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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공간 섬, 도시, 극한



 섬  바다 건너 머나먼 대륙으로


아프리카를 나온 인류는 동쪽으로는 동남아시아로, 서쪽으로는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이 중 동남아시아 방향으로의 ‘확산(목적없이 서서히 퍼져나갔다는 뜻)’은 6만 년 전에 시작됐는데 해안을 따라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아프리카와 더 가까운 유럽의 현생인류가 최대 약 4만 5000년 전에야 확산을 한 것에 비해 그 빠르기가 짐작이 간다.

당시 현생인류가 지구 곳곳으로 퍼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아프리카를 나온 인류가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하는 길은 무한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제한된 길만 사용했다. 동쪽으로 향한 인류는 해안을 따라 인도를 거쳐 동남아시아로 갔다. 그 뒤 당시의 열대우림을 거쳐 호주 대륙까지 확산했다. 일부는 중동에서 유라시아 북부로 이동한 뒤 내륙을 통해 동쪽으로 갔다. 석기와 같은 고고학적 유물로 판단해 보면 북쪽 경로로 간 인류는 남쪽의 바다로 간 인류보다 느리게 이동했으며 보다 정교한 석기를 제작했다. Y염색체 유전자를 이용한 유전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유라시아 동쪽 끝에 위치한 우리나라 인류는 남쪽 경로와 북쪽 경로를 통해 온 인류가 반반씩 섞여 있다.


아프리카를 나온 인류, 바닷길을 걷다

이렇게 인간이 이동한 경로가 주로 해안이나 강에 집중된 까닭은 식량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물고기 사냥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조개는 연안에서 비교적 손쉽게 채집할 수 있었다. 먹거리가 무궁무진한 바다를 두고 날마다 식량을 찾아 불확실한 모험을 해야 하는 내륙 경로를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인류는 왜 이렇게 먼 거리를 이동했을까. 해안이나 강가를 따라 주로 이동했기 때문에 인류가 확산하는 방향은 사실상 2차원(선)이었다. 즉, 앞 외에 달리 갈 방향이 없었다. 우연히 아프리카 밖으로 나와 유라시아 남쪽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동안에는 위도 변화가 거의 없었다. 즉 비슷한 기후대를 통과해 갔기 때문에 기후에 새롭게 적응할 필요가 없었고 이동도 빨랐다. 특히 열대 우림인 동남아시아 지역은 식량 등의 생산성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에 많은 인원을 부양할 수 있었다.

동남아시아에 도착한 인류는 배를 타고 바다로 향했다. 먼 호주 대륙을 향한 긴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는 빙하기로 해수면이 지금보다 낮았고 지금의 말레이시아와 수마트라 섬, 자바 섬, 발리 섬이 모두 하나의 대륙(‘순다’)으로 연결돼 있었다. 지금의 호주 대륙과 뉴기니 등이 또다른 대륙(‘사울’)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사이는 여러 개의 작은 섬을 포함한 바다였다. 인류는 이 바다를 건너 호주로 향했다.


구식 석기를 사용한 이유

그런데 이러한 인류 이동 경로와 유적, 특히 석기의 변천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석기는 인도 해안가를 지날 때까지 아프리카에서 만들던 양식(‘돌날석기’라는 대단히 정교한 석기)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좋은 재료를 이용해야 하고, 손톱만큼 작게 가공하는 ‘잔가공’ 기술도 필요한 석기다. 그런데 인도 동쪽부터 석기의 형태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더 정교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십만 년 전의 단순한 형태(‘몸돌석기’와 ‘격지석기’)로 되돌아갔다. 심지어 전현생인류인 호모 에렉투스 시대의 석기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조잡한 것도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크게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먼저 이 때의 확산이 ‘작은 집단(정확히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인류가 조금씩 조금씩 이동했다)’으로 이뤄졌는데, 작은 집단에서는 문화적 다양성이 쉽게 사라져 단순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을 ‘창시자 효과’라고 한다. 예를 들어 복잡한 석기를 가공하는 능력, 좋은 돌을 찾는 방법 등이 전수가 돼야 하는데, 작은 집단에서는 쉽게 전수되지 못할 확률이 높다.

