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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적 자존심을 걸고 벌어지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여러 논쟁은 자칫 감정 문제로 번지는 일이 많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다. 자칫 함부로 일본 문화를 칭찬했다가는 애국심 없는 친일파로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그래도 한번은 짚고 넘어 가고 싶은 것이 일본 수학의 전통과 역사다.
어느 한 나라의 수학 수준을 다른 나라와 비교해 평가하기는 매우 어렵다. 모든 사람이 공감할 만한 척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척도로 삼을 만 한 것이 세계 수학자들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필즈상의 수상자 수다. 필즈상은 수학의 노벨상으로 4년에 한 번씩 40세 미만의 수학자들에게만 주는 상이다.
아시아에서 이 상의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며 수상자 수는 3명이나 된다. 아시아인으로 중국인 2명, 베트남인 1명이 필즈상을 더 수상했지만 이들의 국적은 호 또는 미국이거나 프랑스 · 베트남의 2중 국적이다. 그래서 중국인은 필즈상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가 있지 않다. 물론 한국인은 아직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일본인 필즈상 수상자
●1954년 고다이라 구니히코
(전공 분야 : 대수기하학, 1915~1997)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고등과학원, 존스홉킨스대, 스탠포드대에서 교수로 머물다 다시 도쿄대 교수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1970년 히로나카 헤이수케
(전공 분야 : 대수기하학 또는 대수학, 1931~)
일본 야마구치에서 태어나 교토대를 졸업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대, 콜롬비아대 교수로 머물다 일본으로 돌아와 군마현에 있는 창조학원대의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한 때 서울대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1990년 모리 시게후미
(전공 분야 : 대수기하학, 1951~)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교토대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하버드, 고등과학원, 콜롬비아대, 유타대에서 교수로 머물다 1990년 다시 교토대로 돌아와 현재까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대인도 풀기 어렵다
일본이 얼마나 오래 전부터, 또 얼마나 깊이 수학에 열중해 왔는지를 설명하지 않고서는 현재 일본의 수학 수준과 필즈상 수상자 수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산가쿠의 존재야말로 일본인의 수학적 전통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준다.
산가쿠는 풀이가 매우 단순한 것부터 아주 복잡한 것까지 다양하다. 이들의 전통적 풀이법은 유클리드의 풀이법처럼 보조선만을 사용한다. 현대식 좌표나 미분법을 사용하지 않고는 현대의 수학자도 풀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보통 문제 풀이에는 많아야 5, 6개의 보조선이 쓰이는데, 산가쿠는 푸는 데 종이가 많이 필요할 정도로 복잡하다.
특히 문제가 모호해서 풀기 어렵다. 대부분의 문제가 일본인이 일상에서 쓰는 보통 언어가 아닌 완전한 한문으로만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민 수학’임에도 현대의 보통 일본인은 그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산가쿠를 연구하는 학자조차도 어떤 문제는 답이나 풀이 과정, 그림 등을 보고 문제의 뜻을 거꾸로 찾아낼 정도로 문장이 모호한 경우도 많이 있다. 산가쿠는 대부분 공간기하에 관한 문제다. 평면기하에서 단순히 원을 구로 바꿔만 놓아도, 문제는 훨씬 복잡한 3차원 기하 형태를 띠는 것이 보통이다.
일 년 뒤, 나는 다시 산가쿠를 찾아 일본의 옛 중심지 나라로 향했다. 지난 번의 실패로 더 긴장하고 있던 나는 반드시 산가쿠를 찾아내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하며 비행기에서 내렸다. 처음에는 관광안내소에서도 그 위치를 알지 못했다. 어설픈 나의 일본어 실력 때문에 항상 영어에 의지해 자료 검색을 하다 보니 정작 일본인이 이해할 수 있게 지명을 전달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절의 이름이 ‘엔만지’라고 계속 말했다. 친절한 안내소 여직원은 주위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면서 한국에서 온 외국인의 서툰 발음을 여러 가지로 추측해보는 듯 했다. 드디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 그들은 발음이 비슷한 몇 개의 절을 검색한 뒤, 일본어로 ‘원만사’일 거라며 그곳의 위치를 지도로 프린트해 주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그 곳으로 가는 버스를 1시간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몇 개의 절, 도다이지와 코후쿠지, 카수가를 먼저 찾아보기로 했다. 일본 절에 있는 탑과 본전은 대체로 한국의 것보다 웅장하다는 느낌이 든다.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코후쿠지와 도다이지는 이른 아침임에도 수학여행을 온 듯한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길가에는 사슴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어 마치 아프리카에 있는 자연동물원을 찾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관광 안내소에서 가르쳐 준대로 엔만지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러나 정확하게 이 절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손에 든 지도만을 버스 기사에게 보여주고 근처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엔만지라는 절 이름은 처음 듣는다고 말하던 버스 기사는 30여 분을 달린 후 이쯤일거라고 말하며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정류장에서 대충 방향을 정하고 조금 걸었다. 어느덧 시골길로 접어었고 주위에는 도움 받을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걷다가 만난 한 중년의 여인. 이 사람에게서 물어볼 기회를 놓치면 다시 언제 사람을 만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도 엔만지라는 절을 알지 못했다. 별수 없이 조금 더 걸어 보기로 했다.
