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공해에 시달려온 온산 공단, 1만여 주민이 고향을 떠난다. 공해병 논쟁의 시말과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던 온산공해의 내막을 추적한다.
"조상의 얼이 스몄고 선조의 묘소가 있는 정든 땅, 대대로 물려받아 가꾸어 온 생활터전이 공장에 의해 모두 깔아 뭉개져 독기서린 농토만 남았고, 그렇게도 깨끗하던 푸른 바다가 공장폐수로 죽어갔어도 우리들은 10여년 가까이 당하고만 있었읍니다. 이제 우리는 기약없는 이주대책을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읍니다."
경남 울주군 온산면의 16개 마을 주민들이 지난 82년 10월 결성한 '온산면 이주 추진 협의회'가 낸 진정서의 한 구절이다. "그 어느 지역에서 자신들의 고향에서 빨리 떠나게 해달라고 조르는 것을 보았냐"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던 온산면 주민들의 바람은 이제 실현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 2월 '울산·온산공단 주민이주대책'의 일환으로 온산면의 16개 마을의 공해피해 주민을 이주시키로 확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주민을 이주시키는 것 만으로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대의 병'이라고 까지 불렸던 '온산병'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이주 후의 온산공단의 미래를 우리는 아직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온산의 공해문제가 세인의 비상한 관심 속에서 큰 사회문제로 대두된지 만 1년이 지났다. 삶의 터전을 떠나가는 온산주민의 애환은 차치하고라도 온산문제는 돈으로 따져도 4백 26억원(이주 보상비 총액)의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온산문제를 되새겨 보고자 함은 이런 값비싼 대가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하는 이유에서다.
"아이들 만은 좀 살려 주이소"
지난해 1월 18일 "온산공단 일대의 주민 5백여명이 중금속 카드뮴의 체내 축적으로 발생되는 비참한 공해병인 '이타이 이타이'병의 초기증세와 비슷한 병을 앓고 있다"는 한국 공해문제 연구소(소장 최완택 목사)의 조사결과가 밝혀짐으로써 공해병 논쟁은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1910년부터 발생하여 1백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고통스런 신음소리 그 자체가 이름이 된 이 병이 우리나라에도 발생했을지 모른다는 소식은 국민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타이 이타이 병 사실인가' '서둘러야 할 온산의 괴질조사' '온산공해 없다고 우기면 없어지나' '온산병, 아파요 아파요.'
당시 일간지들의 사설에 나타난 위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온산문제는 긴박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공해문제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온산의 실태에 관심을 쏟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역학조사를 둘러싼 공방
온산공단의 괴질이 공해병은 아니라는 단호한 입장을 지키던 환경청은 여론에 밀려 작년 3월 25일에서 4월 3일까지 열흘 동안 역학조사를 실시했다. 환경청 계획조정국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10명의 학자 연구원 의사를 위원으로 한 역학조사단은 증세호소자 연구에 대한 면접조사와 41문항으로 된 건강 설문 조사표(CMI)의 설문조사를 했다. 또 설문조사에 응한 주민에게 진료권을 발부하여 건강검진을 하였다.
4월 16일 환경청이 발표한 역학조사의 결론은 '온산공단 주민 1만여명 중 통증을 호소하는 1천 2백 29명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이중 3백 74명의 혈액과 오줌을 채취, 카드뮴 납 동 아연 등 4개 중금속의 함유량을 조사한 결과 모두 정상인의 기준치 이내'라는 것이었다. 조사보고서는 또한 피부병 호흡기 및 소화기계 질환 등 환경오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질환도 환경오염과는 무관한 것으로 나타났고 오히려 서산, 춘성 등 다른 농어촌 지역 보다는 병에 걸린 비율이 낮다고 밝혔다.
이 발표에 대해 온산주민들은 그들의 질환이 공해병이 아니라는 역학조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의하고 신경통 피부병이 왜 생겼는지 밝혀줄 것을 촉구했다.
