러명의 아이디어를 절충하고 타협하는데 능기를 발휘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제품의 세련화가 가능하게 된다. 또 기술의 라이프 사이클을 상정하여 각 단계에 필요한 인원과 조직을 그때마다 투입한다. 이때 일본기업의 종신고용제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하나의 연구가 제품이 될 때까지 일본의 연구자들은 모든 과정에 참여한다. 10년을 넘는 연구개발기간을 통해 같은 연구자가 관여하기 때문에 노하우의 축적과 전달 그리고 연구의 조직적 진전이 원활하다. 보통 기술자들은 하나의 제품이 나오는 것을 자기 자식이 성장해 가는 것으로 비유한다는 것도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60년대 고도성장기에 일본에서는 종신고용제가 경쟁을 유발하지 않다는 인식 아래 '미국을 보자'라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이 오히려 이 제도의 긍정적인 면을 평가하고 있다. 일본의 연구자들이 스스로를 과학기술자에 앞서 종신사원으로 치부하기 때문에 기업목적에 따른 집단연구에도 안심하고 협조적으로 참가한다. 이에 반해 미국의 연구자들은 언제나 기업을 뛰쳐나가 새로운 기업이나 분야를 개척하려 하기 때문에 개인적 업적을 쌓는데 보다 신경을 쓴다. 대표적 예가 미국의 벤처 비지니스이다.

창의력과 기업가 정신을 갖춘 미국의 젊은 연구자들은 벤처 비지니스를 통해 미국의 기술계를 이끌어 나간다. 벨연구소에서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쇼클리'는 1956년 쇼클리 반도체연구소를 설립했다. 여기서 8명이 독립해서' 페어차일드'사를 세웠고 여기서 다시금 독립한 연구자들이 '인텔'사등 10개의 기업을 설립해 실리콘밸리를 형성하고 전자공학혁명을 주도한다. 현재 이러한 벤처 비지니스붐은 생명공학과 퍼스컴을 중심으로 한 전자공학에서 다시금 전개되고 있다.

미국식 연구개발체계의 단점으로 연구성과의 축적이 어렵다는 것을 들 수 있다. RCA의 액정(液晶)연구가 주요 연구자의 사임으로 실패한 예에서 보듯이 연구자의 이탈로 프로젝트가 중단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이에 반하여 최근 일본정부가 야심적으로 추진하는 초LSI연구조합과 제5세대 컴퓨터프로젝트에 각 기업은 최고의 연구자를 아낌없이 파견하고 있다. 언젠가는 유익한 선물을 안고 돌아올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20년만에 세계 제패한 자동차산업

이상에서 살펴본 일본의 기술력의 바탕을 이루는 요인들이, 한 나라의 공업력을 재는 척도라고 하는 자동차산업에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알아보자.
일본은 1957년 도요다 자동차를 미국에 처음 수출했다. 결과는 고전의 연속이었다. 아직 고속도로가 없던 일본은 시속 1백km이상의 주행은 상상도 못했고 차체가 무거워 종종 과열현상을 일으켰다. 60년에 수출은 중단되었다.그후 코로나, 블루버드, 퍼브리카 등의 소형차개발에 주력하여 64년에는 어느 정도 국제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매년 1천1백만대의 자동차를 생산해 생산량 세계제일을 자랑하는 일본의 자동차산업이 미국을 능가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79년. 부품 하나하나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 고장이 적고, 차체와 엔진이 가벼워 경제적이며, 가격에 비해 내장품이 충실한 편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미국의 자동차기술을 능가하게 된 가장 주요한 요인은 전자공학의 도입이다. 마이크로컴퓨터를 채용하여 연비(燃費)의 향상, 배기개스의 청정화, 코너링때의 요동방지, 급발진과 급브레이크때의 충격감소에 이용할 뿐 아니라 신형차의 경우에는 졸음운전 경보, 차고(車高)의 자동조절, 칼라TV 모니터를 사용한 도로안내장치 등 다양한 기능을 시도하고 있다. 전자공학적 필요에 따라 자동차 메이커들은 자동차용 LSI개발과 제조에 나서고 있을 정도이다.