드디어 찾은 산가쿠!
순간 직감적으로 이곳이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 나타났다.
입구에는 하치자카진자라는 간판만 보였으나, 분명 이쯤 어디에 그 절이 있을 것 같았다. 시골의 작은 신사 안으로 들어서니 입구에 작은 사당이 보였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산가쿠는 찾을 수 없었다. 실망스런 마음에 사당 옆 허름한 목조 건물의 마루에 앉았다.
바로 그곳에 엔만지가 있었다. 내가 본 수많은 절 중에, 가장 작은 절이었다. 신사 안에 있는 작은 암자와도 같은 이 절의 처마 밑에 산가쿠가 걸려 있었다. 처음 본 산가쿠의 감동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외쳤을 법한 환호성을 나는 마음껏 질러댔다. 조용한 시골 신사는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의 고함소리로 가득 찼다. 조용히 낮잠을 즐기던 산새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놀란 듯, 나무 위로 요란하게 파닥거리며 날아올랐다.
내친 김에 점심은 대충 길거리에서 파는 도시락으로 때우고 교토로 갔다. 이곳의 관광 안내소에서는 산가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내 설명을 듣자마자 절 두 곳의 이름과 위치, 이동 방법을 알려 줬다. 시간상 오늘은 딱 한 곳만 찾아 갈 수 있을 것 같아 가까운 곳을 택했다.
‘야수이 신사’는 교토에서 가장 유명한 절 키요미주테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예전에 이곳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무리해서 걸은 나머지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고, 그 상태로는 언덕길을 오를 수가 없어 구경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키요미즈테라를 찾았다. 절에 오르는 언덕의 양쪽 길은 수학여행을 온 듯한 학생과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여기 저기 한국말도 간간히 들려왔다. 절벽 위에 나무 기둥을 이용해 세운 멋진 절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수많은 일본의 절 중에서도 이 곳에 유독 사람이 모여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갖은 전설과 보물로 가득한 키요미즈테라를 둘러보고 내려오는 뒷길에는 일본 에도 시대의 풍물이 잘 보존되어 있는 전통 가옥들이 즐비했다.
키요미즈테라의 웅장함에 넋을 놓고 있다가 시간이 많이 흘렀다. 목적지 야수이 신사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어둠이 조금씩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너무 늦어 산가쿠를 보관·전시해 놓은 건물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절의 주지를 직접 찾아가 실망이 가득한 모습으로 멀리서 찾아온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내 여행의 목적에 감격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닫힌 문이 다시 열렸고, 안으로 들어가서 마음껏 보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산가쿠에 실린 세월의 무게
산가쿠는 본래 절의 처마 밑에 걸어 놓던 것이기에 모진 바람과 풍상을 견뎌내야만 한다. 이곳의 산가쿠도 세월의 무게만큼 퇴색되고 낡아서 제대로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다행히 전시된 산가쿠 아래에 복사본이 있어 내용을 알아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날 밤 늦게 자료를 정리하다가 야수이 신사에는 최근에 만들어진 산가쿠가 몇 개 더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왜 이들은 어제 나에게 다른 산가쿠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을까?
아침 일찍 일어나 일단 어제 찾지 못한 신사 기타노텐만구를 찾았다. 이곳에 있는 산가쿠는 다른 곳보다 보관 상태가 훨씬 좋았다. 일반인이 잘 볼 수 있도록 목제 건물의 원 위치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매우 오래 돼 퇴색되긴 했지만, 내용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이것은 168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 있는 산가쿠 중에서 가장 오래 됐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난 다른 이는 가장 오래된 산가쿠가 아니라고 하니 추후 좀 더 알아볼 일이다.
이제 새로운 산가쿠를 찾아 어제의 야수이 신사를 다시 찾아갔다. 신사를 깨끗하게 쓸고 있는 청소부와 아침기도를 드리는 주지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다시 찾은 이유를 그들에게 설명했다. 어제부터 계속 나에게 호의를 보이던 주지 스님이 청소부에게 몇 마디 건네자 다시 액자를 보관해 놓은 건물의 문이 열렸다. 이곳의 일층 전시관에는 산가쿠를 소개한 프랑스 수학 교과서와 유리 액자로 된 현대적 산가쿠가 있었다.
수학도 즐기고 감상하고 느끼자
이렇게 수학문제를 나무 액자에 담아 신에게 바치는 예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일본만의 독특한 문화다. 수학을 ‘예술’로 받아들인 일본인의 특별한 사고법을 엿볼 수 있는 자료다. 이제는 일본의 주요 문화재 또는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산가쿠가 975개라고 한다.
일본은 명치유신이후 서양문물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아시아의 강대국이 됐다. 그 이유가 절이나 신사에서조차 수학을 중시하던 풍습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며 여행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