일본의 여러 공해병 시비에서 드러났듯이 공해병 논쟁은 과학논쟁의 양상을 띠게 되면서 장기화 되고 피해주민의 고통이 한없이 연장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최소한의 과학논쟁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온산병'을 최초로 거론했던 한국공해문제 연구소는 환경청의 역학조사 결과를 반박하는 성명(1985.4.26)에서 이 조사를 '공해병 부인을 위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고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공해병은 그 성격상 신종병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를 규명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작업이다. 일본에서도 공해병이 학계에 보고된 후 수백명의 환자들이 수년간 끈질긴 연구와 실험을 통해 실마리를 찾았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누구 하나 온산 현지를 방문하거나 착수한 사람이 없는 실정이다.
당국은 지금까지 숨겨온 모든 자료를 공개하여야 하며 피해주민, 민간단체가 참여하는 역학조사를 공개적으로 다시 해야 한다. 또 민간단체, 학자들이 조사 연구할수 있는 자유분위기를 보장해야 한다."
석연치 않은 결론들
사실 역학조사가 조급하게 그리고 카드뮴 중독에 의한 '이타이 이타이'병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데 급급했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역학조사 결과보고서도 그 신뢰도를 의심케 하는 몇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온산주민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증상을 호소하는가를 알기 위해서 조사단은 "행정조직을 통해 피해부락 주민 중 질환호소자는 전원 조사에 응하도록 사전에 홍보하여"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리하여 온산 인구 9천 8백 44명 가운데 1천 2백 29명이 면접에 응했으므로 질환호소율은 인구 1천명당 1백 25명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이때의 전제는 '사전에 충분히 홍보했으므로 질환호소자는 모두 설문에 응했을 것'이라는 점인데 주민의 말로는 당시 미역 수확기여서 많은 '환자'들이 일터에 나가 면접에 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사에 응한 사람중 무직이 47%, 여자가 65%, 50세 이상이 55%를 차지했음은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건강검진을 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이상이 있는가(유소견율)를 계산하는 데도 같은 방식이 적용됐다. 따라서 여러 사정(생업·등교 등)에 의해 설문조사를 받았지만 진료를 받지 못한 4백 55명은 모두 이상이 없는 것으로 간주됐다. 게다가 온산주민들은 별 성과 없는 조사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지난해 3월 작성된 한 호소문에서도 그런 심정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를 두고 이러쿵 저러쿵 논쟁의 대상으로만 삼지 말라. 우리가 무슨 공해병 연구의 실험동물이냐. 우리는 이미 알고 있고 느끼고 있다."
건강설문조사표에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이 표는 기본조사를 포함하여 안과 피부 호흡기 소화기 순환기 피로감 신경정신 청력계통 등 8개 분야의 41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민들의 주 호소증상인 신경통 또는 근골격계이상에 대한 조사항목은 전혀 없다. 또 조사표의 설문 항목은 신경질 고민 건망증 공포 등 신경정신계통이지만 결과보고서를 분석할 때는 그 항목이 신경통으로 바뀌어져 있어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온산주민이 병에 걸려있는 비율(유병률)이 충남 서산군과 강원 춘성군에 비해 낮다는 것이 역학조사의 주요한 결과의 하나이다. 그러나 순천향 의대가 81년 조사한 서산군의 유소견율과 비교해 볼 때 온산주민의 주호소증상인 신경계·감각기 질환과 근골격계·결합조직 질환의 유소견율은 서산에 비해 각각 3배와 7배나 높다.
또 서울대 보건대학원이 77년 조사한 춘성군 농촌 주민의 상병(常病)양상은 조사방법에 있어 온산과는 판이하다. 즉 조사의 방법이나 투입인력 면에서 국내에서 가장 완벽한 조사라고 일컬어지는 춘성군의 조사는 대상을 무작위로 추출했고 한 사람을 1주 간격으로 3번 조사해서 결과를 얻어냈다. 따라서 여기에는 감기 등의 급성질환과 일시적인 질환도 포함돼 유소견율이 훨씬 높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렇게 볼 때 온산과 춘성의 유병률은 그대로 비교하는 것은 조사의 방법과 내용 면에서 무리라고 할 수 있다.