두 번째 이유는 진화의 본질적인 요인인 자연선택이다. 다시 말해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석기를 대체할 수 있는 효율적인 대나무 등이 있었기에 굳이 제작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지역보다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서는 물건을 들고 다니기보다는 빈손으로 다니다 그때그때 지역에서 아무 돌이나 구해 즉석에서 단순한 석기를 만들어 쓰는 편이 효율적이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이 좋은 재료로 만든 정교한 석기와 그렇지 않은 석기로 효율을 시험해 본 결과 비슷하다는 결과를 얻었다. 동남아시아와 호주 지역에서 보이는, 얼핏 보면 수준 낮은 몸돌석기와 격지석기는 환경에 따른 선택일 수도 있다.

인류는 미지의 바다를 건너 새로운 대륙으로 진출했다. 그 과정에서 그 지역 환경에 맞게 적응하는 모습도 보였다. 인류에게 다른 지역으로의 진출은 본능이었는지도 모른다.


 도시   집중이 불러온 매력적인 인구 폭발
도시는 사람을 부른다. 최초의 도시 탄생 과정도 역시 사람을 불러 모으는 과정이었다. 첫 번째 계기는 농사다. 수렵과 채집으로 생활하던 시대에는 사람 1명이 먹고 살기 위해 약 10km2의 땅이 필요했다. 그런데 농사를 짓게 되면서 이 면적이 500m2로 약 2만분의 1로 줄었다. 사람들은 그만큼 더 조밀하게 살 수 있게 됐다. 자연스럽게 농사 지을 땅, 즉 농지는 사람을 밀집시키는 지리적, 경제적 기반이 됐다. 이것이 농업혁명이다.

농사기술의 개량으로 인구가 증가하자 점차 농지가 부족해졌다. 새로운 농지를 개척하기 위해 흔히 문명의 발상지라고 부르는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협력해 물을 관리하고(치수) 끌어오는(관개) 기술을 도입했다. 관개 농업이 도입되면서 사람 1명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땅 면적이 다시 약 100m2까지 줄었다. 이렇게 개척이 이뤄지는 중심지에서 도시가 탄생했다.

먼저 농사기술이 발전하고 관개시설이 증가하면서 사람들이 먹고 남은 생산물, 즉 잉여생산물이 생겨났다. 잉여생산물은 공동 생산과 공동 소비를 하는 집단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다. 즉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계급’이 탄생했다. 군인과 경찰, 종교인이 탄생했고, 교역 서비스를 전담하는 계급도 나타났다. 이들은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 않은 채 공공 서비스를 제공했고, 이 덕분에 도시는 더욱 번성했다. 번성한 도시는 더 많은 주변 농지를 확보하고 더 많은 잉여생산물을 만들었다. 이런 선순환 과정을 통해 도시는 계속 커졌다. 호주의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는 이런 변화를 ‘도시혁명’이라고 불렀다. 도시는 높은 효율성과 번영 기회를 제공하는 인류의 새로운 발명품이었다. 곧 도시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세계의 거대 도시 2010-2025
인류는 끊임없이 도시로 향하고 있다. 도시 수도 늘어나고 인구도 늘고 있다. 하지만 지역별 인구 증가율이 다르기 때문에 도시 순위 역시 계속 바뀌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의 도시가 눈에 띈다. 2010년과 2025년 세계 15대 도시를 지도에 표시해 봤다(단위 : 만 명).

 
인류 최고의 발명품, 도시

18세기 유럽에서도 도시는 사람을 불렀다. 1760년 이후 영국에서는 공업생산에 기계가 도입됐고, 그에 따라 경제와 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산업혁명).

특히 영국은 인도산 면포(캘리코) 소비가 활발했는데, 이것이 도시화에 큰 역할을 했다. 17세기 말부터 영국은 인도에서 면포를 수입했다. 하지만 18세기 말(1770년) 영국의회가 전통산업을 보호한다며 수입을 금지했다. 당장 영국의 모직산업이 각광받았다. 하지만 숙련된 방적, 방직 기술자를 구하지 못했던 도시 외곽의 지주들은 모직산업을 포기하고 넓은 땅을 농지로 운영했다. 이 농지에서 많은 농민들이 소작 농민으로 일했다.

하지만 산업혁명으로 증기기관이 발명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결정적으로 방적기와 방직기가 개발됐다. 이제 모직을 만들려는 사람은 굳이 기술자를 둘 필요가 없어졌다. 지주들은 소작농부를 내쫓고 목책을 둘러 양을 방목하기만 해도 이익이 많이 나는 모직산업에 뛰어들 수 있게 됐다. 방적기와 방직기는 농부들을 도시로 밀어냈다. 도시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런 도시화는 전 유럽으로, 나아가 점차 제3세계로 확산됐다.

