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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저의 비극

가장 큰 원인은 돈 때문이었다

연료탱크 폭발로 사고는 생겼다. 그러나 이 사고를 유발한 근본적인 이유는 '보다 적은 돈으로' 우주개발을 하자는 구두쇠작전에 있었다.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세상사라고 흔이 말하지만 지난 1월 29일에 일어난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참사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날 존 F.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대를 떠난 챌린저호가 힘차게 푸른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모습을 보고 있던 현장의 관람자들은 물론 수천만명의 TV 시청자들은 모두가 환호성을 올렸으나 그중 어느 한사람도 발사 74초만에 이 왕복선이 7명의 탑승자들과 함께 16 킬로미터 상공에서 산산조각이 나리라고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더우기 81년4월12일 최초의 우주왕복선 '콜롬비아'호의 발사이래 24회를 내리 단 한번의 인명피해도 없이 성공적인 발사만 보아오던 터에 우주비행을 쇼핑센터로 차를 몰고 가는 정도로 생각하던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에게는 날벼락을 맞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또 미국의 탁월한 과학수준을 우러러 보는 외국인들에게도 이것은 참으로 천만 뜻밖의 일로 비쳐졌다.

 

비극의 씨는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우주왕복선의 구상이 어떻게 설계되었고 어떤 과정을 겪어 오늘에 이르렀는가의 역사를 되돌아 볼때 이런 비극의 씨앗은 어디엔가 자라고 있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8년간 일한 일이 있어 왕복선이 걸어 온 내력을 누구보다도 소상히 아는 '알렉스 롤랜드'박사(듀크대학 교수)는 미국의 우주왕복선을 빗대면서 "미국의 납세자들은 셔틀에 1백40억달러의 내기를 걸고 있다. 미공군은 셔틀의 정찰능력에 내기를 걸고 있다. 우주비행사들은 자기들의 생명에 내기를 걸고 있다. 우리 모두가 모험을 걸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화성착륙계획대신에 셔틀제작


우주왕복선잉태의 역사는 17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9년 미국은 리처드 닉슨을 새로운 대통령으로 맞이 했다. 닉슨대통령은 월남전을 종식시키고 국내의 평온을 되찾는 한편 연방예산을 통제한다는 것이 당면한 과제였다. 그런데 NASA 국장으로 새로 취임한 '토머스 페인'은 아폴로의 달착륙에 이어 다음은 사람을 화성에 착륙시킬 우주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닉슨은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을 천지창조 이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높이 찬양 했을지는 몰라도 당시의 어려운 미국 경제사정에 비추어 그런 거창한 구상에 선뜻 언질을 줄수는 없었다. 닉슨은 '애그뉴'부통령이 위원장으로 있는 우주문제 특별연구그룹에 대해 대안을 제시했다. '페인'을 비롯한 NASA의 유인우주개발의 열렬한 신봉자들은 지구궤도를 도는 유인우주정거장과 이정거장으로 사람과 물자를 왕복시키는 우주왕복선 그리고 우주에 떠있는 물건들을 이동하는 예인선 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화성착륙을 겨누고 있었다.
 

이 계획이 밝혀지자 상 하양원의 일부 의원들은 들고 일어 났다. 이들은 아폴로계획에 써버린 2백50억달러도 지상에서 당면한 여러 사회사업에 썼어야 할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화성계획은 정신나간 관료들의 허무맹랑한 공상이라고 쏘아 붙였다. 미정부내에서도 이런 의견에 동의하는 관리들이 많았다. 닉슨은 이 논쟁에서 슬쩍 빠져버린 뒤 싸움은 부하들에게 일임했다. 대통령의 지원을 잃은 NASA는 재빨리 화성계획을 포기했고 우주정거장계획도 포기했다. 그래서 결국 낙착된 것이 궤도로 화물을 올리는 비용을 2자리수나 절약할 수 있을뿐 아니라 여러번 다시 쓸 수 있는 우주왕복선이었다.
 

종래의 우주발사에서는 매번 비싼 로케트를 사용하기 때문에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예컨대 새턴로케트는 50t 이상의 짐을 우주궤도로 올릴수는 있어도 한대의 값이 1억8천5백만달러나 되었다. 페인과 그의 유인우주개발 신봉자들은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비싼 '1회용 로케트'보다는 여러번 쓸 수 있는 우주기를 택하기로 한 것이다.
 

