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과학기술 창작문예」는‘사이언스코리아’의 일환으로 동아일보, 한국과학문화재단, 동아사이언스가 주관하고 과학기술부가 후원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최된「2004 과학기술 창작문예」는 중편소설 부문, 단편소설 부문, 수기 부문, 아동문학 부문, 만화 부문으로 공모가 이루어졌습니다. 본 작품은 아동문학 부문 당선작입니다.
“지구에 다 왔어요!”
선장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벼리는 얼른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푸른 별 지구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디에 지구가 있다고 그래요?” “저기 있잖아요. 자세히 보세요. 찌그러지긴 했지만 분명히 지구라구요.”
벼리는 선장이 가리키는 곳을 내다보았다. 위치상으로는 분명히 지구가 있던 자리였다. 그러나 지구의 모습이 너무나 형편없어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주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아름다운 푸른빛을 띠며 반겨 주던 지구는 둥근 타원형이 아니라 마치 아무렇게나 구겨진 고철덩어리처럼 보였다. 지구의 색깔 또한 신비스러운 푸른빛에서 탁한 암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안드로메다은하에 있는 단군별에서 출발하기 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으로 직접 보니 너무나 참혹해진 지구의 모습에 벼리는 우울해졌다.
“여기가 서울 맞아요?”
빌딩은커녕 유리 파편 하나 보이지 않고 새까만 재만 쌓여 있는 황량한 벌판에 서서 벼리가 소리쳤다.
“정확합니다. 지금 벼리 씨가 서 있는 자리는 우주놀이공원이 있던 자리죠. 여기에 와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150년 전, 벼리가 어린 시절 엄마 아빠 손잡고 와서 함께 놀았던 우주놀이공원의 모습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우주놀이공원에서 만났던 친구들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한데 말이다. 그때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2002년으로 날아가 월드컵으로 열광하는 서울월드컵경기장 위를 돌았던 친구 하나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핵전쟁으로 지구가 파괴되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형체도 없이 사라졌을까? 아니면 일부 사람들처럼 안드로메다은하의 다른 별로 이주해 갔을까? 침통해 있는 벼리를 보고 선장이 위로하듯이 말했다.
“그래도 서울은 이렇게 자리라도 남아 있잖아요. 가장 격렬했던 뉴욕 쪽은 아예 땅덩어리가 패서 흔적조차 없어요. 참으로 한심하고 어리석은 사람들. 쯧쯧…”
선장이 지구 사람들을 흉보자 벼리는 자기도 모르게 부아가 치밀어 올라왔다.
“그렇게 말하는 선장의 조상이 지구 사람들이라는 걸 잊었소?”
“맞아요. 우리의 조상은 지구에서 온 우주인이죠. 하지만 그건 1만 년 전의 미개인일 뿐이에요. 벼리 씨처럼.”
“자꾸 미개인, 미개인 하는데 당신들의 문명이 그렇게도 잘났어? 기껏해야 우주 전체를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는 거? 그러나 우리 지구의 문화는 당신네들과는 차원이 달라. 물리적인 힘이 아닌, 위대한 다른 것이 있었다고!”
선장은 격분해 소리치는 벼리의 태도를 보자 아차 싶었다. 지구인들은 감정의 동물이란 것을, 그리고 그 감정 때문에 사람을 미워하기도 하고, 집착하기도 하고 죽이기까지 한다는 것을 잠깐 잊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벼리 씨. 벼리 씨가 하도 우울해 하기에 위로한다는 것이 그만.”
“아니에요. 오히려 내가 미안합니다. 오랜만에 와 본 고향이 황폐해져 있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 정말 미안합니다.”
선장은 금방 태도를 바꾸는 벼리를 보며 역시 지구인의 감정은 연구대상이구나 싶은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또 가볼곳은없나요? 여기서만 오래 지체하는 건 시간낭비예요. 돌아가는 길에 화성과 목성에도 들러 일을 보고 가야 하는데, 게다가 오늘 안드로메다은하 쟁반별에서 저녁식사 약속이 있거든요.”