20세기의 도시화는 18~19세기와는 양상이 다르다. 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매력으로 사람들을 불러오고 있다.

첫 번째 매력은 경제적 효과다. 도시는 산업과 경제력이 집중돼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한다. 고용 기회, 신분 상승, 부 축적 가능성이 주변지역에 비해 높다. 다시 말해서 취직하고 높은 소득을 얻기 위해서는 도시에 살아야 한다.

또 도시의 익명성은 주변의 신경을 덜 쓰면서 자기가 추구하는 바를 할 수 있게 한다. 도시는 혈연이나 지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목적이 일치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때문에 서로에게 개방적이며, 새로운 혁신을 만들어 낼 가능성도 더 높다.

외곽지역에 사는 것보다 도시에 살게 되면 음악회, 공원, 전람회, 도서관 등 좀 더 많은 문화시설을 이용할 기회가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외곽보다는 도시에 살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지난 20세기 후반, 자동차의 대량생산 같은 새로운 기술혁신 덕분에 도시를 뒤로 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바로 도시 외곽의 자연지대로 인구가 빠져나가는 ‘교외화’ 현상이다. 이 새로운 인구이동은 도시화의 반대인 ‘역도시화’의 한 단면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외로 빠져나갔던 인구가 다시 도심으로 돌아오는 현상(‘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났다.

이 사실만 봐도 사람은 도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시는 사람을 부른다. 인류 최후의 고향은 도시일지도 모른다.


극한  인류는 어떻게 극한 환경을 극복했나

인류는 아프리카를 벗어나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대단히 다양한 기후를 경험했다. 특히 기온과 습도가 높은 적도 부근이나 추운 극지방의 기후는 견디기 힘든 극한 기후였다. 하지만 인류는 신체적 특성을 바꿔가면서 기후에 적응하는 데 성공했다. 적도 부근의 사람들은 강한 햇빛과 무더위를 피해 까만 피부를 가지게 됐고, 피하지방을 줄였다. 반대로 극지방에서는 두꺼운 피하지방을 만들어 추위에 대비했다.

이렇게 생물학적으로 적응하는 일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극한 환경에서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도 쉽지 않았다. 자연재해도 극복해야 했다. 인류는 다양한 지역에서 환경에 맞는 고유한 생존 전략을 세워 위기를 이겨냈다.






역사를 바꾼 물줄기

큰 하천의 하류에 발달한 넓은 평야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큰 단점이 있다. 바로 홍수 위험이다.

동아시아의 경우 여름철에 강수량이 집중돼 있다. 상류와 중류에 비가 많이 오면 이 물이 몰리는 하류 평야에서는 홍수가 날 수밖에 없다. 중국 황허 강이 대표적이다. 특히 황허 강은 운반하는 토사의 양이 엄청나기 때문에 강바닥에 퇴적되면서 점점 수심이 얕아졌고, 그 만큼 홍수 위험도 커졌다.

중국은 이를 막기 위해 제방을 높이 쌓는 전략을 세웠다. 결국 높이 30m에 이르는 거대한 제방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런 제방으로도 모든 홍수를 제어할 수 없었다. 가끔 제방이 터졌는데, 그럴 때마다 강의 흐름이 바뀌었다. 강이 큰 만큼 홍수도 컸고 물줄기도 심하게 바뀌었다. 실제로 타이 산(태산)을 기준으로 남쪽을 지나기도 하고 북쪽을 지나기도 할 정도로 변경 폭이 심했다. 현재는 산의 북쪽을 흐르고 있지만,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산 남쪽으로 흘러 상하이 북쪽 지점을 통과해 서해로 빠져나가는 전혀 다른 경로로 흘렀다.