타이어의 경우 프랑스의 '미슐린'사에서 도입한 기술을 개량해 개발한 '스틸래디알'타이어는 평균 내구성이 거리 4만km, 시간46개월로서 미국에 앞선다. 일본 타이어산업이 세계적 수준에 오른 비결은 세계의 여러가지 기후와 도로사정에 맞는 다양한 제품의 생산능력을 갖춘 것이다.

약 3만개에 달하는 자동차 부품의 제조도 자동화와 함께 다품종 소량생산을 하고 있다. 일본의 장인적 기술력과 경쟁력을 살린것이다.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빠른 속도로 기술을 발전시키는 일본 기술의 특징은 베어링산업에서 잘 나타난다. 회전의 원동력이 되는 베어링의 목표는 완전한 구형에 도달하는 것. 집요한 추구 끝에 현재 1백m에 대해 수mm의 요철이 있을 정도까지 정밀도를 달성했다.

전쟁이 남긴 유산

일본이 상품화기술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한 데는 기술적 측면 말고 역사적사회적인 제반 여건도 큰 역할을 했다. 우선 간과할 수 없는 것이 2차대전 이전의 기술축적과 연구자이다. 전쟁당시 일본의 일부기술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주력기였던 제로전투기는 한 대씩 공예품과 같이 만들어졌지만 양산기술이 없었고 품질관리가 엉망이었다. 1백기중 80기는 항상 수리공장에 있을 정도였다. 이에 맞설 미군전투기는 대량생산이 가능했고 가동률도 높아 1백기중 80기는 항상 출격 가능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군함제조기술은 전후의 조선공업에, 전자와 광학무기 기술은 카메라와 라디오산업에 그리고 군용기 기술은 자동차와 신간선에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전후 미군의 점령시 최대의 유산은 대학의 개혁이었다. 미국은 당시의 일본 고등교육제도를 미국식의 대학·대학원제로 고침으로써 대학의 규모를 전쟁전에 비해 일거에 10배이상으로 확대시켰다. 이로써 일본은 유럽이 60년대에 겪은 고등교육인력을 양적으로 확대시키는데 따른 제도적 제약을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자체의 기술잠재력을 종종 후지산에 비유한다. 정상에 있는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거대한 산의 몸체에 해당하는 조립과 전문적 특수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세계 최고수준의 제품을 낸다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훌륭한 주변기술이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초고밀도 집적회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실리콘 원판을 비롯해 진공장치, 클린룸, 광학기술, 완제품검사 시스템에 모두 최고 수준의 관련기술이 필요하다.

이렇게 기술잠재력을 쌓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이 '현장우선주의'이다. 일본에는 대졸기술자가 생산현장에서 손에 기름칠을 하며 일하는 전통이 있다. 따라서 생산현장에는 가장 우수한 기술자가 대량 투입되게 된다. 이에 비해 영국과 같은 경우는 우수한 사람은 대개 과학자의 길을 택하고, 기술자라도 재능을 인정받으면 곧 생산현장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술적향상에 기여한 또 다른 요인은 치열한 기업간의 경쟁이다. 유럽에서는 예컨대 전기회사라면 '지멘스'등 한나라에 간판격인 한 기업이 있는 형태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어떤 제품이 많이 팔릴 것같다면 너도나도 달라붙어 같은 제품을 10개회사고 20개회사가 맹렬히 경쟁하여 신제품을 개발하고 가격을 떨어뜨려 수출공세를 편다. 산업용 로보토 시장에 2백50사, 퍼스컴 시장에 20사가 넘는 기업이 참여하고 있는 것은 그 한 예이다. 여기서 제품기술 진보의 페이스 차이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과당경쟁은 기술발전에 오히려 득이 되는 측면이 크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기술혁신에서는 새로운 기술의 탄생보다도 원가하락과 응용제품개발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LSI, 컴퓨터 등의 성능당 원가가 5년에 10분의 1로 10년에 1백분의 1로 떨어진 것은 기술혁신의 최대의 산물이자 원동력이 되었다.