“그래요. 내가 잠깐 옛날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그 시간이면 지구에서 화성까지도 다녀올수 있는 시간이죠. 지구에 오니 자꾸 생각이 많아지네요. 난 어쩔 수 없는 지구인인가봐요.”
“그럼 이제 출발할까요?”
“한 군데만 더 둘러보고 가면 안 될까요? 창녕에 있는 우포늪이라는 곳인데 유치원 때 공룡화석을 보러 갔던 생태공원이에요. 거기도 이렇게 변했는지 궁금해요.”
“아마도 지구 어느 곳이나 똑같은 모습일 거예요. 하지만 궁금하다면 가 보죠. 잠깐이면 가서 볼 수 있는 곳인데요, 뭐.”
선장의 말대로 우포늪 또한 폐허가 되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구에 사람이 살기 훨씬 전부터 살았다던 우포늪의 각종 곤충과 꽃과 풀들벼리는 어린 시절 보았던 우포늪 가시연꽃의 자태를 떠올려 보았다. 지구의 환경오염과 이상기후로 인해 멸종위기에 처해 있던 꽃이기에 특별하게 관리되던 식물이었다. 세월이 흘러 벼리가 어른이 되어 찾아갔을 때는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려 식물도감에서나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우포늪에 7월이 오면 아침 햇살을 받아 잠시 피었다가 오므라들기 때문에 사진기자들도 미리 진을 치고 기다리던 꽃이었다. 아무리 무인 원격 카메라 기술이 발달해 집에서도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지만 꽃이 피는 모습을 직접 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이제 지구상에서 생명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일까?
그런 희귀한 꽃을 벼리가 유치원에서 야외학습을 갔을 때 운 좋게도 볼 수가 있었다. 가시연꽃이 핀 것을 보았다니까 엄마도 아빠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었다. 지구상에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우포늪의 가시연꽃을 보면 커다란 행운이 찾아온다며 뛸 듯이 기뻐했던 모습이 생생
하다. 그 행운이란 벼리가 지구를 떠나 안드로메다은하를 여행하던 중 지구가 핵전쟁으로 파괴되면서 그 재난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벼리는 지구에 있던 모든 가족과 친구들을 잃었다. 혼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행운이 아니라 형벌이다.
우포늪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슬픔과 외로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벼리는 슬픔을 억누를 수가 없어 기어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옆에서 선장이 신기하다는 듯이 벼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말로만 듣던, 지구인만이 흘릴 수 있다는 눈물이란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벼리가 지구에 혼자 남기로 결정한 것은 우포늪이 있던 자리에서 본 한 포기의 이상한 풀 때 문이었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살아 있는 것이다. 그 풀은 이제까지 지구에서 보아왔던 보통 풀이 아니었다. 지구가 파괴되면서 생긴 돌연변이 같았다. 잎의 색깔도 흔히 풀이 그렇듯 초록색이 아니라 마치 사람의 피부색과 같은 살색을 띠고 있다. 그 살색 잎에서 어떤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오고 있는 것이다. 벼리는 살색 풀의 신호를 해독하기 전까지는 지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선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구에 살아남은 이 생명체와 함께 있고 싶었다. 선장이 내려주고 간 구명우주선에는 한 달 분의 물과 양식 캡슐이 남아 있다. 벼리가 물을 아껴 먹는다면 당분간 살색 풀과 함께 살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
밤이 되었다. 벼리는 살색 풀 옆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땅으로 쏟아질 듯이 가깝게 보였다. 너무나 신기했다. 지구가 폭발하기 전, 그러니까 벼리가 지구에서 살았던 시절에는 육안으로 하늘의 별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주 오
랜 옛날에는 흔한 일이었다지만 벼리가 살았던 시대는 그랬다. 조상들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시를 쓰고 노래를 지었다더니 정말 시구가 저절로 떠오를 것만 같았다.