사람과 화물을 싣고 궤도까지 내왕하는 방법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미국에서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던 방법은 로케트처럼 수직으로 올라가서 비행기처럼 수평으로 되돌아 오는 것이었다. 가장 간단한 것은 1단계의 궤도비행체로서 모든 연료, 엔진 그리고 궤도진입과 지구귀환에 필요한 항공역학적인 특징을 갖춘 차량이었다.
 

그러나 2단계의 완전히 다시 쓸수 있는 셔틀은 회수용 추진체 꼭대기에 우주선을 올려놓되 이 두 구성체는 각각 조종을 할 수 있고 날개가 달린 차량이어야 하며 추진체는 짐을 인력권 탈출속도 근처까지 싣고 간 뒤 다시 지상으로 활공하여 돌아 오게된다.
 

마지막으로 부분적으로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셔틀은 1회용 로케트에다 다시 돌아 올 수 있는 우주선을 태우는 것인데 우주발사를 할 때마다 로케트는 써버리지만 우주선은 회수할 수 있는 것이다. NASA 내부에서는 셔틀을 캐딜럭처럼 호화판으로 만들까 또는 대중용으로 만들까하는 의견으로 분분했다. 어쨌든 규모의 경제를 만족시키고 장차 우주정거장 부품을 나를 수 있는 대형의 셔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유인우주선 신봉자들의 의견이 우세했다.

 

미 공군의 주장으로 셔틀제작


이리하여 70년 페인이 NASA를 떠나기 전에 NASA의 의견은 단순한 우주왕복선이 아니라 '캐딜럭'형 우주 셔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것은 DC-9여객기크기의 완전히 다시 쓸수있는 우주기를 회수용 제1단계위에 올려 발사한다는 것이었다. 이 왕복선은 약 30톤의 짐을 실을 수 있고 직경 4.5m, 길이 18m이며 재래식 활주로에 착륙할 수 있고 2주 내에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1백-1백40억달러의 비용을 들이면 79년대 중반에는 발사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계획은 '월터 데일'을 비롯한 미의원들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밴 알렌과 토머스 골드와 같은 저명한 우주과학자들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2백-2백50억달러나 먹힐 또하나의 '유인 우주광상곡'을 위한 끄나불이라고 쏘아 붙였다. 그런데 의회내의 이런 비판의 소리는 어느새 쑥 들어가고 말았다. 의원들은 저마다 이 셔틀사업을 자기의 선거구나 주로 끌어 가려고 맹렬히 뛰기 시짝한 것이다. 의원들중에 이 사업이 기술적으로 얼마나 복잡하다는 것을 파악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다만 정부돈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잠재력은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기회를 놓친 의회의 비평가들은 할 수 없이 사업비용을 물고 늘어졌다. NASA는 당초의 1백40억달러에서 1백억달러로 사업비를 내렸을 뿐 아니라 발사비가 줄어들기 때문에 이것도 10년에 충분히 상각된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직도 미행정관리예산국(OMB)이라는 장벽이 있었다. 당시 OMB 부국장이던 '캐스퍼 와인버거'(현 국방장관)는 셔틀을 추진하는데는 찬성하면서도 더 싼 모델을 만들기를 바랬다. 71년 중반께 OMB는 NASA에게 셔틀개발기간중 예산은 71년 수준인 31억달러를 넘어설 수 없다고 통고했다. 바꿔 말 해서 대중차 '셰브럴레이'형이라면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에는 미공군이 '셰브럴레이'는 타지않겠다고 거절했다. 당시 셔틀에 대한 공군의 뒷받침은 미 의회와 백악관과 OMB의 승인을 얻는데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보다 앞서 NASA는 공군의 지원을 얻기 위해 셔틀은 30t의 짐을 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궤도로부터도 착륙할 수 있게 우주탄도에서 좌우 어떤방향이든지 1천8백㎞는 마음대로 나를 수 있는 성능까지 갖추게 된다고 말했었다.
 

미공군과 예산당국 사이에 끼어 고민하던 NASA는 프린스턴대학의 경제학자인 '오스카 모겐스턴'에게 빠져 나갈 길을 모색했다. 모겐스턴이 이끄는 자문회사는 NASA가 바라던 대로 이 우주선은 연간 30회이상 비행한다면 자립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OMB와 백악관의 비판론자들은 이 셔틀이 그만한 돈을 들여 만들 가치가 있을까 아직도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71년이 저물때까지 셔틀의 설계에 관한 논난이 계속되었다.

