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의 연봉에 맨션 아파트와 고급 승용차 제공' 이것은 어느 프로 야구선수의 스카우트 조건이 아니다. 첨단산업의 물결을 타고 절박하게 필요해진 고급두뇌를 불러들이기 위해 모 재벌기업이 내세운 조건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과학기술자들이 점차 나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장보다 몇 배나 많은 월급과 제반 혜택을 주면서 해외에 있는 우수한 과학기술두뇌를 유치해야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런 현상이 기업 뿐만 아니라 국·공립 연구소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유치된 과학기술자들이 과연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고 있을까? 정부가 2천년대의 '기술입국'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그중에서도 고급과학기술인력의 양성을 선결과제로 내세우고 있는 마당이기에 우리의 궁금증은 깊어진다.
앞으로 15년간 3천명 유치
우리나라가 해외의 과학두뇌 유치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된 직후인 1968년 무렵 부터이다. 사실 한국이 부분적으로나마 70년대에 들어와 '역두뇌유출'에 성공하여 제3세계의 시기어린 주목을 받게된 데에는 KIST의 공로가 컸다고 한다. 초대 KIST소장이었던 최형섭전과학기술처 장관은 직접 미국에 건너가 한국인 과학자들의 귀국을 권유하느라 동분서주했고 또한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제1호 이학박사로서 1973년에 귀국한 이태규 박사(현재 KAIST 화학과 명예교수)는 "많은 과학자들이 미국에서의 안정된 연구생활을 떨쳐버리고 조국에 봉사한다는 일념으로 귀국했다"고 당시를 돌이켜 본다.
과기처의 통계에 따르면 1968년부터 1983년 말까지 영구유치된 해외과학기술자의 수는 4백5명이며 일시유치자는 4백32명이다. 이 수자는 한국과학재단의 유치활동을 통한 공식집계이고 개별적인 접촉을 통한 비공식적인 유치자를 합치면 그 수자는 훨씬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인 유치자의 연도별 추이를 보면 영구유치와 일시유치를 합쳐 1981년도 75명, 1982년도 93명 그리고 1983년에는 116명으로 빠른 증가추세를 보인다. 유치기관 별로는 연구기관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대학과 산업체가 그 뒤를 잇는다. 그러나 기업체의 두뇌유치가 주로 개별적인 통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때 기업유치자의 수는 위의 집계치를 훨씬 넘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기업체의 경우 해외고급두뇌의 유치는 기술개발의 활성화에 부응하기 위한 필수요건이기 때문이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가 4백50개 주요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총유치과학기술자의 수는 1983년에 91명, 1984년 136명, 그리고 1985년에는 166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2001년까지 연구원수를 15만명으로 늘리고 그중 10%에 해당하는 1만5천명을 국제수준급의 핵심 과학기술두뇌로 양성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이를 위해 3천명 정도의 해외과학기술두뇌를 유치한다는 것이 과기처의 계획이다. 앞으로 15년간 매년 1백50명의 해외과학기술자를 불러들이는 셈이다.
고급두뇌에 대한 갈증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고급과학기술인력을 '수입'해야만 할까? 이 질문에 대한 인력정책 담당자의 답은 간단하다. 국내의 고급과학기술인력이 양적·질적인 면에서 선진국에 상당히 뒤져 있다는 것. 선진국과 경쟁을 벌이려면 최소한 그들 수준의 연구원수(한국이 1만명당 8명인데 비해 미국이 30명, 일본이 29명)를 확보해야 하고, 질적인 면에서도 조립·가공·보수등의 일반기술 일변도에서 벗어나 기본설계·시스템기술·기반적 연구개발 등 핵심분야의 기술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인력을 육성하려면 교육체계를 정비하고 연구와 산업기술의 기반이 확충되어야 하는등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단기적 수요를 맞추려면 유출된 고급인력을 유치하는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고급인력에 대한 갈증을 가장 심하게 느끼는 것은 기술개발에 사활을 거는 기업체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탐색과 도전, 끊임없는 실험과 끈질긴 집념으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종합하여 기업화하는 과정'으로 풀이되는 기술개발을 할 인력은 국내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형편이다. 전국 경제인 연합회의 조사에 의하면 상장기업의 43%가 연구개발인력의 확보가 심각하거나 많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부족사태의 이면에는 기업체의 연구개발 의욕과잉(?)의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선진국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1980년대에 들어와 기업연구소의 설립은 매년 30~40%의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어 1985년 12월 현재 그 수는 1백81개의 이르고 있고 공동기술개발을 위한 산업기술조합의 수도 23개에 달하고 있다. 이에 비해 기업체의 연구인력 가운데 석사급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은 10%정도(박사급은 1%)에 불과한 형편이다.
