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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 tech] 우리 조상은 언제부터 흰 쌀밥을 먹게 됐을까


 5700년 전 신석기 

한반도 최초의 재배 벼, 가와지 볍씨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쌀은 충청북도 청원에서 발견된 ‘소로리 볍씨’다. 약 1만5000년 전의 볍씨로 중국과 일본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볍씨보다도 나이가 많다. 그러나 소로리 볍씨는 야생종과 재배종의 중간 형태인 순화종으로 사람이 직접 재배한 흔적이 없었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재배된 벼는 ‘가와지 볍씨’다. 가와지 볍씨는 1991년 경기도 고양 신도시 개발 과정에서 발견됐다. 그 해 6월, 완전히 부패되지 않은 지층인 토탄층에서 쌀 12톨을 발굴했는데, 조사 결과 5730년 전의 쌀로 밝혀졌다. 동북아시아 지방에서 널리 키우는 자포니카 종이었다. 연구진은 개발 현장에 혼자 남아 발굴을 도와줬던 집의 당호를 따 가와지 볍씨라고 이름 지었다.

발굴팀은 어떻게 가와지 볍씨가 인간이 재배한 벼라는 것을 확인했을까. 야생 벼는 알곡이 다 익으면 벼의 줄기 부분과 낱알을 연결하는 소지경이 자연스레 떨어진다. 이것을 자연탈립 현상이라 부른다. 반면 재배 벼는 익더라도 바닥에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이 직접 손이나 도구를 이용해 수확해야 한다. 가와지 볍씨의 소지경은 사람의 손으로 강제로 뜯어 울퉁불퉁한 모습이었다. 또 같은 지층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에서도 재배 벼의 흔적을 발견했다. 신석기 사람들은 쌀을 곱게 갈아 먹었기 때문에 그 가루가 자연스레 토기 속에 섞여 들어갔던 것이다.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 

쌀밥 대신 쌀떡과 쌀죽을 먹다


우리가 밥을 떠먹을 때 사용하는 숟가락을 살펴보면 쌀밥의 역사도 볼 수 있다. 6세기에 만들어진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청동 숟가락은 손잡이 부분이 볼록해 실제로 쓰기는 어려운 형태였다. 4세기에 만들어진 부산 기장의 젓가락은 길이가 무려 30cm가 넘는다. 이런 비정상적인 숟가락과 젓가락은 왕의 권세를 나타내는 위세용이었거나 귀족층의 전유물의 가능성이 크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다른 삼국시대 유적에서는 숟가락이 발굴되지 않았다. 고려초기의 유적에서도 숟가락이 거의 발굴되지 않았다. 고려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숟가락은 최상위 귀족층의 전유물이었다. 숟가락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고려 후기 원나라 침략 이후 고깃국 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다. 따뜻한 국물과 건더기를 먹는 습관이 생기면서 숟가락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숟가락이 고려 후기에서야 널리 쓰였다면 숟가락 없이 뜨거운 밥을 어떻게 먹었을까? 믿기 어렵겠지만 조선 시대 이전까지 대부분의 백성들이 쌀밥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숟가락이 필요 없었다(다른 곡식으로도 밥을 해먹지 않았다). 조선 시대 이전에는 쌀밥은 귀족과 왕의 전유물이었다. 평민에게 쌀은 아주 귀한 작물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평민들은 조나 보리를 먹었고 귀족은 쌀을 먹었다. 밥을 지을 도구도 모자랐다. 밥을 지으려면 높은 온도와 압력을 견딜 수 있는 쇠솥이 필요한데 일반 백성들에게 쇠솥역시 귀한 물건이었다. 쇠솥이 널리 보급되기 전에는 청동 솥이나 시루를 이용해 쌀과 잡곡을 쪄서 조금씩 떼어 먹거나 죽을 끓여 먹었다. 정의도 한국문물연구원 원장은 “일반 백성까지 쌀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쌀이 풍부해지는 조선 중기 이후”라고 말했다.


 조선 영조 시대 

모내기가 조선을 뒤흔들다

일반 백성들도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조선 영조 때 시작된 모내기 덕분이다. 모내기가 우리나라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후기다. ‘고려사’에 공민왕 때 백성들이 모내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모내기가 전국적으로 실시된 영조 시대와는 400년이나 차이가 난다. 모내기는 왜 이렇게 늦게 전파됐을까?

모내기 이전에는 직파법으로 벼농사를 지었다. 밭에 씨앗을 바로 뿌려 벼를 키우는 방식이다. 반면 모내기는 ‘못자리’라는 조그마한 판에 볍씨를 뿌리고, 볍씨가 자라 모가 되면 논에 옮겨 심는다. 모내기는 직파법에 비해 장점이 많다. 논을 매는 횟수가 줄고, 원래 논의 크기인 작은 모판에 씨앗을 키우기 때문에 관리도 쉽다. 자연스레 벼 생산량이 는다. 게다가 5월에 시작해 10월에는 벼농사가 끝나기 때문에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보리나 밀을 논에 심을 수 있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모내기가 늦게 시작 된 이유는 ‘물’ 때문이다. 모내기에는 논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물이 필요하다. 실제로 모내기를 하려다 가뭄이 들어 물이 부족해지면 메밀 같은 대체 작물을 심었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는 어명으로 모내기를 금지했다. 관개 시설이 잘 정비돼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 영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모내기를 전국적으로 실시할 수 있게 됐다.