'온산병'의 정체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역학조사반의 결론은 설득력이 약하다. 때마침 환경청은 공해우심지역인 온산공단의 주민을 이주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공해는 심하지만 공해병은 없고 그렇지만 이주는 시켜야겠다는 모순이 된 온산대책은 '그러면 집단발병의 병인(病因)은 무어냐'라는 의문만 남겨놓은 채 흐지부지되는 듯했다.
그러나 85년 6월 환경청의 용역으로 서울대 환경대학원, 서울대 보건대학원 및 KAIST 해양연구소가 84년 1년 동안 수행한 '울산·온산공단 공해피해주민 이주대책을 위한 조사연구'의 비공개 보고서가 공표됐다. 온산주민 2백 71명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에 따르면 온산공단 주민의 각종 질병 자각증상 호소율이 환경청역학조사단이 얻은 12.5%의 3배가 넘는 47.5%에 달하며 온산주변의 비교지역에 비하면 15.3%나 그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이어서 한국공해문제 연구소는 85년 7월 해안거주 온산주민 5백 9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주민의 33.9%가 중증환자로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동조사에 따르면 전신통증등 주민의 호소가 심한 '온산병' 호소자는 조사대상자 중 4백 65명과 그들의 가족 3백명을 합해 7백 65명에 이르며 발병시기는 공단가동 후 4∼5년이 지난 82∼83년이 가장 많았고 그후에도 계속 발병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통증을 느끼는 부위는 허리와 다리이며 조사 대상자 중 30명은 거동이 불가능하고 1백 71명은 거동은 가능하지만 심한 일이나 운동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청소년층을 포함해서 전 연령층에 걸쳐 호소자가 나타나 '온산병'이 일을 많이 해 나타나는 '농부병'이 아니며 환경청의 역학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조사대상의 80%가 믿지 않고 있음이 드러났다. (표 1)은 여러 기관에서 조사한 온산주민의 질병호소율을 비교한 것이다.
이렇게 조사기관마다 엇갈린 견해를 내놓는 '온산병'의 정체는 무엇일까. 환경청은 정도가 심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온산의 공해는 인정할 수 있어도 공해병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시각에서 '온산병'을 보았다. '온산병'이 공단에 사는 주민의 신경과민(혹은 꾀병)에 의한 것 같다는 행정당국의 주장과 온산주민의 건강상태가 다른 농·어촌 지역민과 대동소이 하거나 오히려 낫다는 역학조사반의 결론은 이런 시각에 바탕을 둔 것이다.
반면에 주민들은 전염병처럼 점점 많은 사람이 앓고 있는 괴질로 공포에 빠져 있다. 그리고 '이타이 이타이'병 만은 아니라는 행정당국의 태도에 분개한다. 이석준(54·이진리 122)씨는 "중금속 중독이 아니라면 다행이다. 그렇지만 공해병임에는 분명하다. 땀을 많이 흘리고 중노동을 하는 여름에 증상은 더 심하다. 무언가 공해의 복합적인 영향이 원인인 것같다."
아뭏든 역학조사의 결과 온산병의 인과관계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다고 해서 당국이 할 일을 다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역학조사는 문제해결의 한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 종합적인 원인규명과 대책이 필요하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 같다.
"이제는 바다가 무서워요"
온산공단의 공해가 심하다는 것은 누구나 느끼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왜 다른 공단과는 달리 유독 온산공단 주변에서 극심한 공해피해가
나타나는지, 어떤 오염물질이 어떤 공장에서 얼마나 배출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종류의 자료는 거의 일반에 공표되지 않기 때문이다.