바람의 진원지 : 첨단산업
해외두뇌유치의 바람을 일으키는 진원지는 반도체·통신·컴퓨터 등의 첨단산업 분야의 대기업들이다. 오랜 준비기간이 필요한 기술인력 양성에 관심을 두지 않다가 갑자기 첨단분야에 진출한 이들은 치열한 '박사 모셔오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금성·삼성·대우·현대 등 국내의 4대 재벌이 미국 실리콘밸리에 두고 있는 현지법의 주업무는 고급인력을 스카우트하는 일이라고 한다. 대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딴 후 기업체나 연구소에서 5~7년 경험이 있는 사람이 주요 유치대상이 되는데 기업들간의 경쟁도 치열하고 정보가 부족해 적절한 사람을 찾기가 몹시 힘들다고 럭키금성 제1연구단지의 차유배 이사장은 말한다. 결국 유치과학자에 대한 대우는 '인플레'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삼성반도체통신이 현지법인을 통해 스카우트한 반도체 전문가인 이모 박사의 연봉은 22만 달러(약2억원)에 달한다는 것이 주위의 이야기다. 비록 한정된 수자이긴 하지만 내노라는 고급기술인력의 유치에는 이에 유박하는 수준의 연봉과 45평 아파트 그리고 살롱급 승용차의 제공이 필수적이라는 것. 국내의 대학과 국·공립연구소에 유치되는 과학기술자와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의 파격적 대우이다. 현재 금성반도체는 8명, 삼성반도체는 대규모집적회로 설계부에만 4명이 이러한 수준의 과학자를 유치하고 있다.
1만명이 넘는 해외과학두뇌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과학기술자의 수효는 모두 얼마나 될까? 이에 관해서는 공식적인 집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985년 7월까지 재외한국과학기술자협회에 등록된 회원수는 5천5백80명이다. 국가별로는 미국이 4천3백명으로 가장 많고 일본이 5백30명 그리고 유럽이 7백50명 순이다. 그러나 한국과학기술자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교포 과학기술자까지 합치면 그 수는 1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여기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교포2세 과학두뇌다.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재미한국과학기술자협회와 재일과협은 그수가 각각1만명과 4천명에 달할 것으로 어림잡고 있으며 앞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미국의 웬만한 연구소나 대학에 한국과학자가 없는 곳은 없다고 한다. 또한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 1977년 8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던 이휘소 박사(당시 '페르미' 미국립가속기연구소 이론 물리학 부장)는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던 한국인 과학자로 알려졌을 정도이다. 그만큼 한국인 과학자들이 현지에 뿌리를 내렸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국에서 열리는 국내외 한국과학기술자종합학술대회 때마다 참석한 해외두뇌의 한결같은 소감은 "고국에 돌아와서 일하는 것이 최대의 희망"이라는 것. 여건만 맞으면 내나라에 돌아와서 한껏 능력을 떨치고 싶다는 것이다.
귀국하고 싶지만…
해외과학기술두뇌의 귀국동기는 그들의 출신학교 만큼이나 다양하다. 물론 심정적으로는 '애국심' 또는 '조국에 대한 봉사'라는 생각이 바탕을 이루지만 역시 앞으로의 삶에 대한 합리적 판단이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내년3월에 문을 열 포항공대의 교수진을 모집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을 순방한 김 호길 박사에 대한 해외과학자들의 일치된 질문은 "귀국후 안정된 연구생활을 보장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유치과학기술자들이 대우가 나은 기업체 보다는 대학을 선호하는 이유가 '안정성'과 '자율성'이라는 점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미국에서의 연구생활이 모두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다.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1973년에 귀국한 윤창구 박사(KAIST화학공정연구실장)는 "미국에서 크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백인이고 앵글로색슨족이며 프로테스탄트 교도이여야 한다는 엄연한 불문율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한국인들에게는 관습등 문화적인 적응도 장벽으로 작용한다. 직장의 파티에서 미국인 동료들이 아내를 번갈아 포옹하는 것을 보고 홧김에 귀국했다는 농담이 우스개소리만은 아닐것이다. 한국인을 포함한 유색인들이 주로 관리직보다는 기술직에 몰리고 있는 현상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만은 아니겠지만 최근 미국에 유학간 한국학생들이 되돌아오는 율이 일본과 대만에 비해 훨씬 높다고 한다. 미시간대학 근처에 있는 어느 이삿짐센터는 최근 매년 20~30가족씩 귀국하는 한국인 덕분에 톡톡이 재미를 보아 할인혜택까지 주고 있다는 것이 윤박사의 경험담이다.