 

NASA가 바라던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가운데 NASA국장 '제임스 플렛쳐'는 와인버거와 OMB국장 '조지 슐츠'(현 미국무장관)와 셔틀을 위해선 결정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이 자리에서 구차한 협상안을 내놓으려던 플렛쳐는 닉슨대통령과 그의 국내 정책보좌관인 '존 엘리크먼'이 다가오는 197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셔틀이 침체한 항공우주계에 새바람을 넣을 것이라는 인식에서 NASA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탑재량을 가지건 상관없이 셔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정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게 된다.
 

결국 결과는 공군을 제외하면 아무도 바라지 않았던 그런 셔틀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의회는 비용의 회수를 바랐고 OMB는 낮은 개발비를 원했으며 공군은 작전능력을 원했으며 NASA는 유인 우주비행의 미래를 내다보았었다. 말대신 낙타를 얻게 된 NASA는 아뭏든 우주의 수송수단은 얻기는 했으나 그것은 이들이 바라던 준마는 못되었다. 플렛쳐는 곧 샌클레멘트로 날아가서 닉슨 대통령의 기자회견에 동석했다. 닉슨은 미국민들에게 셔틀이 "우주수송에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고 플렛쳐는 "70년대말까지 미국은 오늘날의 비용의 일부만 가지고도 사람과 장비를 우주에서 정기적으로 왕내할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셔틀의 개발비는 당초 NASA가 완전 재사용 셔틀용으로 추정하던 개발비의 반인 55억 달러로 책정되었으나 다시 51억5천만 달러로 깎였다. NASA는 이른바 '성공지향운영방법'을 채택했다. 이것은 중간시험을 거치지 않고 만사가 설계대로 잘 되었다고 가정한 뒤 전체 기계의 조립을 마친 다음 시험하는 방법이다. 이런 기법은 아폴로계획에서도 사용해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아폴로의 경우 여유가 워낙 넉넉해서 문제가 생겨도 돈으로 모두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셔틀은 그런 여유가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74-77년간 NASA는 셔틀 자금을 3억달러이상이나 깎였어도 그런대로 그 주름을 살려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정상적인 개발을 막는 장애가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예산을 깎인 NASA로서는 이것이 큰 문제로 번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발사차량의 무게만 늘어 갔다.

 

비상탈출 로케트까지 떼어버려


무슨 수를 써야 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는 우주선에 달린 2개의 비상탈출 로케트를 떼어버려야 했고 따라서 발사하는 동안 우주비행사는 꼼짝없이 발사차량에 묶이게 되었다. 또 보조용 제트엔진과 그 연료탱크도 제거되어 셔틀은 주변비행기능을 잃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하나가 제거되는 가운데 우주선은 본래의 설계에서 자꾸만 멀어져 갔다. 그러나 일반국민과 의회는 이런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1977년 8월 우주선은 보잉 747에 업혀 처녀비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78년이 되자 엔진고장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시작했다. 무거워진 셔틀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엔진은 본래의 설계보다 109%나 더 큰 용량을 발휘해야 했던 것이다.

 

상당한 위험은 예고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종래의 유인우주기는 대기권으로 다시 들어 올때 생기는 문제를 흡열(吸熱) 물질을 사용하여 해결했으나 1백회의 비행을 해야하는 우주왕복선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NASA는 사용할 수 있는 세라믹 타일에 눈을 돌렸다. 3만1천조각의 타일을 주문했다. 문제는 이 절연물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타일을 우주선에 붙이는데 있었다. 하나하나의 타일을 NASA가 설정한 정확한 응력에 맞게 설계하고 제작하고 다듬어서 붙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예컨대 타일간의 간격은 0.06-0.19㎝를 넘어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주비행을 할 최초의 왕복선 콜롬비아호에 타일 붙이는 작업은 한사람이 작업한다면 67만시간이나 걸렸다. 계약사인 로크웰 인터내셔널사가 1979년 3월 콜롬비아호를 '케이프캐나베랄'에 싣고 왔을 때 아직도 1만개의 타일이 덜 붙여 있어 이 회사의 직원 뿐 아니라 임시채용한 대학생, 토마토밭 근로자 심지어는 히피까지 동원하여 한사람이 주당 2개의 타일을 붙이는 꼴로 작업을 했다. 그런데 작업을 마친 뒤 NASA의 타일을 붙인 접착제가 '안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발견하고 2만5천장을 뜯어내어 다시 붙였다.
 