문득지구에서의 지난날이 생각났다. 마흔 살에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아내는 지구가 파괴되기 전 157세 생일을 앞두고 잠자듯이 누워 이 세상을 하직했다. 아내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평균 수명대로 살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행복한 죽음이었다. 벼리가 아내를 잃고 상심하자 자식들이 위로 차 효도여행을 보내주었다. 당시 안드로메다은하에 있는 여러 별들을 일주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벼리 혼자 여행을 떠난 것이다. 하필 그때 지구에 대폭발이 있었다. 여행 중이던 벼리는 돌아갈 곳을 잃고 안드로메다의 별들을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즈음 들어 폐허가 된 지구를 이미 돌아 본 사람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화성과 목성에 업무 차 떠나는 선장을 따라나섰던 것이다.
“벼리야~.”
어디선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에 벼리는 눈을 떴다. 그러나 눈앞에는 폐허가 된 지구의 황량한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아마도 꿈을 꾼 듯 싶었다. 다시 눈을 감으려다 말고 옆에 있던 살색 풀을 쳐다보았다. 그때 벼리는 풀이 자신에게 뭔가 말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는 느낌을 받았다. 아까 낮부터 계속 보내 오던 신호를 다시 보내 오는 것이다. 벼리는 한참 동안 살색 풀을 바라보았다. 살색 풀은 안타깝다는 듯이 혹은 반갑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벼리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잎에 대어 보았다. 잎은 파르르 떨고 있었
다. 아니, 파르르 떨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기에게 뭔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벼리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대로 잎에 손을 댄 채 숨을 고르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S…O…S’
살색 잎은 분명히 모스통신을 사용해 벼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모스통신 방법은 아주 오랜 옛날 조상들이 한때 사용했던 고전 통신 방법인데 벼리가 젊은 시절 취미생활로 모스통신 동호회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 S.O.S는 가장 기본적인 부호로 구조요청을 말하는 것이다. 벼리는 혹 자기가 잘못 알아들은 것이 아닐까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살색 풀은 이어서 다음과 같은 단어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닌가?
‘가…시…연…꽃’
‘타…임…머…신…2…0…0…2…년…월…드…컵’
순간, 벼리는 소리쳤다.
“너는 하나?!”
‘응…나…하…나…야’
살색 풀은 반가움에 온몸을 흔들었다. 벼리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 살색 풀이 어린 시절 함께 놀았던 여자친구 하나라니. 하나와는 어른이 되어 모스통신 동호회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어린 시절에 우포늪에서 보았던‘가시연꽃’과 우주놀이공원에서‘타임
머신’을 타고‘2002년 월드컵’을 돌아 본 것을 기억하고 모스통신 부호로 서로 대화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지구 대폭발이 있던 당시 우포늪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 졌다지만 160세가 가까워 오자 노후를 보람 있게 보내고 싶어졌다. 그 동안 요리사, 고고학자, 식물학자로 살아오면서 세 번 결혼하고 이혼했지만 자식은 두지 않았다. 하나는 자식을 낳아 키우지 않은 대신 지구인의 평균 수명인 180세까지는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우포늪이라는 생태공원을 통해 어린이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한편, 인간보다 먼저 지구상에서 살 수 있었던 야생초의 번식력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먼 옛날 전설 속의 한 예언자*가 말했던, 지구가 멸망한 뒤의 인간의 모습은 마치 식물처럼 한 자리에 뿌리내려 움직일 수는 없지만 영혼은 그대로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믿을 수 없는 예언에 대한 호기심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식물에 대한 연구도 함께 하고 있었다. 지구가 폭발하면서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고 있었던 하나는 새로운 식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하나는 물을 먹지 않았다. 벼리가 물을 나눠 주려 하자 질겁하는 것이다. 새로운 식물로 태어난 하나는 물 없이 살 수 있었다. 아니, 물에 닿으면 오히려 잎이 녹아버린다고 했다. 물이 없어진 지구에 적응하기 좋은 상태로 변이된 하나는 벼리가 물을 마실 때면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제 물도 떨어져 가. 우린 언제까지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을까?”
“…….”
“이제 일주일 후면 선장이 나를 데리러 올 거야. 너를 여기에 놔두고 안드로메다은하로 가
고 싶지 않아.”