울산, 여천공단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공해공단으로 꼽히는 온산공단이 산업기지개발구역으로 지정된 것은 1974년 4월이었다. 그러나 다른 공단과는 달리 온산공단은 일괄적인 공단조성이 되지 않아 공단구역과 가로망만 설정된 채 개별 공장이 자유입주하였다. 따라서 공장은 주민이 거주하지 않은 곳에 우선 입주하게 되어 공장과 공장 사이에 마을이 웅크려 있는 형상이 되었고 공장과 바다 사이에 낀 해안부락은 공단입지에 포함되지 않았다. 공해피해는 이때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비철금속단지'로서 울산공단과의 관련효과를 높이기 위해 건설된 온산공단에는 78년11월 고려아연의 가동을 필두로 현재까지 비철금속·석유정제·화학펄프 업종의 12개 업체가 가동하고 있고 3개 업체가 부지를 조성하고 있다. 가동업체의 생산량과 주요 오염물질 그리고 폐수배출량은 (표 2)와 같다.
비철금속, 화학공업 등 원래 공해산업으로 유명한 업체들이 온산만의 해안선을 끼고 들어서자 평소 8억원의 소득을 이민에게 가져다 주던 공동어장과 양식장은 큰 타격을 받았다. 논과 밭의 작물들도 연간 약 7천1백 t 배출되는 아황산개스와 다른 유독 개스로 인해 하얗게 타죽는 일이 속출했다.
주민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우봉리 이장인 김경옥(57·우봉리 263)씨는 "바람이 없거나 비라도 내리면 동해펄프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 속의 흰가루가 온마을을 뒤덮는다. 이것이 채소에 묻으면 벌레에 뜯긴 것처럼 구멍이 나고 심지어 비닐하우스 속의 채소까지 죽어버린다. 동네 주민들은 구토와 가려움증에 시달리는데 열흘에 3일 정도는 이같은 해를 입는다"고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온산국민학교의 교사는 "학교에 꽃을 심어도 잘 자라지 않고 생명력이 강한 은사시 사철나무 마저도 말라죽어간다"고 안타까와 했다.
바다도 죽어간다. 달포리 앞바다에서 20년째 해녀 생활을 해왔다는 홍(洪)모부인은 "80년 경부터 바다 속에 들어가면 온몸에 반점이 생기고 눈병이 나 이제는 바다가 무서워졌다. 광업제련 근처의 바다 밑에는 동광석 가루가 두텁게 깔려있어 날이 맑아 햇빛이 들어오면 반짝거린다"고 말했다. 당월리에서 어업을 하는 박일동(54·당월리 147)씨는 "비온 다음날 당월리 연안에서 고기를 잡아보면 10마리중 4∼5마리 꼴로 등이 굽었거나 바짝말라 뼈와 껍질만 남은 기형어가 잡힌다"고 증언했다.
온산의 공해피해를 특징짓는 것은 빈발하는 사고이다. 대개 운전자의 실수나 작동잘못, 기술상의 취약성 때문에 일어나는 사고가 77년부터 84년까지 무려 27회나 일어났다.
3천 2백 ppm의 황산동 폐수
1979년 12월 4일 온산동제련(현재의 한국광업제련)이 보수작업의 미비와 운전자의 실수로 황산동 전해액을 누출하여 인근 해역의 거의 모든 수산물이 멸한 사고가 벌어졌다. 사고 다음날 누출된 폐수가 바다로 흐른 대정천의 수질을 검사한 결과 구리의 농도는 3천 2백 ppm에 달했으며 pH는 1∼2 정도였다(국립수산진흥원 조사). 수중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구리의 한계농도가 0.01ppm임을 볼 때 인근의 수중생물이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981년 7월 28일에는 제일물산에서 황산개스가 누출돼 인근 화산리, 덕신리 등 5개 마을의 28만여평의 밭작물이 말라죽은 일이 벌어졌다. 1982년 6월 16일에는 온산동제련의 유독개스가 누출돼 목도리 주민 1백 5명이 울산과 온산의 병원에 입원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사고는 중화학공단에서는 언제든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온산공단의 공장들이 오염방지 시설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공단측은 수질오염의 방지를 위해 76억원, 대기오염을 막기 위해 3백 81억원 등 모두 4백 57억원의 막대한 방지시설 투자를 하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제대로 가동되는가에 있다.