히다치가 개발한 컴퓨터제어 자동 야채재배 시스템.
 

창조적 기술의 희구

미국과 어깨를 견줄만한 기술력을 보유한 일본의 급격한 성장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세계 1할국가''첨단기술 1등국'이라는 자부심 이면에 서서히 기술일본의 미래를 우려하는 '창조성 논의'가 나오고 있다.

'이제는 독창적인 자체기술을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활발히 나오고 있는 배경에는 우선 일본이 산업기술의 연구개발에서는 세계 최전선에 도달해 더이상 미국으로 부터의 기술이전을 바랄 것이 없다는 인식이 있다. 비슷한 인식은 60년대 후반 미국의 아폴로계획 성공 등 미국의 기술력에 대한 위협의식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즉 한편에서는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원자력, 우주개발, 항공, 컴퓨터 등을 해야 한다"는 '필수과목론'이 나왔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것들은 굳이 일본이 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미국이 연구하지 않는 틈을 비집고 집중공략해야 한다. "는 '틈바구니론'이 나왔다.

그러나 그런 논의는 70년대의 고도성장의 단꿈속에서 잊혀져 오다가 최근 다시 자체기술개발론으로 등장한 것이다. 즉 이제까지는 마라톤의 선두주자격인 미국의 한 발짝 뒤를 쫓았기 때무에 바람의 저항도 없고 힘도 덜 들며 페이스의 조절도 쉬웠는데, 이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해 선두를 다투는 입장에서는 스스로 진로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일본의 과학기술청과 통산성은 80년부터 '과학기술입국'의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이때 기술전쟁의 가상적국은 어디까지나 미국이며 유럽제국과 신흥공업국은 전혀 안중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들 수 있는 배경은 빈번해지는 구미제국과의 무역·기술마찰이다. 추격형의 일본식 기술개발에 역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80년 오일쇼크 이후 일제자동차가 미국 소형차 시장을 석권한 이후 미국에서는 일본의 기술에 대한 경계의 소리가 거세지기 시작했고 일본의 '기술 무임승차'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표면화되었다. 미국의 산업계에서는 1957년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로 촉발된 '스푸트닉 쇼크'를, 일본을 가상적으로 재현시켜 보다 많은 연구개발비를 끌어내려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학계에서는 일본의 과학기술수준 자체를 그다지 높이 평가하고 있지는 않다.

미국의 기술금수조치(技術禁輸措置)도 일본의 창조성 희구를 부추긴 원인이 되었다. 미국이 기술단속을 강화하게 된 원인은 첨단기술이 군사기술과 밀접히 관련돼 있으며 또한 세계최강의 국방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첨단과학에 있어서도 다른나라에 비해 우위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술대국의 고민

지난 83년 일본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광일렉트로닉스와 밀리파라는 군사용 범용기술을 제공키로 했다. 이어 85년에는 레이건의 요청에 따라  SDI연구에 참가키로 결정했다. 일본에서는 이런 현상을 보고 일본이 서서히 미국의 군산복합체에 말려들고있지않나 우려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제까지 비군사적 기술개발로 성공을 거둔 일본에게 있어 미국 군사산업과의 관련은 기술 체질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얘기다.

'창조적인 기술풍토를 이루자'는 분위기는 일본 과학기술의 고민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산업계가 '모방을 넘어서 창조'라고 했을 때의 창조성이란 나중에 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한 기초연구를 말하는 것이지 엄밀하게 기초과학의 창조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기초과학의 벽은 여전히 높다. 그런데 이 벽을 넘는데는 '군사화'라는 함정이 있는 것이다.

일본의 산업기술이 당분간 세계의 선두에 서 나갈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기초적인 학문의 발전없이 보다 장기적인 발전을 약속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과 비슷한 기술전략을 가진 한국 등의 신흥공업국이 맹추격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경쟁적인 과학기술에 의한 번영은 불안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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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조홍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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