셔틀의 항행 유도 및 제어 책임자였던 케니드 콕스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상당한 위험'을 각오하지 않고는 셔틀비행을 승인할 수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주비행사의 안전은 컴퓨터 모델과 풍동(風洞) 시험결과에 달렸으나 컴퓨터에 입력하는 자료의 신빙성이 높지 않았고 셔틀비행상태를 복제할수 있는 풍동이란 이세상에는 없었다.
 

당시 NASA주변에서는 셔틀을 '날으는 벽돌공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음속의 25배로 비행하는 벽돌공장의 모든 특성을 비행제어시스템에 넣어야 했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리하여 당초 78년 3월 1일로 잡았던 발사일을 넘기고 79년으로 접어들자 미의회는 다시 추궁하기 시작했다. 한때 워싱턴에서는 셔틀 계획을 포기한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이런 가운데 가장 애를 태운 것은 미공군이었다. 공군은 정찰위성발사를 셔틀에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79년 봄 제2차전략무기 제한조약(SALT Ⅱ)을 체결한 '지미 카터'대통령은 이 조약의 실효성에 대해 회의적인 의회에 대해 미국은 소련의 조약준수를 확증할 수 있는 정찰능력이 있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했다. 카터는 돈이야 얼마가 들든 셔틀의 완성을 서둘러야 한다고 밝혔다. 이 프로젝트에 이미 1백억달러를 부어넣었고 더우기 중대한 군사문제까지 얽혀 있었기 때문에 미의회도 카터의 뜻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71년 이래 처음으로 셔틀개발은 비용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되었다. 미국방부가 셔틀개발자금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돈을 부어넣으면서 역시 기대하던 결과가 나타났다. 81년 4월 12일 최초의 셔틀비행이 성공하자 NASA는 왕년의 명성을 되찾았고 비판의 소리는 가라 앉았다. 4번의 성공적인 시험비행을 거친 뒤 82년 11월 11일 최초의 비행을 무사히 마치고 83년과 84년에는 각각 4회 그리고 85년에는 8회의 비행기록을 남겼다. 86년에는 다시 14회의 비행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이번의 참사로 앞으로의 계획은 당장 알 수 없게 되었다.

 

서로 다른 주장들


셔틀의 기록은 이렇게 얽히고 설켰으나 다행이도 그동안 결함은 시정되어 왔고 우주선과 외부탱크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있다. 발사빈도도 정상을 찾기 시작했고 신기술에 따르게 마련인 결함과 고장도 줄어들고 있다. 고장이 있다고 해도 셔틀은 지금까지 비행한 우주선중에서 가장 정교한 것이며 한세대가 앞선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우주선의 주엔진은 최고의 추진력 대(対) 중량비를 자랑하고 있다. 내열장치는 가장 가볍고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셔틀은 위성을 회수하는데도 성공했으며 우주비행사들이 현장에서 위성을 수리하는 발판을 제공하고 있다. 셔틀은 지금까지 비행한 어떤 다른 우주선보다도 더 융통성과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견해도 나왔다.
 

그러나 이런 밝은 평가와는 달리 비판의 소리도 들린다. 그런 비판 가운데는 주엔진이 당초 NASA가 예상한대로 109%의 추진력을 낼 수 없는데다 발사차량의 무게가 늘어나서 탑재량은 예정된 30t 안팎으로 떨어졌다는 것, 셔틀의 재사용 발사빈도는 4개월에서 2개월로 줄어들기는 했어도 당초관획인 2주일은 불가능하다는 것, 발사의 진동은 충격과 예상보다 주엔진에 대해 더 큰 영향을 주어 당초 NASA가 생각했던 50회 발사수명을 단축될 것이라는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 셔틀에서 발사된 일부의 위성들은 우주의 미아가 되거나 엉뚱한 궤도로 들어간 일도 있었다. 한편 운용비용면에서 볼때 셔틀은 실패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당초에 NASA는 1백40억 달러의 개발비는 운용에서 상각하겠다고 약속했고 1회 발사비용은 1천만 달러로 예측했으나 실제로는 매 발사때마다 5천만달러의 국고보조비가 들어간다.(85년의 달러가치로 환산하면 72년의 1천만달러는 2천5백80만 달러가 된다) 그런데 상용베이스로 셔틀을 사용한다면 실제로는 1회발사에 7천1백만 달러는 받아야하는데 NASA가 발사료를 더 올리지 못하는 그만한 딱한 사정이 있다.
 