40대의 교포 과학자들의 고뇌
미국의 기업체에서 오랜 동안의 경험을 쌓더라도 중역이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렵다고 한다. 인간관계의 문제, 언어장애, 생활습관의 차이가 뿌리 깊은 인종차별과 함께 한국 두뇌에게 지워지는 짐이다. 미국에서 나이가 40대에 접어들자 웬지 남의 일을 하고 있는 것같은 허전함을 느끼게 되더라는 한 유치과학자의 말에서, 우리는 잠시 귀국한 과학자마다 "조국이 불러준다면…"하는 상투적인 말이 입에 발린 소리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중견 과학기술자는 선뜻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귀국할 마음을 먹지는 못한다고 한다. 자녀의 교육문제, 또 다시 언어문제(특히 어린 자녀의) 그리고 급격한 생활 방식의 변화에 대한 불안감 등이 이들의 몸을 무겁게 만들기 때문이다. 유치과학기술자들이 귀국을 결정하는 나이가 대부분 30대이고 40대 이후는 드물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관리 경영자의 고충도
유치된 과학기술자는 한국에서의 연구생활에 얼마나 만족할까? 산업체 연구직에 종사하는 유치두뇌를 대상으로 한 '고급과학기술인력의 직무만족에 관한 연구'(정 조영, 1985.5)에 따르면 종사자의 53.5%가 만족 그리고 21.1%가 불만족을 표시했다. 이들은 직무 자체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직무환경에 관련된 일부요인 즉 연구의 행정적 지원과 자율성 보장, 제안에 대한 반영도 등에 부정적 반응이 높았다. 기업체가 상대적으로 단기적 필요에 따라 연구자를 유치한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이들이 연구를 통한 성취감에 만족한다는 점은 수긍할 만하다. 이에 비해 기업체의 경영관리자는 고급두뇌유치와 관련해 상당한 어려움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들 수 있는 것이 유치자들에게 다른 사람에 비해 너무 높은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경제적 부담이다. 또한 많은 경우 유치자는 개별적 계약에 의한 특채의 형식을 취하게 되는데, 이때 비슷한 경력을 갖고 있는 기존의 사원과의 대우차이가 관리자의 고민거리로 닥친다고 한다. 연구프로젝트가 대개 단기적이라는 기업연구의 특성은 또 다른 애로점을 만들어낸다. 관리자로서는 투자에 대한 눈에 보이는 결실이 빨리 나와야 하기 때문에 연구자들의 창의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장기적인 연구프로젝트를 수행할 경우 이 문제는 심각해진다. 산기협의 한 관계자는 "유능한(?) 연구소장은 경영자의 독촉에 대비하기 위해 장기 프로젝트의 추진중 얻어진 중간결과를 보고하지 않고 있다가 독촉이 심해질 때 내놓는 등의 편법을 쓰기도 한다"고 귀뜸한다.
당장의 효과에 대한 요구와 반발
해외 과학기술두뇌 유치의 성패는 그 인력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에 달려있다. 한국과 선진국의 과학기술 수준의 차이는 이 활용도를 높이는데 큰 장애가 되고 있다. 특히 기초과학 분야의 경우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랜 기간의 연구결과가 축적되었기 때문에 한국인이 배워오는 것은 매우 세분화된 것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일반적 기초 없는 특수연구가 얼마나 유용하겠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말하자면 새우의 일반적인 상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마당에 새우더듬이의 역할을 연구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서 기초과학두뇌의 유치가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다. 1981년 서독 '키일'대학에서 귀국한 고 철환 박사(서울대 해양학과 교수)의 지적대로 "정작 문제는 기초과학의 축적 없는 첨단기술 개발이 학문의 균형적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수한 대학원 졸업생에게 유학을 권유할 수 밖에 없는 모순된 상황이 하루속히 개선되어야 한다고 고박사는 주장한다.