“…….”
“내 고향은 여기 지구인데….”
“……."
벼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나를 바라보았다. 모스통신으로 신호를 보내지는 않고 있지만 분명히 벼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통신 방법은 쌍방 모두 고도의 지혜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없다면 대화가 불가능한, 차원 높은 통신 방법이다. 고대인
들은 이 통신 방법을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명명했었다.
하나는 벼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1556년 8월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왕비인 카트린 메디치는 남프랑스에서 올라온 의사이자 예언자인 노스트라다무스와 이야기를 나눈다. 왕비는 예언자에게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도 질문한다. 예언자는 인류가 먼 훗날 현재의 사람 모습이 아닌, 영혼은 사람이되 식물처럼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우…리…의…고…향…은…지…구…야…지…구…를…살…려…야…해"
벼리는 하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살며시 품에 안는 것으로 응답했다. 벼리가 하나를 품에 안는 순간, 그 동안 외롭게 우주를 여행하면서 지쳤던 몸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지면서 온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선장이 지구에 도착했을 때, 벼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남았던 우포늪에는 황량한 바람만 불고 있을 뿐이었다. 구명우주선 안에는 물과 식량 캡슐이 아직 남아 있는 채로였다. 선장은 지구를 떠나면서 중얼거렸다.
“지구인들은 확실히 연구대상감이야.”
선장이 지구에 아무도 없다고 단정지은 것은, 그의 눈으로 봤을 때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 황량한 벌판에서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난 것은 보지 못했다.
하나와 벼리가 있던 자리에 이상한 생명체 하나가 생겼다.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풀도 아닌, 살색 풀인 하나보다는 사람에 가깝고 사람인 벼리보다는 풀에 가까운 이상한 생명체였다. 그러나 그 생명체는 선장이 지구에 와서 둘러보고 가면서 중얼거리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
었다.
새로운 생명체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풀도 아닌 중간의 새로운 종(種)으로 앞으로 지구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몇억년이지나사람이라는 변종이 태어날 것이고, 그 변종은 지능이 매우 높아 이제는 다시 아름다워진 지구를 주물럭거리다가 제 풀에 멸망하는 윤회를 되
풀이할지도 모른다.
“지구에 다 왔어요!”
선장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벼리는 얼른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푸른 별 지구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디에 지구가 있다고 그래요?” “저기 있잖아요. 자세히 보세요. 찌그러지긴 했지만 분명히 지구라구요.”
벼리는 선장이 가리키는 곳을 내다보았다. 위치상으로는 분명히 지구가 있던 자리였다. 그러나 지구의 모습이 너무나 형편없어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주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아름다운 푸른빛을 띠며 반겨 주던 지구는 둥근 타원형이 아니라 마치 아무렇게나 구겨진 고철덩어리처럼 보였다. 지구의 색깔 또한 신비스러운 푸른빛에서 탁한 암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안드로메다은하에 있는 단군별에서 출발하기 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으로 직접 보니 너무나 참혹해진 지구의 모습에 벼리는 우울해졌다.
“여기가 서울 맞아요?”
빌딩은커녕 유리 파편 하나 보이지 않고 새까만 재만 쌓여 있는 황량한 벌판에 서서 벼리가 소리쳤다.
“정확합니다. 지금 벼리 씨가 서 있는 자리는 우주놀이공원이 있던 자리죠. 여기에 와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150년 전, 벼리가 어린 시절 엄마 아빠 손잡고 와서 함께 놀았던 우주놀이공원의 모습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우주놀이공원에서 만났던 친구들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한데 말이다. 그때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2002년으로 날아가 월드컵으로 열광하는 서울월드컵경기장 위를 돌았던 친구 하나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핵전쟁으로 지구가 파괴되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형체도 없이 사라졌을까? 아니면 일부 사람들처럼 안드로메다은하의 다른 별로 이주해 갔을까? 침통해 있는 벼리를 보고 선장이 위로하듯이 말했다.