사고원인의 기술적분석
99.9999%의 확실성이 있을때까지 조사


미·항공우주국(NASA)은 첼린저의 폭발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각분야의 전문가를 동원,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활동을 진행중이다.
 

합동조사단은 사진분석, 기체재료 분석, 발사대검사, 폭발모습을 찍은 영상해석, 관제실과 챌린저 사이의 교신기록 분석, 챌린저에 실은 화물 분석, 기기류조사 등 10개 분야로 구성되었다.
 

조사단은 보고서 제출기한을 정하지않고 확실한 데이타에 기초를 두어 신뢰도높은 조사보고서를 내도록 되어있다.
 

이 조사활동과 함께 챌린저의 기체파편 회수활동도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편 챌린저폭발직후의 제어불능으로 시가지에 돌입할 가능성이 있어 고체연료 1기를 지상에서 지령하여 자폭 시켰다는 사실을 NASA의 J. 무어 비행국장이 밝혔다.
 

또 폭발 직전의 상황을 촬영한 약 15초 간의 컬러비디오테이프와 3장의 컬러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에서는 챌린저 본체에서 보아 우측 고체로케트 아래쪽에서 이상한 불꽃이 분출되고 있음이 확실히 포착되었다. 비디오는 챌린저 발사에 사용된 39B발사대의 북북서 9.4㎞에 있는 제10발사대의 70㎜ 카메라가 촬영한 것이다.
 

공개된 것은 발사후 58.32초에서 폭발 직전의 1분13.47초까지의 15.15초 간의 것이다. 고체로케트는 두개 달려있으며 최초의 사진에서는 우측 고체로케트의 아래 쪽에서 연기같은 것이 유출되고 있는것이 보인다. 이 연기는 다음 59.82초후의 사진에서는 밝은 불꽃으로 변하고, 최후의 사진에서는 큰 불꽃이 되어 로케트바닥의 분사구에서 나오는 본래의 불꽃과 합류하고 있다.
 

이 이상한 불꽃은 외벽에 구멍이 뚫리거나 균열이 생겼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여지며 이 불꽃이 기체의 주 엔진 연료인 액체 수소와 액체 산소를 채워놓은 외부의 액체연료 탱크 폭발을 일으킨 것이라고 풀이되고 있다.
 

지금까지 텔레비젼에서 방영된 비디오 테이프는 챌린저의 좌측에서 촬영한 것이다. 슬로모션으로 비쳐보면 폭발직전에 좌측의 고체로케트와 액체 연료탱크 중간 부위에 작은 불꽃이 생기고 있음이 나타나 고체로케트나 연료 탱크의 어느쪽 인가에 이상이 생겼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번 발표로 우측의 고체 로케트에는 폭발 되기 15초 이전 전부터 이상이 생겨 있었음이 밝혀졌다.


촛점은 고체연료 로케트에


이번 폭발사고의 원인 규명은 합동조사단의 보고를 기다려야 하겠지만 사고원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촛점이 모아지고 있는 고체연료 로케트를 중심으로 스페이스 셔틀이 발사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셔틀은 본체의 주엔진 3개와 외부에서 붙여 놓은 2개의 고체연료 로케트 양쪽에서 추진되면서 발사된다. 주엔진에서 사용하는 액체연료는 2개의 로케트 사이의 탱크에서 파이프를 통해 보내게 되어있다.
 

발사 될때는 처음에 주 엔진에 점화 된다. 약 5,6초 뒤에 2개의 고체연료 로케트도 점화된다. 셔틀은 이런 전체의 추진력으로 상승하는것이나 고체연료 로케트는 약 2분 동안에 모두 연소되어버려 고도 약 47㎞ 정도에서 자동적으로 떨어져 나온다. 이번의 경우는 그 하나가 지상의 조작으로 폭파되었으나 통상으로는 회수하여 다시 사용하기 위해 로케트를 낙하산으로 낙하시킨다.
 

한편 액체연료탱크는 계속 주 엔진에 연료를 공급하다가 발사후 고도 약 1백 80㎞ 정도에서 셔틀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 탱크는 떨어져 나간뒤 대기속에서 불타면서 인도양으로 떨어져 버린다.
 

고체 연료 로케트는 보조 로케트로 직경 약 3.8m, 길이 45.5m다. 분말 알루미늄 연료와 산화제인 과염소산암모니움, 촉매 등을 고분자 화합물로 굳힌 것이 들어있다. 점화후의 추진력의 강도는 고체연료의 연소면적으로 정해진다. 로케트는 회수하여 약 20회 정도 쓸수 있게 설계 되었다.
 