중국 역사는 황허 강을 따라 전개됐다. 초기에는 황허 강 중류의 지류 유역(장안, 현재의 시안)을 중심으로 펼쳐지다 나중에 하류(뤄양, 카이펑)로 이동했다. 이 이동은 황허 강에 거대한 제방을 쌓을 수 있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 반대로 앞선 시대로 가면 상대적으로 작은 제방으로도 견딜 수 있는 곳에 모여 살았다. 기원전 11세기부터 존재했던 주나라의 수도 시안은 황허 강의 지류에 있으며, 그보다 앞선 은나라의 유적은 작은 하천의 상류지역에 있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평야 지역에서는 거의 대부분 벼농사를 짓는다. 그렇다고 평야가 적은 지역에서 농사를 짓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류는 계단식 논을 만들어 식량 문제를 해결했다. 중국의 윈난 지방, 필리핀의 이푸가오주 등이 대표적인데, 필리핀 이푸가오주 바나우에의 계단식 논은 약 2000년 전부터 이용돼 왔다. 이런 가치 때문에 이 논은 1995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척박한 땅과 극한 기후를 이기는 적응력

북유럽 대평원에는 현재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중세 이전에는 역사에 등장하지 못할 정도로 인구가 적었다. 여름철 기온이 낮았고 토양이 척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축과 농업을 동시에 하는 혼합농업이 발달하면서 식량 증산이 이뤄졌고, 이에 따라 인구가 증가했다. 혼합 농업의 초기에는 삼포식 농업이 이뤄어졌다. 삼포식 농업은 경지를 세 부분으로 나눠서 각각을 추경지(가을에 밀, 호밀 등을 파종하여 이듬해 여름에 수확), 휴경지, 춘경지(봄에 보리, 귀리, 콩 등을 심고 가을에 수확)로 이용하고, 다음해에는 바꿔서 이용하는 방식이다.

휴경지를 두는 이유는 여름철에도 기온이 낮아서 거름이 충분히 분해돼 토양에 흡수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휴경하는 동안 가축을 방목할 수 있고, 또 가축한테서 얻은 거름을 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었다. 오늘날에는 휴경을 하지 않는데, 과거에 비해 토양이 많이 비옥해진데다 비료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혼합농업은 유럽의 인구 분포에도 영향을 미쳤다. 북유럽에서 점차 동쪽으로 퍼져나가며 동서로 가는 띠 형태의 혼합농업지대가 만들어졌는데, 이 지역은 현재 다른 지역보다 인구 밀도가 높다. 남북 방향으로는 전파되지 않은 원인은 남쪽은 중앙아시아의 건조기후가, 북쪽은 농업이 불가능한 추운 기후대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인류가 농업이 불가능한 극한 지역에 진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북극권인 그린랜드와 캐나다 누나부트 준주(작은 주)에 살고 있는 ‘이누이트’가 그 예다. 이누이트는 과거에 ‘물고기를 날로 먹는 사람들’이란 의미의 인디언 말 ‘에스키모’로 불렸던 민족이다. 주로 수렵과 낚시로 식량을 조달했다. 그밖에 순록을 키워서 고기와 가죽을 얻고, 부족한 비타민을 얻기 위해 해양 초식 동물의 위에 있는 싱싱한 해초와 생선 내장을 먹었다.

사냥을 위해서는 겨울철 눈에 덮인 지역을 이동해야 했다. 그래서 개썰매를 개발했고, 임시 거주지로 이글루를 만들었다. 이렇듯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독특한 기술이 필요했고, 그것이 문화적 특색이 됐다.

사막과 건조지역에서도 인류는 생존법을 터득했다. 북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에는 사막과 그 주변의 건조기후 지역이 넓게 발달해 있다. 이 기후 지역 중에서 사람은 오아시스나 하천이 지나는 지역, 그리고 분지 지역에 거주한다. 분지 지역의 경우 독특한 적응 방식이 나타났다. 바로 지하수로다. 분지가 건조해도 주변 산지는 강수량이 많은 경우가 있고, 고도가 높을 때는 만년설이 나타나기도 한다. 인류는 이 물을 끌어 썼다. 하지만 물을 사막으로 그대로 끌어오면 중간에 증발해 많은 물이 사라진다. 그래서 수로를 지하로 옮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란 북동부의 호라산 지역 ‘카나트’라는 지하수로가 대표적이다. 지하수로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북서부의 건조지역에까지 전파됐다. 오늘날 70억 인류가 지구 곳곳에 퍼져 살 수 있는 것은 이런 뛰어난 적응력 덕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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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지구, 70억
Part 1. 70억 인포그래픽으로 보는 인구
Part 2. 시간 1000명에서 70억으로
Part 3. 공간 섬, 도시, 극한
Part 4. 미래 100억 지구의 적들
글 : 이형우, 양승우, 박병익 | 에디터 윤신영
이미지 출처 : (CC)Starlightchild, 문경수 탐험가, 인류진화저널, 툴루즈 박물관

과학동아 2012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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