“그래도 서울은 이렇게 자리라도 남아 있잖아요. 가장 격렬했던 뉴욕 쪽은 아예 땅덩어리가 패서 흔적조차 없어요. 참으로 한심하고 어리석은 사람들. 쯧쯧…”
선장이 지구 사람들을 흉보자 벼리는 자기도 모르게 부아가 치밀어 올라왔다.
“그렇게 말하는 선장의 조상이 지구 사람들이라는 걸 잊었소?”
“맞아요. 우리의 조상은 지구에서 온 우주인이죠. 하지만 그건 1만 년 전의 미개인일 뿐이에요. 벼리 씨처럼.”
“자꾸 미개인, 미개인 하는데 당신들의 문명이 그렇게도 잘났어? 기껏해야 우주 전체를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는 거? 그러나 우리 지구의 문화는 당신네들과는 차원이 달라. 물리적인 힘이 아닌, 위대한 다른 것이 있었다고!”
선장은 격분해 소리치는 벼리의 태도를 보자 아차 싶었다. 지구인들은 감정의 동물이란 것을, 그리고 그 감정 때문에 사람을 미워하기도 하고, 집착하기도 하고 죽이기까지 한다는 것을 잠깐 잊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벼리 씨. 벼리 씨가 하도 우울해 하기에 위로한다는 것이 그만.”
“아니에요. 오히려 내가 미안합니다. 오랜만에 와 본 고향이 황폐해져 있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 정말 미안합니다.”
선장은 금방 태도를 바꾸는 벼리를 보며 역시 지구인의 감정은 연구대상이구나 싶은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또 가볼곳은없나요? 여기서만 오래 지체하는 건 시간낭비예요. 돌아가는 길에 화성과 목성에도 들러 일을 보고 가야 하는데, 게다가 오늘 안드로메다은하 쟁반별에서 저녁식사 약속이 있거든요.”
“그래요. 내가 잠깐 옛날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그 시간이면 지구에서 화성까지도 다녀올수 있는 시간이죠. 지구에 오니 자꾸 생각이 많아지네요. 난 어쩔 수 없는 지구인인가봐요.”
“그럼 이제 출발할까요?”
“한 군데만 더 둘러보고 가면 안 될까요? 창녕에 있는 우포늪이라는 곳인데 유치원 때 공룡화석을 보러 갔던 생태공원이에요. 거기도 이렇게 변했는지 궁금해요.”
“아마도 지구 어느 곳이나 똑같은 모습일 거예요. 하지만 궁금하다면 가 보죠. 잠깐이면 가서 볼 수 있는 곳인데요, 뭐.”
선장의 말대로 우포늪 또한 폐허가 되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구에 사람이 살기 훨씬 전부터 살았다던 우포늪의 각종 곤충과 꽃과 풀들벼리는 어린 시절 보았던 우포늪 가시연꽃의 자태를 떠올려 보았다. 지구의 환경오염과 이상기후로 인해 멸종위기에 처해 있던 꽃이기에 특별하게 관리되던 식물이었다. 세월이 흘러 벼리가 어른이 되어 찾아갔을 때는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려 식물도감에서나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우포늪에 7월이 오면 아침 햇살을 받아 잠시 피었다가 오므라들기 때문에 사진기자들도 미리 진을 치고 기다리던 꽃이었다. 아무리 무인 원격 카메라 기술이 발달해 집에서도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지만 꽃이 피는 모습을 직접 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이제 지구상에서 생명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일까?
그런 희귀한 꽃을 벼리가 유치원에서 야외학습을 갔을 때 운 좋게도 볼 수가 있었다. 가시연꽃이 핀 것을 보았다니까 엄마도 아빠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었다. 지구상에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우포늪의 가시연꽃을 보면 커다란 행운이 찾아온다며 뛸 듯이 기뻐했던 모습이 생생
하다. 그 행운이란 벼리가 지구를 떠나 안드로메다은하를 여행하던 중 지구가 핵전쟁으로 파괴되면서 그 재난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벼리는 지구에 있던 모든 가족과 친구들을 잃었다. 혼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행운이 아니라 형벌이다.