액체 연료 탱크는 직경 8.4m, 길이 47m. 액체 수소 1백t 정도와 액체산소 6백t 정도가 채워져 있다. 이 액체는 파이프를 통해 셔틀 본체로 공급하게 되어있다.
 

챌린저 폭발원인규명에는 컴퓨터의 송신 데이타 분석이 동원되고 있다.
 

스페이스셔틀 챌린저가 발사된후 약74초 뒤의 폭발까지 사이에 무엇이 일어났는가. 폭발 되기까지의 영상은 전 세계에 비쳤지만 영상만으로는 정확한 원인을 알수 없다. 원인 해명을 하는데 중요한 것이 챌린저에서 보낸 텔리 미터링의 데이타이다. NASA는 지금 이것을 면밀히 해석중이다.
 

사고 당일 NASA의 비행 관제관들은 "폭발로 통신이 끊기기까지는 이상을 나타내는 신호를 보내 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것은 관제실의 모니터 수상기에 표시되는 데이타 중 '인간의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스피드의 데이타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사고기에서 송신되는 데이타(다운 링크)는 1천분의 1초 단위로 기록 되어 있다. 이 데이타는 매초 1백 28k 비트(영자 1만 6천자분)이며 그중 엔진관계가 매초 60k비트의 양이다. 챌린저에 어느정도의 센서가 장치되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중요한 부분인 주 엔진이나 궤도우주선의 상태에 대해서는 폭발되는 순간 까지의 데이타를 지상으로 보냈을 것이다.
 

텔리미터링 전문가에 의하면 웬만한 관측위성 발사 로케트라도 약 2백 개소에 센서가 장치되며 1개소당 평균 20분의 1초 마다 측정 데이타를 지상으로 송신한다. NASA의 자료에 의하면 주엔진 체크, 스타트, 비행중의 제어, 정지 등은 2계통의 16비트 컴퓨터(컨트롤러)가 처리한다. 컨트롤러가 판단할 수 있도록 엔진의 중요부분에 감시시스템이 있으며 액체수소나 산소의 압력,온도,엔진의 회전수 등에 대해 1백분의 2초마다 모니터하여 1%의 오차범위에서 엔진을 작동시킨다. 긴급정지는 궤도선의 지령이 있어야 가능하다.
 

고체연료로케트(SRB)는 앞쪽의 점화 장치로 불이 붙으면 내부의 불꽃이 0.15초 동안 넓게 퍼지고 0.5초에서는 출력이 최고에 이른다. 안전을 위해 조작은 거의 컴퓨터화되어 고도,방향 등을 내부에 장치된 자이로로 체크하며 노즐의 방향제어는 궤도선 컴퓨터의 지령으로 자동조정된다. 연료가 다 타고 나면 SRB는 자동적으로 떨어져 나가지만 궤도선에서 선장이 수동으로 이탈작동용 화약에 점화할 수도 있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
 

외부액체연료 탱크에는 38개의 센서가 장치되어 있으며 모든 데이타는 궤도선안의 컴퓨터에 기록되어 지상으로 송신된다.
 

액체산소와 수소탱크의 증기온도, 압력, 액체면의 높이, 액체수소의 소비량, 방출 벌브의 위취 등을 체크하는 센서가 있다.
 

궤도선과 탱크 사이에는 전기신호등을 조작하기 위한 5줄의 케이블이 있으며 SRB에도 연결되어 있다.
 

챌린저의 경우 이런 데이타가 궤도선의 컴퓨터를 경유하여 지상으로 송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에 의하면 센서를 많이 늘리면 케이블 만으로도 상당히 무거워지고 송신되는 정보량도 전파 대역이 한정되어 있어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스페이스셔틀의 경우는 2백∼3백 채널이었다고 해석되고 있다.
 

미국은 사고원인 조사의 결론을 성급하게 서둘지 않고 '안전도 99.9999의 챌린저사고원인을 과학적으로 밝혀내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것은 앞으로 미국뿐만 아니라 각국의 우주개발계획을 위해서도 완수해야하는 의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챌린저호의 분해도^추적카메라에 따르면 오렌지색 화염이 탱크의 표면에 나타난뒤 보다 밝은 불꽃이 탱크와 위성(Orbiter)보였고 그후 수천분의 1초 사이에 불꽃이 커지면서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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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현원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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