선진국에서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에서 20년 후에나 실용화될 기술을 전공한 유치과학자들이 과학기술의 제반 기초적 능력은 뛰어나지만 당장의 효과를 내는데는 의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따라서 이들을 활용하는데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치과학자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은 수 많은 단기프로젝트다. 유치두뇌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기 보다는 기존의 프로젝트에 매몰돼버리기 십상이다. 이름 밝히기를 원하지 않는 한 정부출연연구소의 유치과학자는 이렇게 토로한다. "선임연구원급의 30대 유치자학자들은 창의력이 뛰어나고 풍부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 반면에 40대의 관리자급 연구자(책임연구원)는 대개 요즘과 같은 충실한 기초교육을 받지 못한 편이고 컴퓨터의 구사능력도 떨어진다. 하지만 선임연구원은 연구를 위한 예산과 조직의 결정과정에서 소외된다. 모처럼 유치해온 과학자의 능력을 사장시키지 않으려면 그들의 창의력을 살릴 수 있는 유연한 연구소 운영방식이 꼭필요하다."
역두뇌유출의 전략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보편성을 추구하는 과학과,인간으로서의 과학자가 갖는 실존적 결단이 빚어내는 모순을 표현하는 이 말을 오늘의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은 다시금 새겨보아야 하지 않을까? 과학의 보편성 보다는 과학적 발견의 독점과 그것을 이용한 지배가 횡행하는 작금의 삭막한 세계 경제체제에서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이 냉철한 자기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한두 사람의 의견은 아닐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제3세계 국가들이 '두뇌유출'에 대해서 새로이 갖게된 '전략'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전략의 요지는 두뇌유출을 억지로 막을 것이 아니라(그럴수도 없지만) 계획적으로 적소에 유출시킨 후 다시 불러들이는데 최대의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비록 선진국으로부터 '산업스파이정책'으로 비난받을지도 모르지만, 이 전략은 갈수록 벌어져가는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고 치밀해지기만 하는 기술장벽을 파고드는 유효한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치열한 국제기술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우수한 기술인력의 확보가 선결과제이며, 아직까지도 빈약한 국내의 고급인력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해외에 유출된 고급과학기술자의 유치가 꼭 필요하다는데 학계나 산업계를 막론하고 이의가 없는 듯하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필요한 인력을 효율적으로 유치하고 아울러 애써 불러온 사람들을 잘 활용하는데 관심의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유치과학자 1호 이 태규박사
'녹이 스는' 경우가 없도록
"오랫동안 미국에서 강단에 섰지만 사제간의 각별한 정을 못느꼈지요. 문득 우수한 한국인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듭디다." 올해 83세인 노교수는 혈색좋은 얼굴로 당시를 회상한다. "한국에 돌아와보니 학생들의 질도 좋고 우선 일하는 보람이 있었읍니다."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보를 1919년에 졸업한 이태규 박사가 처음 유학길에 오른 것은 1920년. 최현배, 박 관수씨와 함께 히로시마 고등사범에서 공부한 후 쿄오토 제국대학에서 1931년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곳에서 1743년까지 교편을 잡았다. 해방과 함께 귀국한 이박사는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우선 대한화학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직을 맡아 우리나라 화학 발전의 터전을 마련했다. 국내 최초의 화학박사인 이박사는 아울러 서울대 이공학부장을 지냈고 1946~48년간은 서울대 문리대 학장을 역임했다.
당시의 서울대는 국대안 반대운동의 소용돌이. 이박사는 1948년 미국으로 '도망질'할 것을 결심한다. '유타'대학교에서 그는 연구에 몰두하여 1971년까지는 교수로서 그리고 명예교수로서는 1973년까지 재직했다. 귀국권유를 받은 것은 이때였다. 한국과학원의 설립과 함께 고 박 정희대통령이 친서를 통해 고국을 위해 일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1973년 과학원 교수로 영구귀국한 이 태규박사가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아무리 말려도 우수한 학생이 외국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다.
해외과학두뇌의 유치에 대해서 이박사는 "꼭 해야한다"고 그 필요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실험기자재와 연구비 그리고 연구조수가 부족한 여건에서 외국에서는 곧잘하던 사람이 '녹이 스는' 경우가 많다"고 애석해 한다. "기초과학자를 유치해야 하는데 정부는 이 문제에 너무 무심한 것 같습니다. 노벨상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박사는 또한 정부가 첨단기술이라면 무조건 덤벼드는것 같다고 걱정한다. "정부는 무엇이 기초과학인지 모르는 것 같아요. 물리, 화학, 수학의 육성이 시급합니다."