우포늪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슬픔과 외로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벼리는 슬픔을 억누를 수가 없어 기어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옆에서 선장이 신기하다는 듯이 벼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말로만 듣던, 지구인만이 흘릴 수 있다는 눈물이란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벼리가 지구에 혼자 남기로 결정한 것은 우포늪이 있던 자리에서 본 한 포기의 이상한 풀 때 문이었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살아 있는 것이다. 그 풀은 이제까지 지구에서 보아왔던 보통 풀이 아니었다. 지구가 파괴되면서 생긴 돌연변이 같았다. 잎의 색깔도 흔히 풀이 그렇듯 초록색이 아니라 마치 사람의 피부색과 같은 살색을 띠고 있다. 그 살색 잎에서 어떤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오고 있는 것이다. 벼리는 살색 풀의 신호를 해독하기 전까지는 지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선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구에 살아남은 이 생명체와 함께 있고 싶었다. 선장이 내려주고 간 구명우주선에는 한 달 분의 물과 양식 캡슐이 남아 있다. 벼리가 물을 아껴 먹는다면 당분간 살색 풀과 함께 살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
밤이 되었다. 벼리는 살색 풀 옆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땅으로 쏟아질 듯이 가깝게 보였다. 너무나 신기했다. 지구가 폭발하기 전, 그러니까 벼리가 지구에서 살았던 시절에는 육안으로 하늘의 별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주 오
랜 옛날에는 흔한 일이었다지만 벼리가 살았던 시대는 그랬다. 조상들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시를 쓰고 노래를 지었다더니 정말 시구가 저절로 떠오를 것만 같았다.
문득지구에서의 지난날이 생각났다. 마흔 살에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아내는 지구가 파괴되기 전 157세 생일을 앞두고 잠자듯이 누워 이 세상을 하직했다. 아내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평균 수명대로 살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행복한 죽음이었다. 벼리가 아내를 잃고 상심하자 자식들이 위로 차 효도여행을 보내주었다. 당시 안드로메다은하에 있는 여러 별들을 일주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벼리 혼자 여행을 떠난 것이다. 하필 그때 지구에 대폭발이 있었다. 여행 중이던 벼리는 돌아갈 곳을 잃고 안드로메다의 별들을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즈음 들어 폐허가 된 지구를 이미 돌아 본 사람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화성과 목성에 업무 차 떠나는 선장을 따라나섰던 것이다.
“벼리야~.”
어디선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에 벼리는 눈을 떴다. 그러나 눈앞에는 폐허가 된 지구의 황량한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아마도 꿈을 꾼 듯 싶었다. 다시 눈을 감으려다 말고 옆에 있던 살색 풀을 쳐다보았다. 그때 벼리는 풀이 자신에게 뭔가 말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는 느낌을 받았다. 아까 낮부터 계속 보내 오던 신호를 다시 보내 오는 것이다. 벼리는 한참 동안 살색 풀을 바라보았다. 살색 풀은 안타깝다는 듯이 혹은 반갑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벼리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잎에 대어 보았다. 잎은 파르르 떨고 있었
다. 아니, 파르르 떨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기에게 뭔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벼리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대로 잎에 손을 댄 채 숨을 고르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S…O…S’
살색 잎은 분명히 모스통신을 사용해 벼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모스통신 방법은 아주 오랜 옛날 조상들이 한때 사용했던 고전 통신 방법인데 벼리가 젊은 시절 취미생활로 모스통신 동호회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 S.O.S는 가장 기본적인 부호로 구조요청을 말하는 것이다. 벼리는 혹 자기가 잘못 알아들은 것이 아닐까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살색 풀은 이어서 다음과 같은 단어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닌가?
‘가…시…연…꽃’
‘타…임…머…신…2…0…0…2…년…월…드…컵’
순간, 벼리는 소리쳤다.
“너는 하나?!”