주민들은 공장측이 비용절약을 위해 공해방지시설을 정상적으로 가동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서 주민들은 유독 밤에만 마을이 매캐한 냄새와 뿌연 가스로 뒤덮이는 사례와 폐수처리장에 모아두었던 폐수가 비오는 날 방류되어 어패류가 죽는일이 종종 있음을 예로 든다.
공해방지 시설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것보다는 주민들에게 피해보상을 해주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힌다는 이야기도 있다. 84년 1년 동안 울산·온산에 대한 조사를 했던 서울대 환경대학원 등의 최종보고서에서도 "온산공단 입주업체들이 비교적 양호한 공해방지 시설을 갖추고도 실수 또는 고의로 이를 제대로 가동하지 않아 대기와 하천을 오염시켰다"고 결론 내린 바 있다.
과학과 숫자의 마술
많은 연구기관들이 온산의 공해에 대해 전문적인 조사를 실시했다. 그러한 조사결과는 '과학적'인 것으로서 분쟁을 해결하고 대책을 세우는 객관적인 기초자료로 인정된다. 그러나 온산의 경우 연구기관마다 조사결과가 큰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잦고 또한 피해 주민의 호소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표 3)은 여러 연구기관이 서로 다른 시기에 온산 지역의 중금속 오염도를 측정한 것이다.
이 표가 온산근해의 중금속 오염도가 해마다 어떻게 변했는가를 보여준다고 볼 수는 없다. 오염도가 일년 동안 수십배에서 수백배로 바뀔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연구기관에 따라 조사치가 큰 진폭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차이는 대개 시료채취의 장소와 시간 그리고 방법이 다름으로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조사 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온산의 환경에 대한 판단은 '매우 심각하다'에서 '양호한 편이다'로 혹은 그반대로 바뀌게 되어 올바른 대책을 세우는데 혼란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행정부가 환경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독선적(예컨대 가장 비싼 현대적 장비를 갖췄기 때문에 제일 정확하다는 주장)이라고 불신감을 나타내며 행정부는 학자들이 사태를 과장한다고 못마땅해 한다. 이과정에서 가장 큰 좌절감을 맛보는 측은 공해피해 당사자인 주민이다. 그들이 '과학'을 얼마나 불신하는가는 한 호소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잘 알 수있다.
"사람과 장소에 따라 다르고 시기와 시간대에 따라 다르게 나오는 조사결과를 믿을 수가 없으며, 무슨 COD니 BOD니 혹은 ppm이니 하는 도깨비 장난같은 숫자의 마술도 우리는 이미 믿지 않은지가 오래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온산공단의 오염도에 관한 여러가지 통계숫자를 나열하는 것이 온산의 오염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최선의 길은 아닐 것 같다. 오히려 그 지역에 살면서 미묘한 생태계의 변화와 농작물·어산물의 수확량 변동, 건강상태 등을 생활 속에서 감지하는 주민들의 견해와 이를 둘러싼 분쟁 그리고 가해자 측이 과실을 인정해 주는 보상이 공해의 정도를 재는 척도가 될 수가 있다.
15억 7천만원에 이르는 공해피해 보상금
공해로 인한 피해보상은 1977년부터 시작되었다. 피해보상 절차는 80년까지는 공장측과 주민들의 직접적인 협의로, 81년에는 공장과 주민측이 분쟁조정위원회를 설립해 KAIST의 조사자료를 근거로 보상했으며, 82년 부터는 온산공단협회에서 부산수산대학에 조사를 의뢰하여 보상액을 산정하였다.