현재 점성학, 액체이론 그리고 반응이론을 연구하는 이 박사는 매주 세 시간씩의 강의와 실험에도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포항공대학장 김호길 박사
안정된 연구분위기 보장을…
해외과학두뇌의 유치를 위해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유치과학자가 있다. 1986년에 문을 열 포항공과대학의 학장으로 내정된 김호길 박사(52).
"앞으로 5년 이내에 포항공대를 KAIST를 능가하는 연구대학으로 만들겁니다" 이런 야심찬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해 김박사는 지난 9월부터 한달간 미국 등 4개국 해외과학자들을 두루 만나보았다. 이 정묵 박사(미해군 과학기술청), 이 자현박사(NASA연구원) 등 10여명의 중진학자들로부터 교수초빙의 동의를 얻어낸 것이 큰 성과.
경북 안동 출생인 김박사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1962년 영국 '버밍검'대학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동대학에서 입자가속장치와 원자핵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후 20여년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 연구활동에 몰두했다. '로랜스 버클리'연구소와 독일의 '칼스루헤'원자핵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매릴랜드'대학교의 정교수로 재직하는 등 고른 경력을 갖춘 김박사가 귀국을 결정하게된 것은 지난 1983년이다. 럭키금성이 연암공전을 만들면서 학장으로 초빙한 것. 원래는 공과대학으로 신청했지만 문교부의 승인이 나지않았다고 한다. 결국 포항공대의 학장으로 오면서 국제수준의 지방명문대학을 만들겠다는 희망의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교육보다는 연구에 전력할 수 있는 대학원 중심의 대학을 만들고 싶습니다. 건실한 재단과 우수한 교수진이 마련되고 연구성과가 쌓인다면 10년 정도면 일류대학이 됩니다" 과학기술대와 KAIST가 과연 국제적인 수준에 올랐느냐고 반문하면서 김박사는 그의 포부를 밝힌다.
원자핵 물리학과 플라즈마물리학이 전공이고 30여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이 분야의 권위자이지만 현재는 연구할 짬이 없단다 "젊은 후배들의 연구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누군가는 희생을 감수해야 하지 않겠읍니까?" 김박사는 외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안정된 연구분위기를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재삼 강조한다. "해외과학자들이 왜 안돌아 오느냐고 질책하기 앞서 그들이 돌아와서 연구를 계속할 곳이 있는가를 반성해야 합니다."
삼성반도체 박용의 박사
기술적으로 일본과 겨뤄 보고자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에 펼쳐진 30만평의 대단위 반도체 생산공장이 삼성반도체통신 주식회사의 기흥공장이다. 이 공장의 핵심은 반도체연구소의 대규모 집적회로 설계부. 박 용의 박사는 이곳에서 40명의 연구팀을 이끌고 있다. 이 가운데 4명은 박사급 유치과학자. 박 박사가 최근 치열하게 벌어지는 두뇌고급스카우트 열풍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971년 서울공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도미, 버클리대학과 미시간대학에서 각각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구주제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집적회로. 4K D램의 개발부터 시작하여 16K-64K-256K 그리고 현재 열중하고 있는 1M D램의 개발까지 집적회로 외에 한눈을 판 적이 없다. 석사과정을 마친 후 '인텔'사에서 5년간 근무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고 털어놓는다.
"1983년 '벨렙'사로의 입사가 확정되었을 때 삼성에서도 D램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읍니다. 같은 일이라면 한국을 위해 하는 것이 더 보람있겠다 싶어 삼성의 현지법인에 입사했읍니다" 그 이듬해 한국에 와서 256KD램의 양산체제를 갖추는데 큰 역할을 했다. 미, 일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의 성과이다.
박 박사가 생의 보람으로 삼는 것은 현재 심혈을 쏟고 있는 1M D램의 개발. 삼성반도체로서도 사운을 건 프로젝트다. 이것이 완성되면 일본을 1년차로 바짝 뒤쫓는 셈이 된다고 한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일본과 경쟁한다기 보다는 쫓아간다는 말이 옳다"고 지적하는 박 박사는, 하지만 귀국동기는 "단순한 애국심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일본과 어깨를 한번 겨루어 보기 위한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첨단산업이 발전하려면 앞으로 4~5년간은 고급두뇌가 계속 유치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효율도 높고 후배도 양성하는 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선진국과 당당히 경쟁할 힘을 갖추게 된다"고 30대 후반의 설계담당이사는 자신있게 예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