‘응…나…하…나…야’
살색 풀은 반가움에 온몸을 흔들었다. 벼리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 살색 풀이 어린 시절 함께 놀았던 여자친구 하나라니. 하나와는 어른이 되어 모스통신 동호회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어린 시절에 우포늪에서 보았던‘가시연꽃’과 우주놀이공원에서‘타임
머신’을 타고‘2002년 월드컵’을 돌아 본 것을 기억하고 모스통신 부호로 서로 대화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지구 대폭발이 있던 당시 우포늪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 졌다지만 160세가 가까워 오자 노후를 보람 있게 보내고 싶어졌다. 그 동안 요리사, 고고학자, 식물학자로 살아오면서 세 번 결혼하고 이혼했지만 자식은 두지 않았다. 하나는 자식을 낳아 키우지 않은 대신 지구인의 평균 수명인 180세까지는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우포늪이라는 생태공원을 통해 어린이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한편, 인간보다 먼저 지구상에서 살 수 있었던 야생초의 번식력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먼 옛날 전설 속의 한 예언자*가 말했던, 지구가 멸망한 뒤의 인간의 모습은 마치 식물처럼 한 자리에 뿌리내려 움직일 수는 없지만 영혼은 그대로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믿을 수 없는 예언에 대한 호기심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식물에 대한 연구도 함께 하고 있었다. 지구가 폭발하면서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고 있었던 하나는 새로운 식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하나는 물을 먹지 않았다. 벼리가 물을 나눠 주려 하자 질겁하는 것이다. 새로운 식물로 태어난 하나는 물 없이 살 수 있었다. 아니, 물에 닿으면 오히려 잎이 녹아버린다고 했다. 물이 없어진 지구에 적응하기 좋은 상태로 변이된 하나는 벼리가 물을 마실 때면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제 물도 떨어져 가. 우린 언제까지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을까?”
“…….”
“이제 일주일 후면 선장이 나를 데리러 올 거야. 너를 여기에 놔두고 안드로메다은하로 가
고 싶지 않아.”
“…….”
“내 고향은 여기 지구인데….”
“……."
벼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나를 바라보았다. 모스통신으로 신호를 보내지는 않고 있지만 분명히 벼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통신 방법은 쌍방 모두 고도의 지혜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없다면 대화가 불가능한, 차원 높은 통신 방법이다. 고대인
들은 이 통신 방법을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명명했었다.
하나는 벼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1556년 8월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왕비인 카트린 메디치는 남프랑스에서 올라온 의사이자 예언자인 노스트라다무스와 이야기를 나눈다. 왕비는 예언자에게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도 질문한다. 예언자는 인류가 먼 훗날 현재의 사람 모습이 아닌, 영혼은 사람이되 식물처럼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우…리…의…고…향…은…지…구…야…지…구…를…살…려…야…해"
벼리는 하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살며시 품에 안는 것으로 응답했다. 벼리가 하나를 품에 안는 순간, 그 동안 외롭게 우주를 여행하면서 지쳤던 몸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지면서 온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선장이 지구에 도착했을 때, 벼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남았던 우포늪에는 황량한 바람만 불고 있을 뿐이었다. 구명우주선 안에는 물과 식량 캡슐이 아직 남아 있는 채로였다. 선장은 지구를 떠나면서 중얼거렸다.
“지구인들은 확실히 연구대상감이야.”
선장이 지구에 아무도 없다고 단정지은 것은, 그의 눈으로 봤을 때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 황량한 벌판에서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난 것은 보지 못했다.
하나와 벼리가 있던 자리에 이상한 생명체 하나가 생겼다.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풀도 아닌, 살색 풀인 하나보다는 사람에 가깝고 사람인 벼리보다는 풀에 가까운 이상한 생명체였다. 그러나 그 생명체는 선장이 지구에 와서 둘러보고 가면서 중얼거리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
었다.
새로운 생명체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풀도 아닌 중간의 새로운 종(種)으로 앞으로 지구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몇억년이지나사람이라는 변종이 태어날 것이고, 그 변종은 지능이 매우 높아 이제는 다시 아름다워진 지구를 주물럭거리다가 제 풀에 멸망하는 윤회를 되
풀이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