77년 이후 84년까지 이루어진 공해피해 보상액은 총 27건에 15억 7천 8백여만원에 달한다 (표 4). 울산과 달리 온산의 경우는 수질오염에 의한 수산물 피해의 액수가 크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피해보상 과정이 평화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정부의 집계에 의하면 온산주민의 항의데모는 3백57회에 달했고 총 2만4천9백90명이 여기에 참가했다. 83,84 두 해만 보아도 진정 항의 시위 등 환경분쟁이 60회나 일어났다. 대표적인 분쟁의 예를 들어보자.
79년 12월 5일 8시경 온산동제련의 폐수구에서 담청색 폐수가 대정천으로 유출되는 것을 본 주민들은 공동어장의 피해를 확인하고 폐수를 채취하고 폐사한 어패류의 사진을 찍었다. 이어 12일 국립수산진흥원에 어장피해의 조사를 의뢰한 후 그 결과를 바탕으로 2억 7천여만원의 보상을 청구하게 되었다.
80년 1월 9일 공장 회의실에서 열린 1차 협의는 주민측의 무조건 즉시 보상 요구와 공장측의 수산진흥원 조사보고서에 대한 불신으로 결렬되었고 어민과 해녀 1백50명은 회사 사무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회사측은 3천 3백여만원을 보상금으로 제시하고 울주군의 중재를 요청했으나 울주군은 양자의 요구액이 너무 차이가 커 이를 거부, 다음날 회사측은 보상액을 8천 4백만원으로 상향조정하여 중재를 재요청했다.
1월 27일 상공부 장관이 회사를 방문하여 조속한 타결을 당부했고 3차 협의의 결정에 따라 어민·회사·당국의 3자 공동조사에 착수, 조사결과에 따라 회사측은 6천 2백만원의 보상금액을 제시하였고 울주군은 다른 보상사례에 비추어 어민 청구금액의 40%인 1억 7백 50만원의 수락을 두 당사자에 종용했다.어민은 증액을 요구하며 항의했고 결국 1억 9천만원의 최종보상액이 결정됐다. 사고 발생 2개월 만에 7차의 협의 끝에 보상금 청구사건은 종결되었다.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단순한 환경오염의 차원을 넘어 사회문제로 비화된 온산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당국의 대책은 온산공단 주민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환경오염 저감대책을 실시해 신규업체를 적극 유치한다는 것이다. 단계적으로 실시될 이주는 주민의 의사에 따라 집단이주와 자유이주를 선택할 수 있고 재산상의 손실은 시가에 따라 보상한다고 한다. 이주대상은 이미 자유이주된 3개 마을을 제외한 16개 마을 1만2백90명으로 3단계로 나뉘어 88년까지는 이주가 완료될 예정이다.
1단계로 이주될 이진 대안 당월 목도 방도 등 5개 마을은 이제까지 공해피해도 심했고 인구도 많은 온산면의 대표적인 부락이다. 금년 내에 새로 건설될 이주단지인 덕신으로 가거나 다른 곳으로 자유이주해야 할 이들 마을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보다는 불안감에 싸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을사람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생계문제. 대부분이 어업으로 생계를 꾸려 온 주민들이 내륙지방인 덕신으로 이주하는 것을 불안해 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이주대책을 맡고 있는 온산공단 지원사업소의 한 관계자는 "덕신으로 이주하면 생활이 현재 보다는 나아질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하지만 생계수단으로서는 "아직까지 구체적 대책은 없지만 자신의 능력에 따라 공장에 취직하는 수 밖에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주를 목전에 둔 주민들의 태도는 비관적이다. 20년 넘게 온산에 살면서 '공해박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공해 피해 보상 및 이주추진에 앞장서온 이석준씨(54·이진리 122)씨는 이주를 이렇게 말했다.