모내기가 정착되면서 조선 사회가 크게 흔들렸다. 여유 자금과 노동력이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일 년 내내 농사를 짓기위해 거름을 만드는 기술도 발전했다. 두레와 같은 공동체 활동이 생긴 것도 이 시기다. 모를 심으려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협동을 해야 했고, 저수지나 보 같은 관개 시설을 정비하기 위해서도 공동체가 필요했다. 이처럼 모내기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불러왔지만 백성 대부분은 여전히 배를 곯았다. 당시 조선의 1000m2 당 쌀 생산량은 현재의 10%에 불과했다. 봄철이면 항상 보릿고개에 시달렸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배불리 쌀밥을 먹게 된 것은 250년 뒤인 1976년이다.
 1976년 

통일벼로 쌀 자급자족 달성

전통적으로 한반도에서는 자포니카 종을 재배했다. 자포니카 종은 동북아시아 지역에 널리 재배되는 종으로 낱알이 짧고 굶다. 우리나라에서 실제 재배된, 자포니카 종의 아종이나 변종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다. 장재기 국립식량과학원 답작과 박사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수집한 재래종으로 우리 조상들이 키웠던 벼를 추측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1906년 권업모범장을 설립해 최초로 재래종을 수집하고 품종 개량에 나섰다. 당시 논의 쌀 평균 생산량은 현재(500kg)의 절반도 안 되는 237kg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으로부터 새로운 품종이 도입돼 쌀 생산량이 320~360kg까지 늘었다. 쌀 생산량이 증가했음에도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으로 국민대부분이 절대적인 빈곤에 시달렸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정은다르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 쌀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까지 나서 이집트의 척박한 토지에서도 잘 자라는 볍씨(나다종)를 비공식적으로 들여왔지만 실패했다. 한반도에서 잘 자라면서 수확량이 많은 벼 품종이 필요했다.

마침내 1964년 허문회 서울대 교수가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에서 새로운 벼 품종 개발에 나섰다. 허 교수는 자포니카와 인디카의 혼합종에 관심을 가졌다. 안남미라고 불리는 인디카 종은 자포니카 종보다 생산성은 높지만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 단순히 자포니카와 인디카 종을 교배시켜 새로운 품종을 만들면 대부분 생식을 할 수 없는, 불임 벼가 만들어졌다. 허 교수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포니카와 인디카를 교배시킨 뒤 불임이 아닌 종자를 다시 인디카와 교배시키는 3원 교배로 ‘통일벼’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통일벼는 기존의 자포니카 품종보다 30%나 생산성이 높았다.

통일벼는 1970년부터 농가에 보급됐다. 박정희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1976년에 드디어 쌀 자급에 성공했다. 그 해 수확량은 3621만 석이었다. 1978년에는 전체 벼 재배 면적의 76.2%에서 통일벼를 재배했고 평균 생산량도 500kg가까이 뛰어올랐다. 드디어 하얀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됐다.
 

 2014년 

세계화 속에 살아남기


통일벼 전성시대는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통일벼는 병충해에 약했다. 무엇보다도 자포니카 품종에 비해 맛이 없었다. 다행히 80년대 들어 비료와 장비의 발달로 자포니카 종만으로 자급자족을 할 수 있게 됐다.

쌀을 배불리 먹게 됐지만 성공하기 무섭게 우리 쌀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1980년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32.4kg이었다. 그러나 식습관이 변하면서 쌀 소비량이 꾸준히 줄었다. 작년에는 67.2kg까지 줄었다. 세계화로 인한 무역도 문제였다. 1993년 선포된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우리 정부는 외국쌀을 의무적으로 일정량 수입했다. 작년 한 해만 쌀을 50만t 이상 수입했다. 국내 쌀 생산량의 10%에 해당한다. 최근 정부는 쌀 시장 완전개방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과연 고율의 관세로 언제까지 우리 쌀을 지켜낼 수 있을지 미지수다.

값싼 외국 쌀의 공세에 맞서 한반도의 쌀도 바뀌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국내에서 개발된 쌀 품종만 30여 가지다. 이 중에는 치매를 방지하거나,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기능성 쌀이 많다. 지난해 기능성 쌀 시장의 규모는 일반 쌀 시장의 8%인 5000억 규모로 성장했다. 이제는 우리가 오래된 친구와의 의리를 지켜줄 차례다.
글 : 송준섭 과학동아 joon@donga.com

과학동아 2014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