"이주를 모두가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선거 때 공약으로 울산시로 옮겨질 것으로 알았지요. 그런데 덕신으로 가라니 의식주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여기 있으면 오염된 물고기라도 먹고 굶어죽지는 않지요. 주민의 70% 정도가 천만원이 안되는 보상금을 받게 될텐데 농협·어협 빚갚으면 덕신에 가서 집짓기는 커녕 택지도 못 삽니다. 말이 많은 달동네가 될겁니다.
온산은 10년 가까이 산업기지 개발구역에 묶여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읍니다. 정책담당자는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덕신에서도 최소한 지금 정도의 생활의 질은 보장돼야 합니다."
주민의 80%가 어업에 종사하는 당월리의 임영복씨도 "이주되면 절반은 거지로 나갈 것"이라고 걱정하면서 "공장이 새로 들어오면 덕신에도 3년 안에 이주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우봉리에서 횟집을 경영한다는 정연수씨도 "두번 다시 지금과 같은 설움을 받을 수는 없다"고 착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같은 마을의 김상식씨는 "곧 헤어질 것이라 그런지 마을 사람들이 길흉사에 상부상조가 없어지고 인간관계가 소원해지고 있다"고 마을 분위기를 전했다.
'온산공단의 전원적 배후도시', 울주군이 1백67억여원을 들여 개발하고 있는 덕신지구의 미래상이다. 지난 78년 울주군에 의해 '덕신지구개발 기본계획'이 세워진 후 인구 3만의 배후도시로 개발될 예정이었던 덕신지구에는 현재까지 상수도시설과 공공건물 및 온산공단 3개사의 사원 아파트가 들어서 있을 뿐이다.
이곳의 지형은 기복이 많은 구릉지로서 협소한 평야와 경사진 산악으로 구성돼 있어 개발 가능한 지역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정지공사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기초공사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금년내로 이주단지가 세워지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 이주대상 주민들의 중론이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덕신지구가 온산공단과는 불과 2㎞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공단의 대기오염으로부터 안심할 수 없는 지리적 위치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특히 동남계절풍이 주로 부는 여름에는 공단의 동쪽에 위치한 덕신이 대기오염의 영향권에 놓일 우려가 크다.
실제로 81년에는 제일물산의 유독개스로 덕신리의 농작물이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으며 KAIST는 82년에 수행한 한 연구에서 덕신을 산성, 산남지역과 함께 대기오염에 의한 주요농작물 피해 예상지역으로 꼽았다. 새로 입주할 업체를 포함하여 온산공단에 완벽한 공해방지대책이 수립되지 않는 한, 덕신지구는 또다른 이주대상지역으로 전락할 지 모른다는 이주민들의 우려가 기우로만은 여겨지지 않는다.
"온산을 버려진 땅으로 만들어선 안된다"
여천공단의 공해로 지도에서 조차 사라진 낙포리, 시멘트 공장의 분진에 쫓겨간 장성의 단광리, 광양제철의 건설과 함께 육지로 변한 섬에서 밀려난 태인도와 금호도의 어민들, 뒤를 이어 온산해안 일대의 주민들도 고향을 버리게 된다.
70년대 중반부터 거세게 인 중화학공업화의 물결로 많은 기름진 농토와 풍요로운 해안이 메말라 갔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농·어촌 마을이 '효율적인 국토개발'의 속죄양이 될 지 모른다.
"온산을 영영 버려진 땅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온산주민의 당부는 지금까지의 국토개발의 손익계산을 다시 하게 한다. 사전대책이 중요하다는 환경관리의 기본적인 원리가 온산에서 처럼 뼈저리게 들어맞는 일은 없을 것이다.
환경청은 온산의 주민이주와 함께 컴퓨터를 이용한 '텔리미터링 시스템'을 도입하고 굴뚝높이를 높이며 폐수의 심해 방류관을 설치하는 등 야심적인 공해저감대책을 세운다고 한다. '공해피해의 첨병'으로서 온산을 지키던 주민이 이주해 나간 뒤 이런 공해대책이 효과를 거두려면 '인간의 얼굴을 한 개발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